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일(현지시간) 나온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예상치를 웃돌았다. 이날 미국 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1월 CPI는 전년 동월 대비 3.1% 상승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집계한 전문가 예상치(2.9%)를 웃돌았다.
전월 대비로는 0.3% 상승해 지난해 12월 상승률(0.2%) 대비 소폭 반등했다. 전문가 예상치(0.2%) 역시 웃돌았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와 식품을 제외한 근원 CPI은 전년 동월 대비 3.9% 올라 지난해 12월 상승률과 같았다. 하지만 이 역시 전문가 예상치(3.7%)를 넘어선 수치였다. 전월 대비로는 0.4% 올라 역시 전문가 예상치(0.3%)를 웃돌았다.
앞서 미국 연방준비위원회는 FOMC에서 공개된 점도표를 통해 올해 기준금리 인하 중위값으로 3번 인하를 시사한 바 있다. 하지만 시장은 연준 기대를 훨씬 앞서나가며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를 통해 많게는 7번까지 금리를 인하해 달라는 요구를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CPI가 예상보다 높게 나오자 이 같은 기대가 무너질 거란 공포가 시장에 퍼졌다. 13일 뉴욕 증시가 크게 하락한 이유였다.
이날 미국의 물가 상승률 둔화세가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뉴욕 증시는 약세로 마감했다. 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는 전장보다 524.63포인트(1.35%) 하락한 3만8272.75에 마감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는 전장보다 68.67포인트(1.37%) 떨어진 4964.17에 거래를 마쳤다. 나스닥 지수는 역시 전장 대비 286.95포인트(1.80%) 하락한 1만5655.60에 마감했다. 특히 금리 변화에 민감한 소형주 중심 러셀2000지수는 전거래일 대비 4% 가까운 낙폭을 기록하는 등 전반적으로 미국 증시는 파랗게 질린 모습이었다.
페드워치에 따르면 금리선물 시장은 5월 통화정책 회의에서 연준이 기준금리를 인하할 확률을 전날 67%에서 이날 35%로 대폭 내렸다. 연준의 금리 인하 개시 시점 전망을 기존 5월에서 6월 이후로 늦췄다.
채권금리도 급등해 이날 오후 4시 기준 1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은 4.32%로 직전 거래일인 12일 같은 시간 대비 15bp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1월 말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뉴욕 증시는 지난해 말부터 이어진 강세장을 마감하고 본격적인 약세장에 들어갈 분위기였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바로 다음 날 미국 연준위원들과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연이어 등판해 “CPI에 너무 의미 부여할 필요없다”는 완화적인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2월 14일(현지시간) 오스탄 굴스비 시카고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몇 달간 약간 높은 인플레이션 데이터가 나올 수 있지만, 여전히 중앙은행의 목표치 2%로 돌아가는 경로와 일치할 것이라는 연설을 했다.
그는 뉴욕에서 열린 외교관계위원회(CFR) 토론 자리에서 “연준이 2% 목표치로 돌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인플레이션이 반드시 지난해 마지막 6개월 동안 만큼 낮을 필요는 없다. 예상했던 것보다 높은 한 달간 CPI가 나왔다고 해서 흥분해선 안 된다”는 연설을 했다. 그는 “인플레이션이 하락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며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2%로 끌어내리는 것이 이전보다 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연준이 12개월 기준 인플레이션이 2%에 내려가기를 기다렸다가 금리를 인하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금리 인하 타이밍을 놓칠 경우 경기침체가 올 수 있기 때문에 선제적으로 금리 인하에 나서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는 “현재 금리가 상당히 제약적이라고 생각한다”며 “제약적인 금리를 너무 오래 유지해 실업률이 너무 많이 상승하는 것에 대해 걱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같은 날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역시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는 14일(현지시간) 디트로이트 이코노믹 클럽에서 현재 추세는 인플레이션이 결정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옐런 장관은 “시간이 흐르면서 인플레이션이 낮은 수준으로 정상화하고 임금이 계속 상승해 미국인들은 이번 사태가 지나갔다는 안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라며 “사소한 변동에 초점을 맞추고 장기적이고 더 큰 추세를 보지 못한 것은 엄청난 실수”라고 지적했다. 13일 크게 하락한 미국 증시의 반응을 놓고 ‘지나치게 앞서갔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는 “미국은 장기적인 인플레이션 추세의 하락과 강력한 경제 및 임금 상승에 집중해야 한다”며 “(CPI가 높은 주범인) 주거비가 쉽게 잡히고 있지 않지만 더 지켜볼 여지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이 같은 연준의 반응은 급작스러운 게 아니었다. 연준은 오래전부터 물가를 바라보는 지표로 CPI를 사용하지 말고 PCE(Personal Consumption Expenditures·개인소비지출)를 써야 한다는 일관된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다. 패트릭 하커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 총재 역시 “CPI는 주거비 변화폭을 제때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며 “그래서 연준은 CPI보다 PCE를 선호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CPI와 PCE는 모두 월별로 미국의 물가를 측정하는 지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CPI는 미국 노동부 통계국이 계산해 발표하고, PCE는 미국 상무부 경제분석국이 분석한다.
연준이 CPI 대비 PCE를 더 선호하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PCE는 가격 변동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대체 효과)을 더 잘 반영한다. 예를 들어 특정 물품 가격이 오를 경우 소비자는 오른 물품을 소비하는 대신 그것과 비슷한 효능감을 주지만 그보다는 저렴한 다른 상품을 대신 구매할 수 있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대체효과’로 부른다. PCE는 대체효과를 감안해 물가를 계산한다. 따라서 가격변동에 따른 소비자의 행태 변화를 좀 더 정밀하게 측정하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연준 위원들이 연이어 PCE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PCE로 측정된 물가는 2% 후반대로 접어들었지만 CPI는 여전히 3% 초반대에서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 12월 FOMC 당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물가가 2%까지 내려오기를 기다려서 금리를 인하하지 않을 것”이라며 “만약 그렇게 하면 경제가 불필요한 침체를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연준은 PCE 기준으로 물가 상승률이 2% 중반대로 내려오면 금리 인하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시장 예측대로라면 금리 인하 시점은 아마도 올해 중순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CPI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 현 흐름이 그때까지 지속된다면 자칫 연준은 CPI가 3%대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 금리 인하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특히 CPI 상승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거비 상승률이 꺾이지 않는 게 문제다.
미국 노동부는 1월 CPI 보도자료를 통해 ‘이달 CPI상승분의 약 3분의 2가 주거비’라고 발표했다. 반면 질로우 등을 비롯한 민간회사에서 발표하는 주거비 지표는 이미 하락세에 접어든 지 오래다.
세계 최대 사모펀드 블랙스톤의 스티븐 슈워츠먼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참석 후 인터뷰에서 “(내가 경영하는) 블랙스톤은 미국에서 렌트용 아파트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내가 알기론) 현재 임대료 상승률은 0~1% 사이에 머무르고 있고, 연준이 사용하는 CPI 숫자는 왜곡돼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따라서 연준은 CPI 주거비가 향후 몇 개월간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을 우려해 미리부터 시장에 신호를 주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설사 CPI가 3% 초반에 머무르는 상황에서 금리 인하를 시작하더라도 그것이 연준이 인플레이션에 굴복한 게 아니라는 명분을 미리부터 쌓고 있는 것이다. 쉽게 내려오지 않는 CPI가 당혹스러운 연준의 입장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향후 금리 인하 시나리오가 어떻게 흘러갈지 관심이 모인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2호 (2024년 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