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란 늘 있기 마련. 그가 임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결정한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게 아이티 투자였다.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습니다. 김태형 세아상역 대표(퇴사), 하정수 전무(현 세아상역 대표이사 부회장) 등 임원 10여 명이 모인 자리인데 다들 반대했죠. 찬성은 저 혼자였어요. 미국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파트너십으로 투자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우리가 노(No) 한 거지요. 뭐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약 4개월 후 힐러리 장관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시 제안을 하는 겁니다. 우리 회사를 특별히 알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아이티에 의류공장을 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미국에 가장 많이 수출하는 회사를 찾아보니 우리인 거죠. 그래도 임원들이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 아이티의 현실은 기업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해 반대한 겁니다. 그런데 나는 그 아이티의 상황이 눈에 어른거리는 겁니다. 미국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집도 5000채 짓고 도로도 깔아준다고 하고, 미주개발은행(IDB)도 투자를 한다고 하는데, 거기다가 어찌 됐든 세아를 파트너로 선택한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여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떠나 김 회장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 휴머니티였다. 아이티에 대한 그의 애틋한 마음이 드러난 건 10년이 지난 어느 시상식 자리였다. 2022년 4월 김 회장은 회계법인 EY한영이 선정한 올해의 대한민국 기업가상을 받았다. 관례에 따라 갈라 디너를 겸한 시상식에 턱시도를 입고 나와 수상소감을 밝힌다.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기업가로서의 여정을 소개하는 게 보통인데 이날 수상 소감은 짧은 감사 인사 이후 나머지 5분 여를 모두 아이티에 할애했다. “지구상 최빈국인 인구 1000만의 서인도제도 섬나라 아이티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고 싶다”면서 운을 뗐다. 원고가 있었지만 꺼내서 읽지 않았다.
“2010년 1월 12일 진도 7.0의 강진으로 수도 포르토프랭스가 폐허로 변했습니다. 약 30만 명이 사망했으며 100만 명 이상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저는 지진 직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아이티의 참상을 둘러보았습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비탈 고아원을 고아원을 방문했을 때 지진으로 부모를 잃고 어두운 방안에서 기저귀만 차고 앉아 있었던 검은 피부를 가진 2~3살 정도 아기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해맑은 미소를 지금도 저는 잊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아이티는 정상적인 정치와 치안은 자취를 감췄고 대통령은 암살되었으며 처절한 가난만이 국민들을 지배하고 갱단들은 납치와 폭력을 일삼으며 독버섯처럼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티처럼 처절한 가난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인생은 생존경쟁이 아니라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느꼈습니다.”
소감 발표가 진행되면서 왁자지껄했던 장내는 숙연해지기 시작했다. 와인을 즐기며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던 분위기는 갑자기 실종됐다. 잠시 숨을 고른 김 회장은 “아이티에서 자신이 할 일을 찾았다”며 말을 이어갔다. 그건 일종의 소명의식이었을 것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공장을 세워 그들에게 직업을 만들어 주고, 한국과 미국의 의과대학 및 간호대학 교수님들과 함께 매년 의료봉사를 하며 수천 명의 환자들을 무상으로 진료하고, 초·중·고등학교를 만들어 700명의 아이들에게 무상교육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평생 단 한 번도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 다리를 절었던 환자가 간단한 시술만으로 완치되는 등 기적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받은 이 상의 카피본을 만들어 아이티 현지 법인 S&H Global 사무실에 보관하겠다”면서 “현지 임직원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이 상을 보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도록 하겠다”고 인사를 마무리했다.
고등학생 시절 어머니 옆에서 곁눈질로 배운 재봉틀로 직접 바지를 수선하고 옷도 만들어본 호기심 가득한 청년 김웅기. 그러나 어렸을 적 그의 취미이자 특기는 그림 그리기였다. 화가가 되기 위해 미술대학에 원서도 냈다. 그러나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반대로 택한 ‘플랜B’가 의류였다. 자의 반 타의 반 대학에서 섬유공학을 전공하고 본인의 2차 적성을 찾아 의류업계에 사회 첫발을 내디딘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직장 생활. 무조건적 충성을 강요하는 상사들의 고압적 태도에 못 견뎌 5년 만에 사표를 던진다.
서른다섯, 적지 않은 나이.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그는 어떻게든 새 직장을 찾아야 했다. 그에겐 4년 전 태어난 첫 딸 세연이 있었다. 강서구 등촌동 방 한 칸짜리 전세에 살던 그가 삶의 목적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시기가 이때였다. 아이를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어 이사 간 곳이 화곡동, 그래봐야 방 두 개짜리 다가구 주택이었다. 그때 둘째 딸 진아가 태어났다. 그에겐 ‘밥벌이’가 중요했다. 아니 인생의 전부였다.
어느 날 광화문에 있는 바잉오피스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에 회사를 찾아간다. 면접을 통과해 근무조건에 대한 계약을 하고 사무실을 나온 김웅기. 사실 본인이 다니고 싶어 한 직장은 아니었다. 허전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달랠 겸 무작정 길을 걷는다. 광화문에서 충정로로, 충정로에서 아현동으로, 아현동에서 공덕동으로. 3월 초 봄날인데도 세찬 바람에 체감온도는 영하였다.
“그날도 한참 길을 걸으면서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공덕동 로터리 근처 조그만 건물에서 임대 간판이 보였습니다. 그걸 보고 무작정 들어갔고 다음 날 계약을 했습니다.”
1986년 세아상역은 그렇게 출발했다. 본인을 포함해 직원 3명, 열여덟 평 오피스텔에 책상 세 개, 전화기와 팩스만 놓고 단출하게. 네 살배기 맏딸 세연의 첫 자 ‘세’와 둘째 딸 진아의 마지막 자 ‘아’를 붙여 지은 세아. 이 회사가 40년이 지난 지금 세계 1위의 의류 제조 수출기업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 회장에게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말이 무엇이냐?”고.
도전. 예상했던 답이다. 그의 자서전은 도전에서 시작해 도전으로 끝난다.
도입부의 발문(發文)은 이렇다.
“지금 생각하면 내 나이 서른다섯은 청춘이었다. 청춘은 희망의 꿈을 꾼다. 청춘은 도전과 용기다”라고.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은 도전하고 성취하는 인생이다. 운명은 도전하는 사람만이 바꿀 수 있고, 그래서 나는 도전한다.”
그는 직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바람개비 이야기를 한다. 그의 경영철학을 설명하는 자료에, 그리고 그의 자서전에도 나와있다.
“바람개비는 바람이 없는 상황에서는 절망적이다. 하지만 바람개비를 돌리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바람개비를 들고 뛰어서라도 돌리고야 만다. 인간의 의지는 새로운 것을 만들고, 놀라운 결과를 보상으로 돌려받게 해준다.”
지나온 매 순간 도전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승리에 목말라 했다. 1등이 됐을 때는 뒤에서 누가 쫓아와 우리가 뒤처질지 모른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일을 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 김 회장은 그걸 ‘생산적 피해망상증’이라 부른다. 그런 도전정신이 창업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적자가 없는 경영실적을 일궜다. 그에겐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 아니, 성공이란 말은 없다. 성공이 아니라 성장이다.
“저는 기업의 성공이라는 말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업은 매 순간 또 매일 매년 끊임없이 성장해야 되거든요. 성장을 못하면 도태되고 추락합니다. 기업에 도태와 추락은 있어도 성공이라는 개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 회장이 서른다섯의 나이에 시작한 세아, 그리고 이제 40년. 어떨 때는 버텨내면서, 또 어떨 때는 헤쳐 나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사업을 전쟁에 비유한다. “승리는 산 자의 것이고 패배는 죽은 자의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연 지금 나는 살아있는가?”라고.
[손현덕 주필]
-취재도움 : 정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