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치민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빈둥성의 광대한 고무나무 숲. 호치민시의 증가하는 인구를 흡수하기 위한 신도시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약 110헥타르의 넓은 면적에 고층아파트와 단독주택 단지, 상점가 등이 조성되는 이 도시의 이름은 ‘도큐(Tokyu)’로 붙여질 예정이다. 사업시행사가 일본에서 역세권 개발과 전철 운영으로 대표적인 기업인 도큐전철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국영 건설사와 합작으로 설립한 현지기업을 통해 신도시 개발에 나서고 있는 도큐전철은 일본식 도시개발 기법을 그대로 적용한 일본식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래서 도시 이름도 도큐라는 자사 명칭을 사용할 계획이다.
일본식 도시, 건설부터 문화까지 패키지 수출
도큐전철은 도쿄 핵심 상업지인 시부야 지역을 발판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도쿄의 서남부 지역을 잇는 전원도시선, 토요코선 등 대표적인 전철을 운영하고 있으며 각 역에는 역세권 상점가를 구축하는 개발사업도 진행한다. 도큐전철에 의해 조성된 도쿄 외곽의 후타코타마가와, 요우가, 토도로키 등과 위성도시인 가와사키시의 타마프라자 등 지역은 일본 가정주부들에게 가장 살고 싶은 중산층 주거지역으로 꼽힐 정도다.
특히 일본의 대표적인 신도시인 타마신도시도 도큐전철에 의해 조성됐다.
지금은 경기침체로 타마신도시의 명성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60년대 조성이 시작될 때만 해도 포화상태에 이른 대도시의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았다. 한국의 분당과 일산이 타마신도시를 모방해 건설됐을 정도다.
도큐전철은 이렇듯 일본식 표현으로 ‘마치즈쿠리(街つくり·거리만들기, 도시조성)’의 대표 기업이다.
그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해 일본식 주거문화를 베트남에 심겠다는 것이 도큐건설의 목표다.
2020년경까지 고층아파트와 단독주택 총 7500가구를 분양한다. 아파트 단지는 보행자와 차량통행이 완전히 분리되고 녹지공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등 일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고급 주거타운을 그대로 옮길 계획이다.
철저히 일본식 도시를 조성한 후 일본의 슈퍼마켓, 백화점 등 유통업체와 버스운송사업체까지 유치한다. 일본의 다양한 서비스산업이 베트남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는 것이다. 지난달 주상복합단지인 ‘소라가든’에 대한 첫 분양으로 시작된 이번 사업은 일본이 민관 합작으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도시수출’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중국 쇼핑가에 일본식 지하상가
장기침체를 겪어온 일본 경제는 지난해 말 들어선 아베 신조 자민당 정권이 추진하는 경제회생 정책인 ‘아베노믹스’ 덕분에 회생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2년간 140조엔에 가까운 자금을 풀어 경기를 살리겠다는 ‘돈의 힘’에만 의존한 경기회생 전략은 추진한 지 반년도 안돼 곳곳에서 파열음이 나오고 있다.
일본 정부 또한 돈만 풀어서는 경기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기업들의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성장전략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그 핵심은 기업들이 엔화약세를 활용해 수출을 늘려 실적을 향상시키고, 이렇게 번 이익을 투자확대와 임금인상, 고용증대 등으로 민간에 풀어서 경기선순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결국 수출확대가 시발점인데 엔약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기업들의 수출은 흡족한 수준의 증가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의 무역적자는 4월 8799억엔의 적자를 기록, 10개월 연속 적자행진을 이어갔다. 4월 무역적자 규모로는 비교 가능한 1979년 이후 최대치로, 시장의 예상치(6200억엔)를 훨씬 뛰어넘는 규모였다. 물론 엔약세로 인해 에너지 수입이 증가한 영향이 있지만 엔약세에도 불구하고 수출이 늘어나지 못한 것도 중요한 영향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대책 중 하나가 인프라 수출이다. 원자력발전, 수력발전, 수처리, 각종 자원개발 등의 산업이 중심이다. 아베 총리가 부임 후 러시아 중동 아시아 각국을 돌며 열심히 세일즈 외교를 하는 것도 이 같은 인프라 수출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이 가운데서도 주목되는 전략이 ‘도시수출’이다. 한마디로 도시 전체를 수출하는 것이다. 신도시개발, 주택건설 등 토목건축 분야는 물론 신도시가 건설된 이후 도시운영에 필요한 교통, 의료, 교육 등 기본 인프라를 구축한다. 상업지역을 조성해 일본의 외식산업, 슈퍼, 의류 판매점 등 일본식 상점가도 구성된다.
한마디로 건설부터 소비산업까지 패키지로 수출이 이뤄진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단순히 기술과 상품을 수출하는 게 아니라 ‘일본류(日本流)’라고 하는 일본 특유의 문화와 서비스를 심는다는 것이다. 일본 기술로 도시와 인프라를 건설한 후 일본식의 의식주 문화를 옮겨 놓음으로써 수십 년간 장기적으로 제품을 수출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겠다는 것이 일본식 도시수출의 핵심이다.
손일선 도쿄대 특별연구원은 “일본 도시수출의 핵심은 20~30년 후에도 다시 일본을 찾아올 수 있도록 초고도의 기술과 내구성, 문화를 결합해 공급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례로 베이징의 대표적인 쇼핑가인 왕푸징 거리에는 조만간 일본식 지하상가가 조성될 예정이다.
오사카상공회의소가 크기와 입주 점포의 다양성에서 일본 최고라고 평가되고 있는 지하상가의 개발과 운영 노하우를 그대로 수출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해왔다.
오사카상공회의소 사토 시게오 회장이 “간사이 지방 특유의 손님 접대 문화를 통해 중국의 발전에 공헌하겠다”며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는 프로젝트이다.
일본은 지하공간 개발의 역사와 노하우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 오죽하면 “도쿄의 활기를 느끼려면 지하로 들어가 봐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도쿄의 마루노우치, 유락초, 긴자 등 핵심 상업지역은 지하철역과 지하상가로 끝없이 이어진다.
중국 베이징에서 서쪽으로 약 2500㎞ 떨어진 신장 자치구의 우루무치. 그 중심에 위치한 우루무치 최고의 여성패션 상가는 14년 전 일본의 중견 섬유 수출업체인 타츠가 건설해서 운영하고 있다.
‘계산을 할 때는 반드시 서서 응대하라’ ‘쇼핑을 하지 않는 고객도 웃는 얼굴로 맞아라’ 등 일본식의 치밀하고도 친절한 접객 기술을 직원들에게 가르쳐 큰 성공을 거뒀다. 현재의 상가 넓이는 1만2000평방미터로 개업 초기보다 3배 이상 커졌다. 타츠 상가 덕분에 시세이도 등 100여개 일본의 의류, 생활용품 업체들이 우루무치에 매장을 내고 영업을 하게 됐다.
평균 연령 45세로 세계 최고령 사회인 일본은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서비스하는 보안업체가 활성화 돼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세콤 등이 대표적인 업체다. 세콤은 이미 내수시장에서 충분히 갈고닦은 실력과 노하우를 들고 중국 상하이에서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고급 유료 실버타운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식 ‘안전 문화’가 중국 부자들에게 먹힌 것이다.
간호가 필요 없는 건강한 노인들도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고령층을 대상으로 한 각종 오락서비스도 제공한다. 일본 노인들을 상대하면서 확보한 프로그램과 노하우다.
세콤은 인도에서도 유사한 성격의 300병상 규모의 병원을 경영하고 있다.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것을 감안해 5~10년 안에 2만 병상 규모의 병원 체인을 구축하겠다는 것이 세콤의 원대한 계획이다.
(위)도큐전철 베트남 신도시 모델하우스 내부, (아래)도큐전철 베트남 신도시 조감도
정부도 지원 발벗고 나서
일본기업들의 도시수출은 정부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일본과 인도네시아 양국 정부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주변 수도권에 대한 도시개발 계획에 합의했다.
2010년 12월에 ‘자카르타 수도권 투자촉진특별지역(MPA)’ 구상에 합의한 이후 꾸준히 논의해온 대규모 계획이다.
도로정비, 철도건설 등 인프라 개발을 중심으로 총 45개 사업으로 구성되며, 2020년까지 3조엔의 사업비가 투입된다.
일본에서는 미쓰비시상사, 히타치제작소, 고속도로 운영사인 수도고속도로, 지하철 운영사인 도쿄메트로 등 11개 인프라 관련 기업이 참여한다. 이들이 따낼 수주 규모는 최소 1조엔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자카르타 수도권 개발 역시 도시개발 계획수립부터 건설, 보수, 점검까지 일체의 과정을 모두 일본기업들이 진행한다. 한번 건설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수익원 확보가 가능하다. 만성적인 교통체증을 해소하기 위한 도로정비와 철도건설은 물론 안정적 전력공급을 위한 발전소 건설과 송전선 정비 등도 진행된다.
경제 산업성은 또 일본의 서비스와 제품을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는 ‘재팬 스트리트’를 아시아 주요 도시에 개설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특정 거리 한 곳을 아예 일본의 거리처럼 꾸며 각종 매장과 음식점을 입점시키고 일본의 유행과 음식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총합연구소에 따르면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10개국에서 가구당 가처분소득이 한 달에 5000달러를 넘는 중산층이 19억명에 달한다. 최근 10년 새 2배나 급증했다. 충분한 소비여력이 있는 이들이 세련된 고급문화와 안전하고 쾌적한 생활을 원하기 시작했다. GDP 세계 2위까지 올랐던 선진국이자 안전만큼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는 일본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시장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조만간 일본의 대표적인 젊음의 거리인 하라주쿠가 중국 상하이 푸동에 만들어져 현란한 분장의 코스프레를 한 젊은이들이 넘실댈지 모른다. 홍콩의 퍼시픽플레이스 주변 고층빌딩들 사이에 푸른 숲속에 나지막한 건물들이 자리 잡아 편안히 명품쇼핑을 즐길 수 있는 도쿄 오모테산도를 옮겨 겨뤄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