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감독, A급 배우들, 넉넉한 투자비. 아! 무엇보다 뒤를 받치는 ‘체인점(?)’ 두둑한 배급사까지. 최근 몇 년간 충무로 흥행공식이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최근 충무로에 도는 풍문을 들어보면 여기에 한 가지가 더해졌다. 대박 나는 영화 시나리오를 귀신같이 판별해내는 혜안을 가진 IBK기업은행의 투자유치다.
올해 한국영화는 지난해에 비해 좋지 않은 성과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최근 <연평해전>이 유일하게 누적관객 500만명을 돌파하며 분전하고 있다. 이미 손익분기점(300만명)을 넘어선 이 작품은 블록버스터 대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80억원)를 투입해 상당한 수익을 안겨주고 있다. 기업은행은 연평해전의 제작비 80억원 중 30억원을 투자했다. 은행권 중에서는 최초로 기업은행이 투자주관사로 참여해 다른 투자사들을 적극 소개해주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충분한 담보물이나 안정적인 재무제표 없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 금융투자사들의 습성(?)상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IBK기업은행이 투자·지원한 작품 리스트를 살펴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대한민국 역대 흥행 No.1기록을 갈아치운 <명량>부터 1425만 관객이 관람한 <국제시장>, <관상>(913만명), <군도>(477만명), <신의 한 수>(356만명) 등 제목만 들어도 쟁쟁하다.
성공 뒤에 얻은 보상도 상당하다. <연가시>, <베를린> 등 다수의 작품들도 쏠쏠한 수익률을 안겨줬다. 저금리 여파로 예대마진 감소에 역마진에 시달리고 있는 은행권에 새로운 수익원으로 문화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셈이다.
항간에 기업은행의 문화 콘텐츠 투자에 대해 대형 제작사나 배급사들이 개입하거나 유명배우가 출연해 안정적인 수익을 거둘 만한 영화만 골라 투자하고 있다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IBK기업은행이 투자해 203%라는 최고 수익률을 안겨준 작품은 <수상한 그녀>였다. 독특한 소재와 작품성으로 인정받은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다른 블록버스터에 흥행보증수표라 할 수 있는 A급 배우도 없고 적은 비용으로 제작됐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865만 관객의 선택 덕분에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최근 투자작인 <연평해전>의 경우에도 비교적 무명 측에 속한 제작사가 나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기업은행이 시나리오를 보고 나선 케이스다. 2014년 1700만명을 동원한 <명량>에도 IBK금융그룹상생협력펀드(총 150억원 규모)에 IBK캐피탈과 함께 100억원을 출자한 금액은 5억원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투자금액으로 내놓은 금액도 이전에 비해 상당한 수준이다.
수치적으로 보더라도 2014년 11월 말 기준 기업은행이 영화투자로 얻은 수익률은 8%대임을 고려하면 대중성 외에도 여러 가지 기준을 통해 지원한 작품도 다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매일 시나리오 읽는 12인의 전문가
최정예 영입해 구성한 문화콘텐츠 사업팀
영화나 드라마에 돈을 대는 투자사들은 한편의 흥행여부에 회사가 휘청거릴 경우가 많다. 그만큼 리스크가 상당한 분야이며 예측이 힘든 분야임에 틀림없다. 작품의 흥행 가능성과 리스크를 정확하게 분석해내는 능력이 없다면 실패라는 쓴잔을 들이킬 수밖에 없다. 이처럼 까다로운 영역에서 IBK기업은행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비결은 각계각층에서 영입한 전문가들이다.
IBK기업은행에서 콘텐츠 분야 투자를 이끌고 있는 곳은 문화콘텐츠금융부다. IBK기업은행이 야심차게 신설해 아직까지 업계에서는 유일무이한 조직이다. 연예기획사, 방송 콘텐츠사, 영화 배급사, 영화제 사무국, 한국콘텐츠진흥원 등 다양한 경험을 지닌 전문가들이 뭉쳐 12인의 ‘어벤져스’라 불린다. 이들은 한 달에 6, 7개의 영화 시나리오를 각각의 시점에 맞춰 완독한 이후 회의를 개최한다. 직급이 높다고 목소리가 더 크진 않다. 똑같이 의견을 개진하고 투자가 타당하다고 판단하면 본사 심사부에 심사를 요청한다.
투자작을 결정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제작비, 콘텐츠 차별화 포인트, 영화의 완성도다.
“은행권에 이직해서 계속 시나리오를 보고 있으니 주변에서는 신기하게 보더라고요.(웃음) 12명의 전 부서원이 시나리오 전체를 읽은 후에 토론을 시작합니다. 각자 느낀 점은 물론 흥행가능성과 나름대로 예상관객 수까지 뽑아보죠.”
영화 <올드보이> 배급사 등 충무로 판에서 일하다가 4년 전 합류한 윤성욱 IBK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과장은 경험을 살려 영화분야 투자 일선에 서서 작품을 선별하는 역할을 맡는다. 투자의 시작은 시나리오 검토부터 시작된다. 하루에도 수많은 시나리오를 부서원들이 검토하고 투자 가능성을 진단한다. 구성원 12명이 모두 시나리오를 읽은 뒤 회의를 하고 소위 대박의 ‘촉’이 온다 싶으면 책임자 회의와 상위 기관인 심사부의 승인을 거친다. 심사부는 정부·유관기관·학계 및 업종별 전문가 53명의 자문위원으로 구성돼 문화콘텐츠 자문위원회 운영을 수렴해 객관성을 높인다. 여러 차례의 검증을 거치며 작품을 보는 눈의 정확성을 최고로 높인다.
“시나리오뿐 아니라 감독·캐스팅·투자규모·경쟁작을 고려해 최대한 입체적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합니다. 은행인 만큼 제작과정에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제작사의 재정 상태를 검토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죠. 드라마의 경우 시나리오와 대본이 미리 나오지 않다보니 투자안정성을 중점적으로 보게 됩니다. 또한 광고수익률 판권을 통한 해외 세일즈 등을 통한 매출이 어느 정도나 발생할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기도 합니다.”
윤 과장은 처음 IBK기업은행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을 때 적지 않게 당황했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 제작사들이 은행을 찾아갔다가 투자는 고사하고 대출에도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 제작사의 경우 몇 년간 매출이 하나도 없다가도 한 해는 수백억원의 수익을 거두기도 합니다. 담보가 없는 상황에서 매출도 일정하지 않다고 판단해 (대출이) 결격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이 사실이죠.”
최근 정부는 창조경제의 중점 사업분야로 문화콘텐츠 산업 활성화를 추진하고 있다. 부가가치가 높고 고용창출 효과가 높아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권의 지원은 거의 전무한 상태다. 이유인즉 문화콘텐츠 분야의 기업들은 ‘고위험 산업군’으로 인식돼 일부 전략적 출자자만이 자금을 공급하고 제1금융권의 지원은 기업은행이나 산업은행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신용·담보나 재무제표를 따져 투자나 대출을 결정하는 패러다임에 익숙해져 문화콘텐츠 분야에 대한 투자개념 자체가 정립되지 않은 것이다. 흥행할 만한 영화와 드라마를 제대로 골라낼 만한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산업은행도 펀드를 통한 간접투자에만 나서고 있다.
콘텐츠 투자 전담부서를 만든 곳은 기업은행이 유일하게 직접투자에 나서고 있고, 시중은행들은 오래전부터 투자를 검토한다는 얘기가 들렸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실정이다.
“문화콘텐츠 산업은 최소 3년 이상의 장기 투자가 필요한 데다 리스크와 진입장벽이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저희도 물론 손해 본 작품들도 있어요.(웃음) 특히 정보량이 제한돼 담당자들이 직접 발로 뛰어야 해서 일반 기업투자나 대출에 비해 발품도 더 많이 들죠.”
IBK기업은행은 최근 영화투자뿐 아니라 마케팅 분야에서도 탁월한 전략을 펼쳐 눈길을 끌었다. <연평해전> 개봉과 함께 우대금리를 제공하는 통장을 출시하며 홍보몰이에 나선 것이다. 지난 6월 22일 판매 시작한 ‘연평해전 특판예금’은 일주일 만인 29일 다 소진됐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영화의 흥행에 따라 우대금리가 지급되는 연평해전 특판예금을 두고 고객들의 만족도도 높다”며 “은행의 문화 투자에 대한 고객들의 관심까지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드라마·게임·캐릭터 등 전방위 투자
2016년까지 7500억원 쏟아부을 것
“제조업은 기계화, 자동화, 해외 이전 등으로 고용이 정체돼 있고 저성장·저금리 시대에 문화콘텐츠 투자가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문화콘텐츠 투자분야를 넓히고 금융지원 규모도 확대할 계획입니다.”
기업은행 측은 현재 금융권에서 문화콘텐츠 산업 육성 노력이 부족하지만 향후 은행들의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선도적으로 문화콘텐츠 분야 투자에 나선 IBK기업은행은 업계에도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기업은행의 문화콘텐츠 투자는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와 공연 캐릭터 등 전방위적으로 뻗치고 있다. 드라마 <화정>, <복면검사>를 비롯해 지난해 열풍을 불러온 <왔다 장보리>, <별에서 온 그대> 등 성공을 거둔 작품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 분야가 부각됐지만 IBK기업은행이 손을 뻗은 분야는 다양하다. 게임, 애니메이션, 공연, 디지털콘텐츠 등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기업에 투자와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일찍이 권선주 IBK기업은행장은 “장기적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문화콘텐츠 기업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다각화된 금융 지원 및 산업특성에 맞는 서비스 제공을 통해 문화콘텐츠 산업 생태계 조성에 일조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힌 바 있다.
IBK기업은행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문화콘텐츠 산업을 우리나라 핵심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민간투자 활성화와 제1금융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며 “제조업은 기계화, 자동화, 해외 이전 등으로 현저한 고용 정체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문화콘텐츠 산업 육성이 자원은 부족하지만 창의적인 인적자원이 풍부한 우리나라에 최적 산업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기치 아래 2013년 말 기준 IBK기업은행은 대출과 투자를 합해 총 5400억원을 투입했다. 2016년까지 매년 2500억원씩 총 7500억원을 문화콘텐츠 산업에 공급해 금융지원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직접적인 자금 투입 외에 문화콘텐츠 산업에 특화된 대출상품 개발이나 IP저작재산권 펀드 등 맞춤형 상품개발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금융지원을 추진 중이다. 문화콘텐츠 강소기업 육성을 위한 장기적인 플랜도 세웠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협약을 통해 문화콘텐츠 거점 지점(총 58개 영업점)에 콘텐츠 전담 실무자를 배치하고 현장밀착형 기업 지원을 위해 회계사, 경영 컨설턴트 등 전문가를 활용한 맞춤형 컨설팅도 제공하고 있다.
IBK기업은행의 한 관계자는 “문화콘텐츠 산업 종사자의 금융 이해증진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며 “단기 수익이라는 목적보다는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우수 문화콘텐츠를 가진 중소기업을 적극 발굴·육성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