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지아 주에 위치한 애틀랜타 공항은 미국 남부의 허브(Hub) 공항이다. 인구 집중지역인 미국 동부에서 동남부 소도시로 이동하거나, 중남미 국가를 오가는 경유 항공편을 타기 위해서는 대부분 이 곳을 거친다.
2013년 12월 칠레 대통령 선거 취재를 마치고 워싱턴DC로 복귀할 때에도 그랬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10시간을 날아와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한 후, 워싱턴DC 레이건 국제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항공사 직원의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장애인이나 환자, 임산부부터 먼저 탑승하겠습니다. 게이트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미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나 환자, 임산부는 어딜 가나 대접을 받는다.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군인 먼저
흥미로웠던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1등석(퍼스트 클래스), 2등석(비즈니스 클래스)의 순서로 비행기에 탑승한다. 1등석, 2등석의 비싼 요금에는 더 넓고 편안한 좌석 공간뿐만 아니라 먼저 탑승하는 권리까지 포함돼 있다. 그 권리를 누리기 위해 이코노미 클래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낸다. 그러나 이 날은 달랐다.
“오늘 이곳에는 유니폼을 입은 많은 군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군인부터 탑승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항공사 직원이 이런 안내 방송을 하자 여기저기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먼저 탑승하기 위해 줄을 서있던 1등석, 2등석 승객들도 함께 박수를 치고 있었다. 수백달러를 들여 구입한 자신의 권리가 눈앞에서 침해당하고 있건만 기쁜 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애틀랜타 공항 근처에는 포트 배닝(fort benning)이 위치하고 있었다. 미 육군에서 ‘보병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보병 학교, 기갑 학교 등이 이곳에 몰려있다. 애틀랜타 공항에 유난히 군복 차림의 군인들이 많았던 이유다.
워싱턴DC 레이건 공항에 착륙하기 직전에도 엇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오늘 우리 비행기에는 많은 군인들이 탑승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그들이 너무 고맙습니다.” 스튜어디스의 뜬금없는 기내 방송에 승객들은 또 박수를 쳤다.
사실 미국인의 군인 사랑은 유별날 정도다. 비행기뿐만 아니라 운동 경기장이나 공식행사에서 군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하물며 군인에게 무례를 범했다가는 큰 낭패를 겪을 수도 있다. 이건 미국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2013년 5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워싱턴DC를 방문한 터키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백악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면서 해병대원에게 우산을 받쳐 들게 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이른바 ‘우산 스캔들’이다. 보수진영은 ‘남자 해병대원은 제복을 입었을 때에는 우산을 쓰지 못 한다’는 규정을 오바마 대통령이 깼다고 맹공격을 퍼부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별다른 변명을 하지 못했다.
미국인이 가장 신뢰하는 집단
2013년 10월 미국 연방정부가 폐쇄됐을 때 연방정부 공무원들은 한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군인 봉급은 손을 대지 않았다. 정쟁에 끌어들이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 대한 모독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군복이 대접받는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에서 군복이 대접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미국이란 나라는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나라다.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을 비롯해 나라를 세우고 기초를 닦은 인물 가운데 상당수가 군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오늘날 초강대국으로 올라서기까지 가장 많은 희생과 기여를 한 집단도 바로 군인이었다. 독립전쟁에서 1,2차 세계대전과 최근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미군 전몰 장병의 수가 무려 120만명에 육박한다.
미군의 정직한 군대문화도 미국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중요한 요인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집단이 바로 미국 군대다. 여러 종류의 사람이 모이는 곳이 군대이다 보니 미군이라고 실수와 잘못이 없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민들이 군대를 믿는 것은 국가를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해왔다는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미국이 ‘다민족 이민국가’라는 사실이다. 미국은 전 세계 국가에서 여러 민족과 인종이 이민을 와서 함께 모여 사는 나라다. 이런 나라가 유지되려면 이들을 한데 묶어줄 뭔가가 필요하다. 그 뭔가가 바로 군대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는 동포애를 근거로 애국심을 호소할 수 없다. 군인에 대한 높은 사회적 예우는 미국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일단 군복을 입으면 인종, 민족, 종교 등 일체의 차별이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