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속초항. 필리핀 선원들이 나와 연신 ‘굿 애프터눈’을 외쳤다. 뉴블루오션호(New Blue Oecean)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뉴블루오션호는 러시아 자루비노항을 향해 출항했다. 최대 속력 20노트(시속 36㎞)로 달리는 뉴블루오션호는 북한 동쪽 공해상을 따라 러시아 영토에 진입한다. 목적지인 자루비노항은 한국 동부지방에서 중국 동북 3성으로 이어지는 북방 루트의 첫 관문.
기자는 뉴블루오션호에 북방항로를 답사하기 위해 올라탔다. 매주 한 차례씩 속초~자루비노항, 속초~블라디보스톡항을 왕복하는 이 배에는 총 750명이 탑승할 수 있다. 하지만 이날 승객은 모두 합해 29명. 승무원 45명보다도 적은 숫자다. 이튿날인 GTI(광역두만강개발계획), 기획재정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공동 주관으로 중국 훈춘에서 열리는 ‘동북아 국가 간 경제협력 강화를 위한 세미나’에 참석하는 일행 27명을 뺀 실제 승객은 단 2명뿐이다.
출입국 심사 3회, 검문검색 4회… 제약 많아
뉴블루오션호를 운영하는 허만철 스테나대아라인 대표는 “2013년 1월 그룹에서 북방항로 개척을 위해 자본금 500만달러를 조성해 합작 법인을 설립한 지 3개월 만에 자금이 고갈돼 300만달러를 추가 투자했다”고 토로했다.
스테나대아라인은 스웨덴 최대 해운사 스테나그룹과 국내 여객선사 대아그룹이 9대 1로 공동 투자한 합작법인이다. 북방이라는 큰 미래를 위해 선제적으로 투자했지만 그 대가는 막대한 셈이다.
문제는 또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 훈춘을 방문하려면 러시아비자 발급비 13만원, 중국 비자 발급비 7만원에 통관 수수료 등을 합하면 23만원을 훌쩍 넘는 돈을 내야 한다. 오는 9월 한국-러시아 정상회담에서 비자 면제를 논의하기로 한 것이 그나마 기대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러시아 영토를 지나면서 거쳐야 하는 출입국 심사 3회, 국경수비대 검문검색 4회 등도 제약 요인이다. 이 배가 러시아를 향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잠재 고객은 중국 동북 3성이다. 특히 지린성 인구만 2658만명으로 북한 인구 2454만명(추정)보다 많다. 북방항로만 성공적으로 개척된다면 중국 동북아의 거대한 소비시장이 성큼 다가올 수 있다.
자원이 풍부한 극동 러시아도 동해 바닷길로 연결된다. 러시아 극동지역 석유매장량은 109억t(세계 7위), 천연가스는 47.6조㎥(세계 1위), 석탄 1570억t(세계 2위)에 달한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는 태평양과 대륙을 잇는 관문으로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동진정책에 따라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활발한 덕분에 천지개벽을 앞두고 있다. 동해 경제권이 활성화되면 한·중·러를 잇는 기회의 땅이 열리는 것이다. 개성공단 폐쇄로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 때문에 뉴블루오션호는 북방항로(백두산 항로)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아직 북방항로를 이용하는 승객은 적지만 언젠가 이 루트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사람이 넘치는 항로로 바뀔 것이다. 정홍상 기획재정부 대외경제협력관은 이에 “동북아는 우리나라의 블루오션으로 에너지, 물류, 관광, 농업 부문에서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김도현 기획재정부 남북경제과장은 보다 큰 틀에서 북방항로를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북아에서 협력은 양자뿐 아니라 다자간 협력이 중요하다. 특히 물리적인 거리를 고려하면 FTA에 버금가는 효과를 볼 수 있어 한국 중국 러시아 몽골 등 동북아 4개국 협의체인 GTI를 활용해 협력해야 한다.”
길이 열리면 사람과 물건이 오간다. 인적개발 물적개발이 병행될 수 있는 대목이다.
막대한 관광교류, 2030년 연간 5억명 예상
GTI는 동북아 지역 경제권을 개발하고자 한국 중국 러시아 몽골 4개국이 참여하는 지역협력협의체로 북한은 2009년 탈퇴한 상태다. GTI는 현재 다국가 경유 관광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국경 제약 없이 한국의 동해, 블라디보스토크, 백두산을 여행할 수 있도록 규제를 낮추자는 프로젝트다.
‘동북아 국가 간 경제협력 강화를 위한 세미나’에서도 이 같은 지적은 이어졌다. 주센핑 지림(길림)대 동북아연구소장은 개방 수준을 높이자고 제안했다. “중국 동북 3성과 내몽골까지 합하면 인구만 1억2000만명이다. 동북지역 지리적 이점을 살려 나선, 황금평, 위화도 지역을 중심으로 접경지역 개방 수준을 높여야 한다.”
그는 또 “북한은 2010년 1월 나선시를 특별시로 지정하고 4개 경제협력단지를 설립했다”면서 “하지만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두 프로젝트조차 통관 절차가 쉽지 않고 투자 리스크가 높은 데다 회수할 보장도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북방항로가 개척되면 막대한 관광 교류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김지연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한국 중국 러시아 등 동북아를 방문하는 관광객은 2030년 연간 5억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동북아 관광 협력을 활성화하려면 이동의 편리성을 높이고 비자발급 대상을 완화해야 한다. 특히 통과 여객이나 관광을 목적으로 단기간만 입국하는 관광객에 대해서는 무비자나 별도 출입국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북방항로인 속초~자루비노항~훈춘~옌지~백두산을 잇는 길은 무서운 속도로 개발 중이다. 특히 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훈춘은 북방항로의 중심으로 급속도로 거듭나고 있다. 우선 중국은 북한 나선 경제특구로 향하는 관문인 훈춘에 2014년까지 지린에서 출발하는 고속철도를 완공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린~옌지~투먼~훈춘을 잇는 총연장 359㎞이 고속철도다. 2010년 착공했는데 건설비만 우리 돈으로 7조원이 투입된 지린성 역점 사업이다. 중국이 북방항로 개발에 적극적인 까닭은 북한 지하자원 수입과 낙후한 국경지대 개발이라는 경제적인 목적이 크다. 중국은 동해로 나가는 뱃길인 나선항 사용권을 확보한 상태. 여차하면 물건을 싣고 동해를 이용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북방항로를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국가로 부상하는 셈이다.
실제로 취재진이 훈춘에 있는 훈춘국제버스부(터미널)를 방문했을 때 북한 나진 선봉으로 이동하는 차량이 하루 두 차례씩 있었다. 나선 특구까지는 3~4시간 남짓 소요된다. 현재 나진 선봉 특구는 크게 개발이 안됐다는 것이 중국 비즈니스인의 설명이다. 하지만 오전에 훈춘에서 출발해 북한산 해산물을 싣고 돌아와 중국 동북 3성 지역에 내다파는 상인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성장 가능성이 그만큼 큰 셈이다. 이 같은 교류에 힘입어 훈춘을 왕래하는 인원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