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투자자금의 주식기피 현상은 한국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은행의 자기자본 규제를 강화하는 바젤Ⅲ 도입 역시 글로벌 은행들의 자금 끌어 모으기를 부추겨 세계 증시에서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이 같은 심각한 자금흐름에 대해 세계 금융을 선도하는 리더들이 주식기피의 위험을 경고하고 나섰다. 아니 경고를 하는 선을 넘어서 채권으로 간 자금을 증시로 돌리도록 각국 지도자들이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폴 볼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과 장 클로드 트리셰 전 ECB 총재 등 세계 주요 중앙은행의 전·현직 총재와 석학들로 구성된 G30(30그룹)은 지난 2월 11일 ‘장기 자금조달경제성장’이란 보고서를 통해 세계의 자산이 지나치게 채권으로 쏠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또 세계경제가 정상적 성장 궤도로 진입할 수 있게 각국이 주식투자 비중을 높이도록 노력할 것을 요구했다.
증시 회복 안되면 매년 7조달러 필요
G30 리더들은 이런 개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선진국들이 세계경제를 정상 궤도로 돌리기 위해 2020년까지 매년 7조달러를 투입해야 하는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장 클로드 트리셰 전 ECB 총재는 “선진국이고 후진국이고를 막론하고 전 세계 자금이 주식을 등지는 방향으로 심하게 왜곡돼 있다(Bias Against Equity). 우리는 이러한 왜곡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G30 리더들은 이 문제에 대해 G20 정상회의에 제기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해법을 모색할 방침이다.
미국이나 EU, 일본 등 세계를 선도하는 중앙은행의 전·현직 총재나 저명한 경제학자들로 구성된 G30이 이처럼 주식으로 세계의 자금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자금이 주식시장을 떠나는 현재의 흐름을 방치할 경우 심각한 정치경제적 후유증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진행되면서 세계 각국은 국채를 팔아 자금을 조달하고 은행의 건전성을 확보하는 것만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각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대거 국공채를 편입하도록 유도했다. 게다가 은행들은 너나할 것 없이 생존을 위해 대출금 회수에 나서 경제의 자금 흐름을 심각하게 위축시켰다. 여기에 끊임없이 자금을 빨아들이고 있는 연기금까지 경쟁적으로 주식을 팔고 국공채 편입에 나서 민간부문의 성장을 위축시켰다. 결과적으로 이는 연기금 자체의 수익률 저하와 이에 따른 연금재원 부족을 불러 장기적으로 재정압박을 가중시킬 것이란 게 G30의 판단이다.
G30 리더들은 특히 경제성장을 위해선 장기투자가 필수인데 채권이나 은행 대출로 조달한 자금으로는 장기투자를 할 수 없기에 증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G30의 조사에 따르면 최근 대부분의 나라에서 장기투자의 30% 정도를 정부 부문이 충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경우 장기투자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39%나 됐고 영국은 34%, 프랑스나 일본은 31%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중국은 정부가 장기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7%에 불과했다.
특히 주요 연기금이 펀드 자산을 주식에서 채권이나 대안투자 자산으로 옮기고 있어 기업들이 장기투자 재원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이 때문에 G30은 그동안 채권 등에만 혜택을 주던 제도를 폐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각에선 아예 (채권 대신) 주식투자에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주식투자 분위기를 활성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에선 주식에서 은행 예금이나 채권 등으로 자금이 빠져나간 게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지금 삼성전자는 전 업종을 통틀어 세계 8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IT나 전자업종 내에서만 본다면 1위를 하는 품목이 셀 수 없을 만큼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섰다. 현대차 역시 글로벌 위기 와중에 시장점유율을 지속적으로 높여갈 정도로 경쟁력을 높였고 그에 따라 엄청난 이익을 내고 있다.
한국 기업 성과는 외국인이 누려
그런데 투자자들이 주식을 멀리하다 보니 이런 기업들이 번 이익의 상당부분이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지난 2008년 리먼사태 당시 550조원대까지 떨어졌던 코스피 시가총액은 지난 2월 15일 기준 1147조원까지 늘었다. 그러나 국내 투자자들은 한국 주식을 멀리한 까닭에 주가 상승의 기쁨을 맛보지도 못했다. 특히 한국의 간판기업들이 낸 과실의 상당부분을 외국인이 가져가는 데도 침만 흘리고 있어야 하는 실정이다.
구체적으로 외국인이 한국 시가총액 상위 100사에 투자한 규모는 지난 2008년 138조7328억원에서 2012년엔 344조8713억원으로 200조원 이상 늘었다. 국내 증시의 최대 종목인 삼성전자의 경우 외국인 지분율이 지난 2월 15일 기준 50.32%에 달한다.
올해 삼성전자는 주당 7500원씩 1조2771억원가량을 배당할 예정이라고 공시한 바 있는데 지분율로 볼 때 외국인이 6400억원 가량을 가져간다. 이처럼 올해 외국인이 한국에서 받아갈 배당액은 국내 100대 기업만 따져도 5조7537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만큼 국내 GDP 성장의 기회가 날아가는 것이다. 투자 부족이나 일자리 부족의 이면엔 국내 투자자들의 주식기피도 한몫을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