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증시가 30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엔화가치, 일본 기업들의 주주환원책 강화 의지, 글로벌 공급망에서 일본 입지의 변화 등은 하반기에도 일본 증시를 주목해야 할 이유라고 글로벌 증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지난 6월 9일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주요 주가지수인 토픽스지수는 2224.32를 기록해 올해 들어 19%라는 높은 수익률을 보였다. 지난 5월 29일 이미 장중 2171을 넘어 1990년 8월 이후 최고점을 경신한 지 불과 열흘여 만이다. 일본 닛케이225지수도 지난달 9일 32265.17을 기록해 올해 들어 25%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주식 투자자들도 이 같은 흐름을 타고 일본 주식투자 금액을 늘리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 1월 국내 투자자들의 일본 주식 순매수 금액은 2870만달러였는데 이 수치는 지난 5월 7025만달러로 급증했다. 지난달 1~9일에도 순매수 금액이 2581만달러를 기록해 상승세를 이어갔다. 일본 주식은 국내나 미국 주식과 달리 한 번 매수할 때 최소 100주 이상을 사들여야 하고, 미국이나 중국 주식 등에 비해 정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제약조건이 있다. 그럼에도 무섭게 증가하고 있는 투자금액은 국내 투자자들의 일본 주식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지난 6월 1~9일 국내 주식투자자들이 가장 많이 매수하고 있는 일본 증시 종목은 20년 이상 만기가 남은 미국 국채에 투자하면서 일본 엔화로 헤지한 상장지수펀드(ETF)다. 일본 증시에 상장된 미국 국채 ETF는 올해 들어 꾸준히 국내 투자자들의 순매수 1~3위 종목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장기적으로 미국 국채금리는 하락할 것으로 기대되는 가운데(가격은 상승) 엔화가치 역시 올라갈 것으로 예상돼 채권가치 상승과 환차익을 동시에 기대한 투자자들의 매수세가 몰렸다는 분석이다.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이 경쟁력을 지니고 있는 전자제품 기업들도 꾸준히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글로벌X재팬반도체 ETF’ ‘글로벌X재팬로보틱스AI ETF’ 등 반도체 기업 기반 ETF도 국내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증시가 올 들어 세계 투자자들의 큰 관심을 끈 것은 낮은 엔화가치, 저렴한 밸류에이션, 제조업 경쟁력 등이 부각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엔화가치는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향후 일본 정부의 금융 정책이 긴축으로 선회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엔화가치는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기준금리가 오르면 일본 국채금리가 올라 매력도가 상승하고 일본 국채를 매수하려는 투자자가 늘면 엔화 수요도 늘어난다. 그로 인해 엔화가치가 오르면 엔화자산을 미리 매수한 투자자들은 환율로 인한 자산가치 상승도 노릴 수 있다. 허진욱 삼성증권 연구원은 “일본은행이 ‘현 장단기 금리 수준 또는 그 이하로 유지될 것으로 예상한다’는 포워드 가이던스를 삭제함으로써 향후 점진적인 통화정책 전환을 예상한다”고 말했다. 최보원 한국투자증권 연구원도 “우에다 가즈오 일본 은행 총재가 금융정책을 정상화하고 미국 기준금리 인상 사이클이 종료되면서 엔·달러 환율이 하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하반기 미국 경기 둔화와 함께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면 안전자산으로서 엔화의 가치도 높게 평가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증시 밸류에이션이 저렴하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CNN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준 일본 증시에서 주가가 자산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식이 전체 50%가 넘는다. S&P500에서 이 비율은 3%에 불과할 정도로 일본 주식이 저평가돼 있는 셈이다. 지난달 초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도 최근 일본 기업 5곳 지분을 매수한 이유에 대해 “우스울 정도로 저렴한 가격이라고 생각했다”며 “추가 투자를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일본 주식은 최근 20여 년간 이처럼 저평가된 상태를 유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일본 금융당국이 주가 부양을 위해 기업 거버넌스 개선에 힘을 싣고 있어 재평가 기회를 맞이할지 주목된다. 특히 지난 4월 야마지 히로미 일본 도쿄증권 거래소 사장은 공개적으로 상장기업들에 “투자자들과 건설적인 대화를 시작하라”고 촉구했는데, 이것이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일본 기업들의 기업 지배구조가 더욱 투명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안겼다고 CNBC는 보도했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자국 내 제조업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부심 중인 가운데 일본은 이미 이러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프랭클린템플턴의 디나 팅 글로벌 인덱스 포트폴리오 관리팀장은 “일본은 원료, 장비, 엔지니어링 인적 기반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다른 국가보다 우위가 있다”고 평가했다. 미·중 갈등의 수혜를 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향 밸류체인에서 떨어져 나온 수요의 증가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이 증가하거나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일본 투자가 늘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 메모리반도체 기업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자사의 첨단반도체 제조 공장을 일본에 짓겠다고 발표한 직후 일주일 새 주가가 11.9% 급등했다.
증권가에서는 향후 엔화가치가 하방보다는 상방을 향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당분간 일본 증시가 호황을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물가 상승률이 당국의 예상치보다 높아 긴축적 통화정책을 펼 가능성이 더 높은 데다 지난 1분기 실질 GDP 증가율도 시장 예상치를 뛰어넘어 선방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편득현 NH WM마스터즈 전문위원은 “현재 미·일 금리 차는 더 벌어지기 힘든 상황”이라면서 “미국 금리 인하를 예상하며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 투자자라면 엔화투자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조언했다.
KB증권은 하반기 증시 전망을 통해 “(일본 주식은) 단기적으로 과열 우려가 형성될 수 있지만, 현재 멀티플은 팬데믹 전보다 낮아 큰 폭의 주가 조정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했다. 이어 “일본 기업의 주주가치 제고 노력 등 미시적인 변화와, 반도체 공급망 내 일본 위상의 상승 같은 거시적인 흐름으로 멀티플 재평가가 예상돼 투자 선호도가 상향됐다”고 설명했다.
엔화가 강세로 가면 일본 대표 수출주의 해외 매출 성장이 둔화될 수 있지만 여러 거시경제적 상황이 지수 하방 압력을 상쇄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최보원 연구원은 “미국, 유럽 등에서 기준금리 인상 사이클이 종료되지 않았고 G2 국가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한 경쟁으로 공급망이 재편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 상업부동산발 경기 둔화 우려와 매크로 불확실성이 달러 강세 장기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며 그와 같이 판단한 배경을 밝혔다. 엔화가치가 장기적으로는 상승하겠으나 속도가 완만하게 오른다면 하반기 닛케이지수의 추가 상승을 기대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증권가에서는 특히 향후 기업이익이 실질적으로 개선되는 일본 증시 섹터에 주목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김성환 KB증권 연구원은 일본 증시 시가총액의 14%를 차지하는 정보기술(IT) 섹터, 20%를 차지하는 경기소비재 섹터, 자본재 섹터 등을 꼽았다. 김 연구원은 “일본 IT 섹터의 이익은 나스닥과 4개월가량 시차를 두고 움직인다”며 “나스닥의 이익 개선이 이어진다면 이는 일본 IT 섹터 이익에 온기를 불어넣을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일본 IT 섹터를 대표하는 기업으로는 비메모리반도체 도쿄일렉트론이 꼽힌다. 비메모리반도체는 메모리반도체에 비해 경기 만감도가 낮다는 장점이 있다.
경기소비재도 이익이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자동차 업종의 이익이 연초부터 개선세로 접어들었고 내구소비재 등이 포함된 가전, 소비자서비스·유통 등 리오프닝 관련주 등으로도 온기가 퍼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소니·닌텐도와 같은 소비재 및 IT 섹터 기업은 엔저에 따른 수출 효과도 두드러질 것으로 예상된다.
자본재와 상사 업종도 이익 증가가 기대되는 섹터다. 김 연구원은 “자본재 업종은 기계와 전기장비산업을 중심으로 악조건을 딛고 강한 매출 전망 상향을 누리고 있다”며 “원자재와 중간재 가격의 하락은 시차를 두고 자본재 업종의 이익률을 회복 시켜줄 공산도 크다”고 덧붙였다.
개별주 투자에 장벽을 느끼는 투자자들은 ETF를 통한 간접 투자도 고려해봄직 하다는 조언이다. 월가에서는 일본 증시에 투자하는 방법으로 ETF를 제시했다. 토요타·소니·키언스 등 일본 중대형 상장사에 고루 투자할 수 있는 ‘아이셰어즈 MSCI 일본(EWJ)’ ‘JP모건 베타 빌더스 일본(BBJP)’ ‘프랭클린 FTSE일본(JLJP)’ 등이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CNBC는 설명했다.
최 연구원은 “6~7월엔 환헤지 ETF인 DXJ, 238720을 선호한다”며 “연말에 갈수록 닛케이지수의 상승 속도 둔화에도 환율 부담이 낮은 EWJ, 241180, 금융정책 정상화 부담이 제한적인 1306/1615는 주목 가능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매일경제 증권부 강인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