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사이판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미국 정부에서 사이판 공장들의 인권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제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각종 제보들이 미국 정부에 전달되고 있었다. 그중에는 한국 업체도 포함돼 있었다. 급기야 미국 국무부에 제출된 보고서에 한국 기업의 적나라한 인권 탄압 실태가 명시되기도 했다. 인권이라면 자부심이 있는 미국으로서는 인권 보호를 위한 각종 규제와 함께 현지 감시 감독 강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움직임 속에 미국의 의류 패션기업들은 수입처 교체를 추진하거나 사이판에 있는 한국 기업들에 대해 생산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세아 입장에서는 억울한 측면이 많았다. 다른 곳은 몰라도 직원들과 가족처럼 한솥밥을 먹으면서 생활하는 공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김 회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이판에서 버텨보려고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면서 “미국 수입업체들이 사이판에서 만든 제품에 대해 소비자들이 불매운동까지 나서려 한다고 말하는데 달리 방도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새로 물색한 부지가 멕시코 남동쪽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 면적과 비슷한 크기의 과테말라란 곳이었다. 사이판 공장장이었던 문춘석 씨(이후 과테말라와 니카라과 공장장으로 근무)와 스페인어에 능통한 정동하 대리(현 태림페이퍼·동원페이퍼 부사장)를 현지에 보내 시장조사에 나섰다. 그게 1998년이었다. 그러니까 사이판 공장을 운영하는 가운데 두 번째 공장부지를 찾아 나선 것인데 그게 사이판을 대체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상태였다. 사이판이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에 그 당시 생각은 사업 확장 개념이었다.
마침 미국이 카리브 지역 개발 촉진계획(CBI ; Caribbean Basin Initiative)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던 참이었다. 1983년 레이건 행정부 때 시작한 CBI는 중남미, 특히 카리브 지역 국가들의 경제 성장을 촉진하여 쿠바와 같은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지켜내자는 취지였다. 과테말라를 비롯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자메이카, 도미니카공화국, 트리니다드토바고, 바하마 등 총 27개국이었다. 이 국가들의 정치 경제적 안정을 위해 제조업 지원을 강화하자는 게 요체인데 그중에서도 의류산업이 핵심이었다. 레이건의 뒤를 이은 조지 H.W 부시 대통령 때 이들 국가들에 대한 지원 확대를 위한 법이 마련되고 후임인 빌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카리브 지역 국가 간 무역 파트너십을 맺어 캐나다 멕시코 등 NAFTA 회원국 수준의 무역 혜택을 받도록 했다. 이들 국가에서 생산된 제품은 무관세로 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현지에서 35% 이상의 부가가치만 창출하면 됐다.
“사이판에도 우리가 뒤늦게 진출했습니다만 중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발 주자들이 벌써 기반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봉제의류업체 빅3 중 하나인 한솔섬유는 일찌감치 과테말라에 진출해 니트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2009년에는 8개 라인을 갖춘 우븐(Woven) 봉제공장을 인수한 데 이어 37개 라인이던 니트공장 설비도 2000년도에 50개 라인까지 늘리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때입니다. 니카라과에 자리를 잡았던 한세실업도 2001년까지 총 36개 라인을 가동하는 한편 과테말라까지 진출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김 회장은 그러나 자신 있었다. 사이판 효과였다. 다른 기업들보다 뒤늦게 사이판에 진출하고도 오히려 뛰어난 실적을 거둔 세아였다. 그 기세로 중미로 나간 것이다. 물론 세아가 과테말라에 진출하기로 결심할 당시 일각에서는 우려의 시각도 적지 않았다. 그건 사이판 진출 때도 그랬다. 선발 주자 상당수가 부진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세아는 늘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데서 더 큰 용기를 얻는 DNA가 있는 것 같다”면서 “사이판도 그랬고 과테말라도 그렇지만 솔직히 우리에겐 탈출구가 없었다”고 말한다.
세아상역이 과테말라에 진출한 지 1년 만에 대망의 수출 1억달러 탑을 수상한다. 그리고 2년 뒤인 2003년 2억달러, 또 2년 뒤인 2005년 3억달러. 그 악몽 같은 일은 이렇게 세아가 과테말라에서 고속 성장하는 와중에 일어났다.
2002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과테말라 현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법인장이 납치됐습니다.”
다급하고 놀란 목소리였다. 현지 이규익 관리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김 회장이 다시 물었다.
“누가?”
이천일 법인장이었다. 온두라스 섬유회사에서 공장 법인장으로 근무하던 사람을 천신만고 끝에 스카우트했는데 그런 황당한 일을 당한 것이다. 정말 내 일처럼 근무했던 이 법인장이었다. 매일 아침 7시 이전에 출근했다. 집에서 나가는 시간은 새벽 5시. 교회에서 새벽 예배를 보고 회사에 나왔다. 그런데 그날은 7시가 넘어도 출근을 안 하는 것이었다. 집에 전화를 걸어보니 다른 날과 같이 5시에 나갔다고 하고 교회에 확인해보니 안 왔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리저리 행방을 수소문하던 중 현지 법인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우리가 데리고 있다. 이 사람 살리려면 현금 200만달러를 준비해라. 경찰에 신고하면 이 사람은 죽는다. 다시 전화할 테니 기다려라.”
그게 끝이었다. 보고를 듣고 김 회장은 비상연락망을 가동했다. 전 임원을 세아 본사 회의실로 소집했다. 본인도 서둘러 회사로 갔다. 당시는 운전기사를 두지 않고 손수 소나타 승용차를 몰던 때였다. 온몸이 떨려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택시를 불렀다. 자택인 대치동 선경아파트에서 삼성역에 위치한 본사까지 가는 시간보다 택시 기다리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렇게 회사에 도착하니 서서히 임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더러는 저녁 때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았는지 얼굴이 벌건 임원들도 있었다. 대책 회의가 시작됐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과테말라는 아침 9시 직전이었다.
김 회장은 임원진들의 의견을 모아 결론을 내렸다. 일단 여기서 200만달러를 송금한다. 지금 밤이니 날이 밝는 대로 은행에 가서 절차를 밟는다. 그리고 과테말라 현지에서는 납치범들에게 2, 3일 내로 돈이 도착할테니 그때까지는 시간을 달라고 해라. 경찰에는 절대로 신고하지 말라. 그리고 납치범들에게 연락이 오면 즉시 본사로 보고하라. 우리는 여기서 대기하겠다. 이런 내용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뿐. 김 회장은 과테말라에 있는 이 법인장 부인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으나 그냥 위로 전화라도 거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부인은 의외로 의연했다. 부부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교회 목사님에게 납치 소식을 알리고 기도를 부탁했다고 한다. 아들 부부는 미국 시카고에 있었고 딸은 한국에 있었는데 다들 법인장의 무사 귀환을 비는 기도를 했다.
3시간을 그렇게 초조하게 보냈다. 그러던 중 과테말라 이규익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흥분된 목소리였다.
“이천일 법인장이 탈출했답니다. 지금은 병원에 있다는데 바로 가서 만나보겠습니다.”
일단 살아있다는 건 확인했다고 한다. 그 소식에 본사에 대기 중이던 임원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얼마 후에야 상황 파악이 됐다. 추후 이 법인장의 증언을 토대로 그날의 상황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이 스토리는 김 회장은 자서전 <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에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 법인장이 새벽에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와 교회로 가는 도중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섰다. 그때 갑자기 뒤에 오던 승용차가 가볍게 들이박았다. 백미러로 보니 운전자 한 명만 타고 있어 문을 열고 뒤로 돌아가 범퍼를 살피는데 어디선가 두 사람이 달려들어 이 법인장의 양팔을 낚아채더니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머리에 검은 두건을 씌웠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손발을 결박하고는 머리를 들지 못하게 눌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차가 멈춰 서더니 건물 안으로 들어가 두 발을 묶고 대충 결박했던 손도 다시 묶었다. 이 법인장은 납치를 직감했다. ‘이대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범인들은 이 법인장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문을 닫고 나갔다. 밖에서 열쇠로 문 잠그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뒤론 정적이 흘렀다. 소리쳐 봤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냥 혼자 방 안에 갇힌 것이었다. 일단 고개를 흔들고 몸부림을 치자 두건을 벗을 수 있었다. 손발은 전깃줄로 묶여 있었다. 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 소리도 안 들리는 걸 봐선 도로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인 것 같았다. 방 벽은 판자로 돼있는데 어설퍼 보여 몸으로 세게 부닥치면 부서질 것도 같았다. 이대로 있느니 탈출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건 그때였다.
이 법인장은 일단 전깃줄을 이빨로 풀기 시작했다. 단단히 묶인 데다 코일 때문에 쉽지 않았다. 입술과 혓바닥이 갈라지고 피가 나기 시작했다. 피가 침과 함께 전깃줄을 적셨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결국 손의 결박을 풀었다. 발은 간단하게 풀 수 있었다. 이제 판자벽을 향해 온몸을 던졌다. 벽에 몸이 튕겨져 나왔다. 몇 차례 시도를 했지만 판자는 요동조차 안 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과테말라 원주민 여자였다. 그녀는 이 법인장이 결박을 푼 걸 보더니 바로 문을 닫고 나가면서 스페인어로 소리를 질렀다. 머릿속이 하얗게 됐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순간 몸이 얼어붙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건물 문이 열리더니 인디오 남자가 나타났다.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었다.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는 순간 총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뭔가 이물질이 목을 뚫고 들어오는 걸 느꼈다. 그리곤 암흑이었다. 이 법인장은 정신을 잃었다.
이 법인장이 온몸에 고통을 느끼고 깨어난 건 그로부터 2시간 정도 지나서였다. 확실한 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 총알은 어디 박혔는지 몸을 뚫고 나갔는지 모를 일이나 셔츠는 피로 범벅이 돼있었다. 양복 상의와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피를 많이 흘렸는지 현기증이 났다. 간신히 손을 짚고 일어나 보니 문이 반쯤 열려있었다. 방문을 열고 복도를 통해 마당으로 나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마 납치범들은 그가 죽을 줄 알고 팽개쳐놓고 다른 일을 보러 나갔을 것이리라. 철제 대문은 잠겨있었다. 온 힘을 다해 담벼락을 넘었다. 밖은 골목이었다.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골목을 벗어나니 대로변. 차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손을 흔들어 댔지만 많은 차들이 그냥 못 본 척 지나쳤다. 그러다가 승합차 한 대가 멈추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였다. 그 할아버지가 이 법인장을 병원까지 데려다줬다. 그는 살아났다.
김 회장은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고 한다. 세아 역사상 가장 아찔했던 순간이라고 말한다.
“과테말라에서 법인장이 납치되었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사고였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생명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한밤중에 납치 소식을 들었을 때 충격을 떠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지구 반대편이라 당장 달려갈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최고경영자로서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법인장은 과테말라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아들이 있는 미국 시카고로 가서 수술을 받았다.
“저는 그때가 돼서야 시카고로 갔습니다. 총알은 견갑골을 뚫고 심장 바로 앞에서 멈췄는데 그걸 수술로 빼낼지 말지는 상황을 봐서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3개월을 기다렸습니다. 관찰 결과 총알의 움직임이 없어 오히려 수술을 하는 게 위험하다면서 그냥 둬도 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법인장은 지금도 몸에 총알이 박힌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23년째인데요. 비행기를 탈 때면 금속탐지기에 걸려 ‘삑’ 하고 소리가 나 늘 증명서를 지니고 다닙니다.”
어느 정도 사건이 마무리되자 김 회장은 범인을 반드시 검거해야 한다는 결심으로 과테말라 대통령을 만났다. 비서실장과 검찰총장을 만나 납치범을 잡아서 처벌해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몇 개월 후 범인 12명 중 3명을 사살하고, 7명은 검거했으나 나머지 2명은 캐나다로 도주하여 찾지 못했다. 사후 조치도 철저하게 했다. 과테말라 법인장과 임원에게는 미국에서 수입한 방탄 차량을 제공하고, 경호 차량을 상시 운행토록 했다. 다행히 그 뒤로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