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4일(현지시간) 오후, 박근혜 대통령은 유엔총회 참석차 방문한 미국 순방의 마지막 일정을 위해 뉴욕 월도프아스토리아호텔에 도착했다. 유엔 본부가 자리 잡고 있는 뉴욕 소재 5개 주요 연구기관 대표 7인과 간담회를 갖는 일정이었다.
같은 시각, 대통령의 순방에 동행한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뉴욕 42번가 하얏트호텔 프레스센터에서 마지막 기사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이날 박 대통령의 간담회는 한국행 귀국 비행기를 타기 위해 JFK공항으로 떠나기 직전에 열리는 행사였다. 대통령 전용기의 보안검색 원칙상 대통령보다 최소 1시간 반은 먼저 탑승해야 하는 기자단은 간담회 행사가 끝나는 것을 확인하고 기사를 송고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 사정을 잘 아는 청와대는 편의를 위해 이날 박 대통령이 간담회 때 발언할 내용을 미리 보도자료 형식으로 배포했다. 기자들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미리 기사를 써서 한국으로 송고한 후 부랴부랴 비행기에 탑승하러 공항으로 떠났다.
뉴욕서 ‘中·日 민감 메시지’ 해프닝
문제는 기자들이 JFK공항에 도착하자 생겼다. 청와대 관계자들이 갑자기 “행사가 이제 끝났는데 대통령은 미리 배포한 보도자료에 들어 있는 말씀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인터넷이나 신문 방송에 나간 발언 내용을 전부 취소해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기사를 송고한 기자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런 일이었다.
대통령과 관련된 기사는 주요 기사로 다뤄 대부분 1면 헤드라인에 뽑힌다. 다 써서 보낸 기사가 이제 와서 갑자기 아니라니…. 기자들은 강하게 항의했다. 특히 미국의 오후 시간대가 한국으로 치면 마감 시간인 석간 신문들은 인쇄 직전에 해당 기사를 빼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 됐다.
난처한 상황이지만 ‘팩트(Fact)’가 중요했다. 대통령이 실제 이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면 비록 사전 자료에 내용이 있었더라도 그건 팩트가 틀린 게 된다. 청와대의 해명이 맞다면 기자들이 오보를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기사를 삭제해야 했다.
해당 기사를 위해 돌린 자료에는 사실 민감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기자 역시 호텔을 떠나기 전 급하게 기사를 쓰면서 ‘아무리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하는 발언이지만 공개적으로 중국과 일본에 민감한 발언을 해도 되나’ 하는 염려가 들 정도였다.
보통 외교 기사는 애매모호한 문구로 핵심이 딱 떨어지지 않는다. 여러 나라와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단선적인 표현보다 중의적인 표현을 쓴다. 그래야 나중에 빠져나갈 구석이 있고 사정에 따라 유리한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사를 쓰기 애매한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이날 자료의 메시지는 매우 명확하고 강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