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세계 최강으로 군림했던 일본 반도체 산업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일본은 최근까지 반도체 파운드리(TSMC), D램(마이크론), 후공정·패키징(TSMC·삼성전자·인텔)등 반도체 각 분야 최고의 기업을 모두 유치했다.
일본이 반도체 공장 및 연구개발센터 유치에 성과를 내면서 공급망 재편이 현실화되는 양상이다. 이미 미국(삼성, TSMC 등)에 대규모 투자를 한 반도체 기업이 일본(TSMC, 마이크론 등)에도 제조공정을 확 대하면서 한국 대만 미국 일본으로 이어지는 공급망의 얼개가 가시화하는 셈이다.
일본은 2019년 미국 정부의 중국 화웨이 제재로 시작된 미중 무역 갈등을 자국 산업 부흥의 기회로 삼았다. 지정학적 이점과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앞세워 외교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반도체 산업 생태계 부활도 시도한 것이다. ‘알타시아’로 대변되는 탈중국 움직임 속에서 일본 기업들은 지난 수십 년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자체적인 제조업 공급망을 구축 했다. 예를 들어 반도체 제조업체 인피니언도 유사한 전략을 사용한다. 인피니언은 바탐에서 매년 4억 개 이상의 반도체 장치를 조립 및 패키징하고 테스트를 위해 인피니언의 연구개발 센터가 있는 싱가포르로 배송한다.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지정학적 변화는 한국 기업에도 위기이자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당장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 수출규제 등을 통해 첨단산업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나서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과 쑤저우에 낸드플래시 생산 공장과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운영 중이며, SK하이닉스는 우시에 D램 공장을, 충칭에는 후공정 공장을 두고 있다. 다롄에는 인텔로부터 인수한 낸드 공장이 있다. 메모리 반도체 1·2위 기업이 중국에서 만드는 D램·낸드의 양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 중 중국 비중은 지난해 40.3%로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의 40%를, SK하이닉스는 D램의 40%와 낸드의 20%를 중국에서 생산한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장비 도입을 1년간 유예받았지만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미국이 이처럼 우리 정부와 기업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 보이지만 새로운 기준에는 다양한 조건이 붙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한국 기업이 중국에서 첨단 반도체를 생산해도 관련 기술이나 장비가 중국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엄중한 안전장치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개별 기업이 보복의 목표물이 될 수도 있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사견을 전제로 “중국 반도체 성장 속도를 늦추려는 미국의 입장은 이해가 간다”라면서도 “미국의 ‘온쇼어링’과 ‘프렌드쇼어링’ 정책은 개별 기업 입장에선 곤혹스런 측면이 있다”라고 꼬집었다. 온쇼어링은 외국 기업의 생산 기지를 미국으로 옮기도록 유도하는 정책이다. 프렌드쇼어링은 동맹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본격화된 이후 미국 반도체 수입 시장 내 줄어든 중국산 자리를 경쟁국이 빠르게 채워가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미중 통상 갈등 이후 미국 반도체 수입시장을 대상으로 주요국 점유율을 분석한 결과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중국의 점유율이 18.5%포인트 하락했다. 다만 대만과 베트남 점유율은 각각 9.7%포인트, 7.3%포인트 증가해 반도체 생산기지로서 입지를 강화했다. 특히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경쟁사 TSMC를 보유한 대만의 미국 반도체 수입 시장 점유율은 9.5%에서 19.2%까지 늘면서 4위에서 1위로 등극했다. 반면 같은 기간 한국의 점유율은 1.8%포인트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소폭 상승하는데 그쳤다. 2017년과 2018년 메모리 호황의 수혜를 본 한국의 점유율은 2017년 3위로 올라선 이후 지난해 3위를 유지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으로 인한 수혜가 고스란히 대만에게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일부에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보단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국내에서 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경기도 용인을 글로벌 반도체 클러스터로 키우겠다는 구상을 내놓은 것도 이와 연관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 역시 이에 맞춰 300조원의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중장기적으로 탈중국 공급망을 새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고분자공학부 교수는 미국과 중국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펴보고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 했다. 권 교수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디커플링을 예상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대기업을 위한 대책뿐 아니라 대기업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양한 중소기업의 클러스터도 고려해야 한다”라며 “신규 시장인 동남아시아, 인도, 유럽 등 여러 지역으로 팹(제조 공장)을 재배치하는 전략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언급했다. 김기남 삼성전자 SAIT(옛 종합기술원) 회장 역시 지난 2월 한 포럼에서 “(각국이) 자체 공급망을 구축하려면 초기 비용만 1조달러가 넘고, 그 이후에도 수천억달러씩 투자해야 한다”라며 “독자 공급망을 구축하려고 못하는 부분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특별한 도움 없인 쉽지 않아 우방국 중심 신공급망이 구축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의 ‘최근 반도체 장비 교역 동향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반도체 장비 자립 화율은 20% 수준에 불과하고 수입의 70% 이상을 미국·일본·네덜란드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부응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중국 설득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창한 반도 체산업협회 부회장은 “반도체 생산을 위해서는 미국과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데, 중국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우리가 처한 상황과 입장을 중국에 꾸준히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라며 “외교로 문제를 풀어야 하고 한국이 협상력을 갖는 게 최종 해법”이라고 말했다.
반도체뿐만이 아니다. 대중 수출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정체 상태다. 이제는 중간재 시장에서 중국이 오히려 한국 시장에 서의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삼성전자 中 매출 비중 한 자릿수로
삼성전자의 사정도 비슷하다. 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올 1분기 중국 매출이 사상 최저치인 5조5652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체 매출의 8% 수준으로 분기 기준 역대 최저치다. 삼성전자의 중국 본사와 자회사를 포함한 전체 매출은 7조9100억원으로 전년 동기 14조9600 억원 대비 46%나 감소했다. 삼성전자의 중국 매출 비중은 매년 감소하고 있다.
2019년 18%에서 2021년 16%, 2022년 11% 수준에서 올해 8%대로 떨어졌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 가장 부진하다. 특히 삼성의 주력 제품 스마트폰은 점유율 0%대로,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인들은 삼성 갤럭시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중국 시장에서 한국 제품이 점유율을 잃고 있는 데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다. 한류를 금한다는 ‘한한령(限韓令)’에 되도록 중국 제품을 쓰자는 ‘애국 소비’ 열풍도 우리 제품의 시장 확대를 어렵게 만든다.
이에 따라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하고 있는 ‘알타시아’로의 진출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삼성전자의 베트남 휴대전화 공장이 대표적 사례다. 최근에는 ‘인도’로 진출을 확대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2억4000만달러 규모의 투자를 통해 통신장비와 가전제품 부품 제조에 나섰다. 특히 스마트폰 생산을 확대했다.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의 격전지로 떠오른 인도에서 점유율 1위 달성이 목표다. 1분기 성적은 긍정적이다. 시장조사업체 카날리스에 따르면 인도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에 이어 4분기에도 각 21%의 점유율로 1위를 차지했다. 국내 기업 가운데 규모 면에서 인도에 가장 큰 투자를 하는 기업은 삼성디스플레이다. 2020년 7억달러를 투입해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공장을 세웠다. LG전자 역시 6000만달러를 투자해 냉장고와 에어컨 등 가전제품 생산라인을 확대했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전기차 제조 공장 등에 각각 6억8000만달러와 3억달러를 투자해 인도 시장 공략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중국을 대체할 만한 국가는 규모 면에서 인도가 유일하다”라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의 변화를 고려할 때,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국가인 인도의 성장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진단했다.
각자만의 경쟁력을 지닌 다른 아시아 지역 국가들이 중국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고도로 숙련된 기술과 자본을 제공하고 풍부한 노동력과 저임금의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가 제품을 조립하거나 생산 하는 구조다. 알타시아 경제모델은 이미 작동 중이다. 말레이시아와 베트남은 전자 제품, 태국은 자동차 및 포장 식품, 인도네시아는 기계와 석유 화학, 필리핀은 포장 식품과 의류, 싱가포르는 반도체, 바이오 의약품, 항공 우주 부품 등 다양한 생산 시설들이 지역 내 글로벌 클러스터를 구축하고 있다.
김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