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 업계의 전설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 회장은 한국 나이로 팔순을 훌쩍 넘긴 83세다. 억만장자로 평생 써도 다 못쓸 부를 축적했으니 이제 뒷 선으로 물러나 여유를 부릴 때도 됐지만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놀라우리만큼 돈 냄새를 잘 맡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최근에도 엄청난 투자수익을 거두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지난해 말 소로스 회장은 엔화값 하락에 베팅했다. 무제한 양적완화와 공격적인 경기부양을 골자로 하는 아베노믹스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아베 신조의 총선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소로스 회장은 20년간에 걸친 디플레이션 사슬을 끊기 위해 아베 정부가 밀고 있는 양적완화 조치 배후에 엔저 유도라는 ‘칼’이 숨겨져 있다고 봤다. 엔화약세 유도를 통해 일본 수출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꼼수가 바로 양적완화라고 본 것. 양적완화를 통해 시장에 엔화가 넘쳐나면 당연히 엔화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베노믹스=엔화약세 유도라는 공식이 2013년 들어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본 소로스 회장은 총선 직전인 지난해 11월부터 엔화가치가 떨어지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매매포지션을 대거 쌓아나갔다. 그리고 이 같은 도박이 성공하면서 소로스 회장은 올 들어 두 달 여 만에 10억달러(1조1000억원)를 벌어들이는 대박을 터트렸다. 지난해 12월 아베 총리가 양적완화에 나선 뒤 급격히 진행된 엔화약세로 올 들어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지난 3월 중순 현재 20% 가까이 급락했다.
소로스 회장은 지난 1992년에도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고평가됐다’며 파운드화를 투매해 일주일 새 10억달러의 수익을 올린 바 있다. 당시 파운드화 가치 방어에 나선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을 굴복시켜 세계적인 악명을 떨쳤다.
올 들어 금 보유 비중 확 줄여 놀라운 감각
소로스 회장의 탁월한 투자 감각은 금시장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지난해 3분기 소로스 회장은 금 투자를 확 늘렸다. 소로스 펀드를 통해 3분기 중 세계 최대 금 상장지수펀드(ETF)인 SPDR골드트러스트 주식 132만주를 2억2140만달러에 사들이는 등 금보유량을 50%나 끌어올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일본은행(BOJ) 등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경쟁적으로 돈을 풀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중 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물가가 불안해지면 대표적인 실물자산인 금 수요가 늘어나고 결국 금값도 상승하는 게 일반적이다. 막대한 자금살포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것이라는 분위기가 힘을 받으면서 지난해 4분기 금값은 지속적인 오름세를 지속, 소로스 펀드 회장의 베팅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지난 4분기 중 금값이 상승할 때 소로스 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SPDR 주식 절반 이상(55%)을 팔아치워 수익을 실현해 버린 것. 당시만 해도 금을 꽉 움켜지고 있으면 올 들어 더 큰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전망이 대부분이었지만 소로스 회장은 과감하게 금 보유 비중을 확 줄여버렸다. 그리고 소로스 회장의 판단은 현시점에서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올 들어 3개월간 금값은 6% 가까이 급락했다. 연초 3개월간 급값 하락폭으로는 지난 88년 이후 25년래 최악이다. 경기회복 기대감속에 글로벌 투자자금이 주식 등 위험자산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금 등 안전자산 인기가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양적완화에도 불구하고 예상외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미미한 점도 헤지 수단으로써 금의 매력을 떨어뜨렸다. 달러가치가 주요통화 대비 7개월래 최고치로 상승한 것도 금값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동안 달러가치가 약세를 보이면 금값이 상승하고 반대의 경우 금값이 하락하는 흐름을 보여 왔다.
본업인 투자는 물론 대외 활동도 여전히 활발하게 하고 있다. 소로스 회장은 지난 1월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데 이어 지난 2월 25일 뉴욕 맨해튼 컬럼비아대학에서 ‘유럽의 미래’를 주제로 열린 월드리더스포럼에도 패널리스트로 참여했다. 현장에서 접한 그의 말투는 과거에 비해 많이 느려졌지만 글로벌 경제를 보는 시각은 여전히 냉철하고 통렬했다.
소로스 회장은 이날 글로벌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유로존 경기둔화의 근본적인 원인이 긴축에 있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소로스 회장은 “독일 앙겔라 메르켈 정부가 유로존 각국에 과도한 긴축정책을 강요하면서 오히려 유로존 경제를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며 독일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재정적자 감축을 위해 독일이 강요하는 긴축 처방전이 오히려 경제를 망가뜨리는 비수가 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소로스 회장의 긴축반대 논리는 이렇다.
재정적자라는 것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으로 측정된다. 그런데 정부지출 삭감·증세 등 긴축 조치를 강화하면 경기가 침체에 빠져 오히려 GDP가 쪼그라드는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것. 이렇게 되면 GDP에서 차지하는 재정적자 규모가 더 커진다는 게 소로스 회장의 지적이다. 수요부족으로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유로존에서 1유로만큼 정부지출을 줄이면 재정승수(Fiscal Multiplier) 효과 때문에 1유로 이상 GDP가 줄어든다는 게 소로스 회장의 설명이다.
유럽연합 존재론적 위기에 빠지다
때문에 결국 독일도 일방적인 긴축정책에 대한 기존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을 것으로 소로스 회장은 내다봤다. 소로스 회장은 “긴축 때문에 앞으로 유로존 상황이 더 나빠지면 결국 독일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독일이 9월 총선 이후 긴축정책을 손 볼 것”으로 내다봤다.
소로스 회장은 또 유럽연합(EU)이 존재론적 위기에 빠져있다고 판단했다. 소로스 회장은 “회원국들이 정치·경제 통합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해 만든 게 EU였는데 최근 EU 정체성이 혁명적으로 변화됐다”고 꼬집는다. 소로스 회장은 “독일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유로존 내에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재정위기에 빠진 남유럽 채무국들이 북유럽 채권국에 종속된 채 명령과 지시를 받는 이등국가로 전락했다. 이런 체제는 정치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10년 유로존 재정위기를 거치면서 EU국가 간 경제격차가 크게 벌어진 상태다. 이제 유로존은 채권국가(독일,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와 채무국(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아일랜드)으로 뚜렷이 구분돼 있다. 동일한 국가 간 자발적 결합물인 유럽연합(EU)이 이제 중심국가와 주변국가로 핵분열되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주장이다. 중심국가가 정책을 주도하고 주변국가는 영원히 열등국가로 낙인찍힌 채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소로스 회장은 또 “유로 단일 통화의 문제 중 중 하나는 바로 EU회원국들이 세뇨리지(화폐발행으로 얻는 경제적 이익)를 유럽중앙은행(ECB)에 넘겨버린 것”이라며 “이전에는 발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진국에서 결코 디폴트 위기가 생기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유로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했다. 투자흐름은 물론 전 세계 경제에 아직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소로스 회장의 현역생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