[정욱 특파원의 일본열도 통신] 일본서 인기 끄는 ‘메루카리 슈가츠’ 노인들 인생 정리하며 중고물품 떨이
정욱 기자
입력 : 2019.03.07 14:33:59
수정 : 2019.03.07 14:34:26
# 91세 노모와 함께 살고 있는 61세의 사와다 시게로 씨는 최근 새로운 일상이 생겼다.집안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버리기는 아깝지만 갖고 있기도 마땅찮은 물건을 골라내는 일이다. 이렇게 골라낸 물건들은 햇빛이 좋은 날을 골라 사진을 찍은 뒤에 중고거래 사이트인 ‘메루카리’에 올려놓는다. 판매가 이뤄진 경우에는 물건과 함께 직접 쓴 편지도 동봉한다. 자신이 왜 파는지에 대한 설명과 언제, 어디서 물건을 샀는지부터 사용하면서 있었던 일, 앞으로 잘 사용해달라는 당부를 적는 식이다.
사와다 씨는 “개인적으로 소중하게 여겨온 물건들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서도 잘 쓰이길 바라는 마음에 편지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물건을 정리하고 또 메루카리에 내놓을 준비를 하느라 사진을 찍고, 편지를 쓰고 택배를 보내고 하면서 외부 활동도 늘었다”고 설명했다.
사와다 씨가 메루카리를 시작한 것은 돈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보자는 목적이 더 컸다. 고령자가 늘면서 일본에서 확산되고 있는 슈가츠(終活)의 일종이다. 슈가츠란 건강할 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노모 외에는 친인척이 없는 사와다 씨의 경우엔 “기력이 떨어지고 나면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고 또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도와줄 사람도 없는 상황이라 미리 준비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처음엔 조금 울적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은 새로운 활력을 주는 일상이 됐다는 것이 사와다 씨의 평가다.
메루카리 슈가츠를 진행 중인 한 일본인의 계정
사와다 씨처럼 ‘메루카리 슈가츠’에 나서는 일본인들이 늘고 있다.
메루카리는 중고물품을 파는 인터넷 상거래 중개 회사다. ‘일본판 중고나라’인 셈이다. 지난해 일본 증시에 상장했고 현재 시가총액만 4112억엔(약 4조1120억원)에 달하는 스타트업이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판매 절차를 끝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아직 힘이 있을 때 자신의 물건을 정리하고 이를 제3자에게 넘기는 모든 활동을 메루카리 슈가츠라 부른다. 중고품 거래에서 메루카리의 존재감이 크다보니 메루카리 슈가츠로 이름이 붙었다.
기존에 비해 편해졌다고는 하지만 사진을 찍어야 하고 인터넷을 이용해 올리는 등의 절차가 필요해 젊은 층이 주 이용객이었으나 최근 들어 고령자들의 이용이 빠르게 늘고 있다. 메루카리 쪽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놀랄 정도다. 메루카리 홍보부의 구마 미사키 매니저는 “지난해부터 50대 이상 이용자가 예상외로 빠르게 늘고 있다”고 소개했다. 슈가츠나 생전정리 등을 키워드로 내건 상품이 지난해엔 전년에 비해 3배 가까이 늘었다.
고령자들의 이용이 늘면서 메루카리에서는 작년 12월 6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를 열었다. 당초 20명을 예상한 강연회에 188명이 응모하면서 행사 장소를 급히 늘려야 했을 정도다. 84세가 참여할 정도로 고령자 대상 행사가 많은 관심을 모으면서 메루카리 측에선 높은 인기를 고려해 추가적인 행사는 물론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상세 설명을 곁들인 이용설명서를 만들기도 했다.
메루카리 슈가츠가 늘어나는 근저에는 무엇보다 저출산 고령화 등의 가속화가 있다. 사망 후에 유품을 수습할 자녀나 가족이 없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지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물품 처리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다보니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메루카리를 찾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본의 경우 물건을 버릴 때도 상당한 처리 비용이 드는 데다 재활용센터 등을 이용할 경우 수수료도 든다. 리사이클링 센터를 이용하거나 기부를 하기 위해 물품을 직접 센터까지 들고 가야하는 부담도 메루카리 등의 서비스로 발길을 돌리게 만든 이유다. 메루카리도 사와다 씨처럼 직접 배송이 기본이지만 사전 요청하면 택배회사에서 물건을 받으러 와준다. 또 자신에게 소중한 물건에 대해 직접 설명해주고 싶어하는 욕구들이 충족되는 것도 메루카리 슈가츠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는 데 일조했다.
메루카리 슈가츠가 늘면서 메루카리 측에선 지난해 12월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설명회를 열었다. 당초 20명을 예상했던 이벤트엔 180명이 넘게 응모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사진제공=메루카리
거래가 이뤄지려면 파는 쪽만 아니라 사는 쪽도 있어야 한다. 판매자들은 ‘설마 이걸 누가 사겠어’라고 생각했지만 구매자들 사이에서도 슈가츠 상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거래가 성사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소비자들이 슈가츠 물품을 선호하는 것은 우선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경우가 많아서다. 돈보다는 자신의 물건을 정리한다는 성격이 크다보니 일반적으로 싼 가격을 책정한다.
메루카리 측에선 최근 거래된 상품 중에서 대표적인 사례라며, 20만엔짜리 페라가모 핸드백이 2만엔에 팔린 경우를 들었다. 물건을 구입한 사람은 “오래되긴 했지만 예상한 가격의 반값도 안 돼 바로 구매를 결정했다”고 평을 남겼다.
평소 구하기 힘든 상품이 많은 것도 슈가츠 물품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메루카리 측에서는 “일반적인 상품에 비해서 보존상태가 좋고 또 희귀한 물건도 많아서 평이 좋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50~60대의 경우 메루카리에서 가장 많이 판매한 상품은 음반, 미술품인 것도 이런 경향이 반영된 결과다. 20~30대에선 가장 출품이 많은 물품은 기저귀·화장실용품 등 일상생활용품인 것과는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여기에 제품 판매자들이 물건과 관련된 추억 등을 공유하면서 구매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도 한몫했다.
메루카리 측에서는 “슈가츠 상품을 구입한 고객들은 물건과 함께 사연을 담은 편지들이 와서 감동했다”는 답변이 많다고 설명했다. 또 가격협상을 위해 만든 판매자와 구매자 간 대화 기능을 활용해 인간적 교류로 이어져 추가적인 거래로 발전하는 사례도 많다.
메루카리 슈가츠의 경우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란 게 일반적인 평가다.
60대 이상에서도 스마트폰을 쓰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데다 이들 연령층에서 중고품 거래에 대한 수요가 가장 높아서다. 메루카리와 닛세이기초연구소가 지난해 남녀 253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년 동안 사용한 적이 없는 물건을 조사한 결과 60대 여성의 경우 가치가 50만엔 수준으로 평균(28만엔)의 배 수준이었다. 10대 여성에 비해서는 3.5배에 달했다.
메루카리 슈가츠 외에도 고령화와 함께 생전에 자신의 장례식을 열어 지인들과 정리의 시간을 갖는 사람들도 등장하고 있다. 생전 장례식까지 하는 사람은 아직은 드문 것이 사실이지만 슈가츠는 이제 사업 측면에서 접근하는 기업들이 등장할 정도로 확산되고 있다. 재산상속 등 유언을 비롯해 자신의 인생사를 담담히 정리하는 등의 엔딩노트는 서점 등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