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에게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건 하던 일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운 걸 하나 더하는 것보다 해로운 걸 하나 제거하는 게 훨씬 좋을 때가 많다. 대부분 경영자는 버려야 할 때 버리지 못해 화를 당한다. 그런 점에서 서 회장은 해로운 게 아니라 아예 이로운 걸 버리는 과감한 결단을 단행한다. 2010년 1월 25일, 셀트리온은 BMS(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와의 CMO 계약을 중단했다. 이유인즉, 셀트리온이 개발 중인 바이오시밀러의 생산을 앞두고 있어 위탁계약을 수행할 생산설비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고 했다. 현찰을 버리고 어음을 받겠다는 것이냐고 했다. 사실 셀트리온은 그동안 BMS 덕에 먹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셀트리온이 BMS에 오렌시아의 원료를 공급하면서 얻은 매출은 1000억원을 웃돌았다. 10년 동안 이 계약을 유지하면 매년 1000억원의 매출이 생기는데 이를 발로 걷어찬 것이다.
서 회장은 알게 모르게 BMS로부터 수모를 당한 경험이 있다. 한번은 BMS 뉴저지 본사에서 일정을 마치고 서울 김포공항에 내렸는데, 김형기 부회장으로부터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를 받았다. 다시 비행기 타고 뉴저지로 갔더니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 마음은 급한데 담당자는 30분 정도만 얘기를 나누다 집에 가야 한다고 자리를 떴다. 성과 없이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그러나 수모로만 사업 변경을 했겠는가. 서 회장은 나름 계산이 서 있었다.
“셀트리온은 이때 바이오시밀러 개발을 위한 제품 및 공정 개발 능력은 물론 기술 개발과 생산에 소요되는 자금도 확보했습니다. 선진국 인증기관의 승인 경험도 있었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몰라도 저는 자신감 충만이었지요. 그리고 시장 전망도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선진국 시장에서 판매 중인 매출액 1조원 이상의 오리지널 의약품이 대부분 2010년을 기점으로 특허 만료가 예상됐거든요. 각국 정부에서 과다한 의료비 지출을 억제하기 위해 바이오시밀러 개발을 장려하고 있어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이런 자신감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면밀한 사전준비와 분석에서 비롯된다. 2007년 10월 셀트리온은 유한양행의 바이오의약품 프로젝트에 공동 참여한다. 그게 류머티즘성 관절염 치료제였다. 존슨앤드존슨의 래미케이드, 그리고 나중에 나오게 되는 셀트리온의 바이오시밀러 램시마와 성능이 유사한 의약품이었다. 2002년부터 5년간 성과를 내지 못한 유한양행의 프로젝트에 서 회장이 뛰어든 것이다.
“세포주 개발부터 임상 물질 생산에 드는 비용을 반반씩 투자하자고 했죠. 만약 의약품 개발에 성공하면 그 대가로 우리는 판권과 특허를 가져오겠다고 한 것입니다. 성공하면 셀트리온은 이 약을 독점 생산하고 전 세계에 판매할 수 있는 권리로 큰돈을 벌 수 있는 것이고, 실패하면 재무구조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나는 얻는 게 있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얻은 게 뭐냐고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방향이지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신약 개발 대신 바이오시밀러에 올인하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 그게 셀트리온이 얻은 성과입니다. 램시마는 이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2008년부터 셀트리온이 해외 바이어들로부터 위탁생산을 의뢰받았을 때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우며 공동 개발하자고 역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서 회장은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셀트리온의 기술력을 높이는 방향이라고 판단했다”며 “실패해도 R&D 경험과 노하우는 남는다고 봤다”고 말한다.
“사실 성공한 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을 벌었습니다. 단기간에 백신, 항암제,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등 다양한 분야의 해외 파트너사를 확보할 수 있었고, 연구개발 측면에서도 최신 바이오 트렌드와 약물 개발 과정을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셀트리온이란 브랜드 인지도도 높아졌습니다.”
램시마에 대한 유럽 승인을 받은 날, 그의 머리 속은 동료 직원 5명과 함께 창업해 갖은 고생을 한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창업했을 때의 절박함이 오버랩됐다. 서 회장이 대우자동차에 사표를 낸 1999년 12월 31일. 그는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머리 식히러 외국 간 게 아니었다. 산둥성 옌타이에 소재한 대우차 엔진 생산공장에 근무하는 부하직원 기우성을 만나러 간 것이다. 그해 3월 옌타이 공장은 6개월 시한으로 경영혁신을 담당할 책임자 한 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현지에서 부장이나 임원급을 지휘해야 하니 그에 상응하는 직급의 인물을 보내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찾은 사람이 당시 과장이었던 기우성, 과장이란 타이틀로는 갈 수가 없으니 컨설턴트란 직책을 달고 고문으로 파견한다. 보수는 제법 됐다. 20만달러였으니 당시 환율을 적용하면 원화로는 2억5000만원 쯤 되는 돈이었다. 그러나 그 중국 촌구석에서 혼자 외롭게 일해야 하는 거라 썩 내키는 자리는 아니었다. 서 회장은 미안한 마음으로 기우성을 중국으로 보냈고, 하필이면 그 뒤 분식회계 사건이 터지면서 대우 그룹은 공중 분해된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기우성. 서 회장 본인도 백수로 새로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처지라 믿을만한 부하 기우성에게 같이 사업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뭘 하는지, 언제 하는지, 이런 것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리곤 중국에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자마자 서정진 캠프에 합류한다. 2000년 3월 31일에 귀국, 식목일인 4월 5일에 첫 출근한다. 서 회장은 이미 사무실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인천 연수구청 7층에 벤처센터가 있었는데, 그중 두 블록을 잡아 ‘넥솔’이란 이름으로 벤처회사를 차렸다. 넥솔은 다음의 해결책이라는 ‘넥스트솔루션(Next Solution)’의 약자. 연수구청은 벤처기업을 키우겠다는 심산으로 청사에 벤처보육센터를 만들고 10개 벤처기업을 선정해 초저가로 임대해 줬는데, 넥솔이 1호 기업이었다. 초기 직원은 단 두 명. 서 회장과 대우차에서 차장 겸 팀장으로 같이 일했던 유헌영 씨. 그는 인하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1985년 대우자동차가 르망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입사했다가 1987년 기업컨설팅 작업을 수행하면서 당시 생산성본부에 근무했던 서 회장을 만나게 된다. 이게 첫 인연. 현재는 셀트리온 지주회사인 홀딩스와 화장품 회사인 셀트리온스킨큐어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공교롭게 이렇게 3인이 모두 산업공학을 전공했다. 서 회장은 건국대, 기 부회장은 한양대 출신. 서 회장은 유 부회장에게 대우를 그만두고 동업하자고 제안한다.
“우리 같이 나가자. 그동안 고생 많이 하지 않았는가. 이제 좀 편하게 살자. 컨설팅도 하고 무역도 하고. 뭐 사업 좀 하면 돈 되지 않겠냐”며. 유 부회장은 뭔가 일을 하려면 공간이 있어야 한다며 사무실을 얻는데, 그게 연수구청 벤처보육센터였다. 사무실을 얻자마자 중고 가구점을 돌아다니며 책상과 소파를 구입하고 사무실 집기를 들여놓았다. 사업 아이템을 잡지 않았으니 출근해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서로 앞으로 뭘 할까 논의하는 것 외에는 사무실 청소나 할 수밖에.
이들에 이어 넥솔에 합류한 대우차 동지가 김형기 전략기획팀장. 과거 셀트리온 판매를 담당하던 셀트리온헬스케어 대표이사 부회장이다. 회사를 차리면 재무 회계 등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한데 김 팀장이 제격이었고 서로 마음도 맞는 팀원이었다. 이렇게 서 회장을 따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한 세 사람을 창립 3인방이라 부르고, 여기에 2명이 더 합류하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지난 2017년 퇴사한 대우차 기획조정실 차장 출신의 문광영 씨가 있다. 셀트리온 계열사인 스킨큐어 사장을 지냈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사람은 대우자동차 기획조정실에 있다 폴란드 법인으로 발령받아 일하던 이근경 차장이다. 공교롭게 처가가 연수구청 근처에 있어 서 회장의 창업 소식을 듣고 인사차 방문했는데, 그길로 붙잡힌 케이스다. 부인이 간호사였고 쌍둥이 아들과 딸을 두고 있는데, 가족이 미국에 있다 보니 미국 법인 등에서 근무했다. 셀트리온은 이렇게 대우차 기획조정실 출신 5명이 ‘맨땅에 헤딩’하듯 만든 회사다. 현재 연수구청 7층 벤처센터에 가면 구청이 당시 셀트리온 입주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현판이 있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있다.
“이곳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바이오기업인 ㈜셀트리온이 1999.11.23부터 2002.11.22까지 입주했던 곳입니다. 2011년 10월 5일 ㈜셀트리온은 송도국제도시 제2 공장을 준공함으로써, 세계적인 생명공학 회사로 성공하기에 이르렀는 바, 이에 연수구민의 긍지와 발전의 염원을 담아, 이곳을 기념합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