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세대’라는 말은 원래 1991년 미국의 더글러스 쿠플런드의 소설 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자기주장이 강한 신세대를 통칭하는 용어다. ‘X세대’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논쟁과 분석을 최초로 유발한 세대다. 이들 이후로 Y세대, N세대, Z세대 등 세대를 규정하는 용어들이 잇따라 생산됐다.
‘X세대’라고 불렸던 이들은 대체로 1970년대 생들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하며 학창시절을 보낸 1970년대생들은 이제 어엿이 우리 사회의 허리 역할을 담당하는 일꾼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차세대 리더그룹이다.
치열한 세대 논쟁 야기한 최초 세대
지난 2005년 제일기획은 ‘X세대, 10년 후 지금은…?’이라는 콘셉트로 <우리 시대의 미드필더, 2635세대>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제일기획이 규정한 ‘2635세대’란 과거 ‘X세대’로서 당시 26~35세를 가리켰다. 현시점에서 계산하면 정확히 30대가 된다.보고서는 ‘2635세대’를 ‘문화 향유 1세대’라고 하면서 “자기중심적이고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현실주의적이고 유행에 민감할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소비행태를 지닌 세대”라고 규정했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신세대,해외여행 자율화 혜택을 본 배낭여행 1세대, 급격한 정보통신기술 발전에 따른 인터넷 1세대, 서태지 열풍을 체험한 마니아 1세대 등으로 대변된다”고 덧붙였다.
비록 5년이 지났지만 그때 보고서 내용은 지금도 많은 부분 유용하다.계간 <문화과학> 2010 여름호에서 이재원(중앙대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은 1970년대 생들을 “역사상 유례없을 만큼 다양한 명칭으로 성격이 규정된 집단일 뿐만 아니라 특히 거의 유일하게(혹은 최초로) ‘자기 세대’의 규정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 세대”라고 말했다.
지금 30대에 해당하는 우리나라의 1970년대 생이 다른 세대와 비교해 차별화되는 이유는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와 그것에 열광한 데 기인한다. 그런데 그들이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갈구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성장과정이 유별났기 때문이다.
1970년대 생이 복잡하고 개성 있는 세대로 보이는 까닭은 성장과정에서 그들이 무척 다양한 시대적 경험을 한 데서 비롯한다. 1970년대 생의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적 경험은 그들이 새로운 것을 찾게끔 만든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1970년대 생은 출생 때부터 특이한 분위기였다. 전 국가적인 ‘가족계획’의 틀에서 태어난 것이다. 대부분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 아래 태어난 1970년대 생들은 선배 세대들과는 달리 형제가 별로 없거나 혼자 자라났다.
그나마 이들의 어린 시절은 흙을 만질 수 있었다. 1970년대 생들은 아마 흙을 만지고 또래들과 밖에서 뛰어놀며 자란 마지막 세대일 듯하다. ‘또래놀이와 흙’으로 상징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면에서는 어쩌면 운이 좋은 것일 수 있다.
나이키와 교복 자율화가 명품 선호에 영향
지금 30대의 초등학생 시절, 즉 1970년대 생 초등학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것은 이른바 ‘메이커’였다. 비록 지금처럼 가죽운동화는 아닐지언정 나이키 문양이 새겨진 운동화는 이들의 ‘로망’이었다. 이때부터 국내외 ‘메이커’들이 봇물 터진 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프로스펙스’를 변형한 ‘스펙스’, ‘월드컵’ 등 국내 중저가 브랜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도 했다. 1970년대 생들이 명품과 브랜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얘기하는데, 아마도 이런 체험 때문일 것이다.
‘교복·두발 자율화 세대’라는 점도 1970년대 생의 큰 특징 중 하나다. 일제 강점기를 연상시키는 검정색 교복과 모자를 벗어던지고 편안한 차림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며 이른바 ‘스포츠형 머리’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1970년대 생들의 사고방식은 무척 자유분방하고 자신감 넘쳐 보일 수밖에 없었다. 천편일률적인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었던 이들은 일찍부터 각자의 개성을 살린 옷차림을 추구했다. 일찍부터 리바이스, 게스, 캘빈 클라인 등 고가 청바지 브랜드를 알게 된 계기다.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이자 수학능력시험(수능) 초기 세대이기도 하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입시제도가 변한 것은 1980년 여름 대학입시제도가 본고사에서 느닷없이 학력고사로 바뀐 것과 비견될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대부분 1990년대 학번인 1970년대 생의 대학생활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엔 주체적이고 개성 있는 것이었고, 민주화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해나갔던 1980년대 학번 선배들이 보기엔 사회의식 없이 자기만 아는 ‘철없는 아이들’이었다. 비록 민주화 운동의 여운은 남아 있었지만 1970년대 생들에게 ‘1980년 광주’는 몹시 멀게만 느껴졌다. 동구권이 무너지고 대학가에서는 이데올로기가 해체되어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투쟁 일변도였던 총학생회의 노선도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이재원은 계간 <문화과학> 2010 여름호에서 “이듬해(1993년) 5월27일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이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는 구호를 내걸고 등장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된다”고 하면서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1970년대 생들은 경제 호황기에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없었다. 그런 만큼 각자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여력이 충분했다. 그들은 ‘우린 선배들과 달라’라고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나보다 우리’를 강조하던 선배세대와 달리 199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1970년대 생들은 ‘우리보다 나’를 더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해 있었던 건 아니다. 이들은 하이텔, 천리안으로 대표되는 ‘PC통신’ 1세대다. 지금의 인터넷 발달을 촉진시킨 세대인 것이다. 이들은 PC통신을 통해 다른 사람과 자유롭게 대화하고 토론했으며 학연·지연·나이·성별·지역을 초월해 어느 누구와도 친구가 되었다. PC통신 동호회 활동으로 친목도 다졌다.
서태지와 아이들 세대 외환위기로 전복
1992년, 우리나라 대중가요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다. 이름도 촌스러웠던 이 세 명의 춤꾼은 대중가요계의 판도를 삽시간에 뒤흔들어놓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보여준 노랫말과 곡, 춤은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개성 강하고 새로운 문화를 열망하던 1970년대 생들에게 서태지와 아이들은 우상이나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생들은 자신들에게 잠재돼 있던 욕망과 욕구, 에너지를 서태지와 아이들을 통해 마음껏 분출했다.
1970년대 생들의 필수품 중 하나가 ‘워크맨’으로 통하는 미니카세트였다. 종로 세운상가와 용산 전자상가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미니카세트를 다른 친구들보다 싼값에 구입해 들고 다니는 것이 큰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지금의 MP3플레이어처럼 1970년대 생들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미니카세트를 들고 다니면서 음악에 푹 빠져 있었다.
이처럼 시대적 경험에 끊임없이 부대끼며 성장한 1970년대 생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할 때쯤 또 한 번의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외환위기가 그것이다. 한편으로 외환위기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1970년대 생들이 자신의 인생행로를 정하는 데 결정타가 되었다.
학점을 유지하고 졸업한 선배들이 무난히(?) 취업하는 모습을 보며 대학시절을 보낸 이들은 졸업에 임박해 외환위기를 맞았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앞길은 어둠과 두려움뿐이었다. 사회 진출의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취업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진 이들에게 주변을 돌아볼 겨를 같은 건 더욱 없었다.
이들의 아버지는 구조조정과 ‘명퇴’ 리스트에 오른 회사원이거나 부도를 눈앞에 둔 소규모 사장들이었다.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자신마저 취업하지 못해 식구들이 언제 거리로 내몰릴지 모를 만큼 생존을 위협받았다.
때문에 이들은 부랴부랴 스펙 쌓기에 분주해졌다. 대학 입학으로 끝난 줄만 알았던 치열한 경쟁이 또 다시 유령처럼 되살아나 이들을 괴롭혔다. 취업경쟁이라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더한 경쟁에 내몰리며 1970년대 생들은 더욱 자신 안으로 파고들어갔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돈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한 1970년대 생들은 무엇보다 돈에 점점 더 큰 가치를 두게 됐으며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애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결혼이 늦어졌고, 출산이 늦어졌으며, 출산율은 낮아졌다. 아직까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성격을 가장 우선시하지만 과거와 달리 직업·직장·재산 등 ‘돈’과 관련된 조건들을 먼저 보는 사람이 점점 증가했다. 대체 국가와 사회가 해준 게 뭐냐며 불만을 쏟아냈다. 정치에 무관심해져갔고 국가와 사회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다고 1970년대 생을 자기중심적이라고 비난만 하기에는 어렵다. 이들의 성격을 그렇게 만든 건 엄밀히 말해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계획 아래 태어나 외환위기를 맞으며 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한 이들의 시대적 경험은 자의적인 게 아니라 대부분 시대와 사회의 강제적 경험이었다. 게다가 가볍게 스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묵직한 것 투성이였다. 많은 전문가들이 꼽는 1970년대 생의 공통점, 즉 자기중심적, 현실주의적, 개방적, 경제적, 유행 추구, 관습 탈피는 시대와 사회 탓에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1970년대 생들이 모두 그런 특성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주변을 돌아볼 줄 알고, 나보다는 가족을 먼저 생각하며 가족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하고 있다. 또 무조건 돈을 좇지도 않으며 배우자의 조건으로 성격을 가장 먼저 따져보고 있다.
본지가 온라인 리서치 전문기업 마크로밀코리아(www.macromill.co.kr)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다만 지금 30대인 1970년대 생들이 이전의 어떤 세대보다 유별난 특성을 보이는 것만큼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