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할리우드 스타들의 방한 러시다. ‘빵 아저씨’ 브래드 피트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월드워Z> 한국 프리미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이번에는 휴 잭맨이 <더 울버린>을 위해 2000여명 남짓한 관객들 앞에서 깡충깡충 말춤을 췄다. 올 들어 유독 많은 수의 유명 스타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국을 찾고 있다. 감독과 프로듀서, 비(非) 할리우드 배우들까지 여기에 포함시키면 해외 영화인들의 리스트는 훨씬 더 길어진다.
지난 1월 <잭 리처>의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을 무려 여섯 번째 방문한 톰 크루즈를 시작으로 홍콩을 대표하는 액션 스타 성룡(<차이니스 조디악 12>)과 아널드 슈워제네거(<라스트 스탠드>), 할리우드의 차세대 유망주로 꼽히는 미아 바시코브스카(<스토커>)와 <지.아이.조 2>의 드웨인 존슨과 D.J. 코트로나에 이어 할리우드 최고의 셀러브리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을 처음 찾았다. 특히 <아이언 맨> 시리즈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한국에서 월드 투어를 시작하고 싶다고 영화의 제작사인 마블 엔터테인먼트에 요구해 방한했고, 윌 스미스는 아들인 제이든 스미스를 대동하고 한국으로 와 <애프터 어스>의 홍보에 열을 올렸다.
연중 최성수기에 해당되는 7~8월 한국 극장가에서도 해외 스타들의 방한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한국과 중국 합작영화 <미스터 고>, 봉준호 감독의 4000만달러짜리 글로벌 프로젝트 <설국열차> 그리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서교와 오다기리 죠, 크리스 에반스, 틸다 스윈튼, 가진동 등 동양과 서양의 굵직한 스타들이 한국 관객들과 직접 만난다.
김용화 감독(<국가대표> <미녀는 괴로워>)이 연출한 <미스터 고>의 서교와 오다기리 죠는 개봉 전 다채로운 영화 프로모션 행사에서 한국 관객들과의 만남을 가졌으며, 8월 1일 개봉을 앞둔 <설국열차>의 두 주연 배우 크리스 에반스와 틸다 스윈튼도 방한이 확정됐다. 또 대만의 떠오르는 스타 가진동도 지난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 이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신작 <늑대가 양을 만났을 때>를 들고 또 다시 한국을 찾는다.
아시아의 맹주로 떠오른 한국
해외 영화인들이 한국을 찾는 경우는 대개는 그들의 신작 프로모션을 위해서다.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홍보를 위해 이들은 전 세계 주요 거점 도시를 돌며 ‘얼굴 마담’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 스타들이 한국을 직접 방문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한국 바로 옆에 규모가 훨씬 큰 영화 시장인 일본 열도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귀하신 몸’인 할리우드 스타들의 빽빽한 스케줄을 고려할 때 굳이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두 번 프로모션을 펼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뻔질나게 일본을 드나든 <해리 포터> 시리즈의 주인공 3인방이나 <섹스 앤 더 시티>의 블링블링한 4명의 뉴요커를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적인 안착으로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 영화의 맹주로 떠올랐다. 또 박찬욱, 홍상수, 봉준호, 김기덕 등 한국 감독들이 칸과 베니스, 베를린 등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으며 한국 영화의 위상이 부쩍 향상됐다. 2007년 서울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아시아 최초 정킷 프레스(Junket Press)를 열었던 <트랜스포머>는 할리우드의 눈을 한국으로 돌리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숫자가 모든 것을 설명했다.
극장 개봉 수익만 놓고 본다면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 지역을 제외하고 한국이 <트랜스포머>를 가장 많이 본 나라가 됐다. 이를 계기로 할리우드 스타들의 방한이 조금씩 많아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후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개봉되는 영화도 많아졌다.
물론 해외 스타들의 방한이 100% 영화 흥행으로 이어지는 보증수표는 아니다. 대표적인 친한파 배우 톰 크루즈는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의 엄청난 성공을 목격했지만, <작전명 발키리>나 <잭 리처> 등 기대 이하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들도 제법 있다. 윌 스미스의 <애프터 어스>는 미국에서도 흥행에 참패하더니 한국에서도 전국 관객 100만명을 넘기지 못하는 ‘대망(大亡)’ 영화가 됐다. 또 방한 태도 문제를 지적당했던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2008년 작 <스트리트 킹>도 흥행에 참패했으며, 카메론 디아즈가 내한했던 <슈렉 3>와 키퍼 서덜랜드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몬스터 vs 에이리언>은 ‘잔잔’한 흥행에 그쳤다.
이용철 영화평론가는 “과거와 비교하면 할리우드와의 작업이 수월해졌다. 한국 감독과 배우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해 좋은 성과를 올리고 한국 시장이 커지면서 세계적으로 중요한 영화 마케팅의 중심으로 떠올랐다”면서 “해외 스타들의 방한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희소성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할리우드 스타의 내한 여부와는 상관없이 재미와 완성도를 담보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터지면 세계에서 터진다
최근 한국영화 시장의 질적, 양적 확장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2012년 한국 영화 시장은 전체 관객수가 1억9489만2244명. 1억5972만명이던 전년도와 비교하면 21.9% 늘어났으며, 극장 매출은 1조4551억원으로 17.7% 성장했다.
또 올해 3월까지 분기별 역대 최고치인 5500만명의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실제 한국에서 개봉돼 흥행에 성공한 외국 영화들을 살펴보면 한국에서의 수익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지난해 말 개봉돼 590만명의 전국 관객을 동원한 휴 잭맨, 앤 해서웨이 주연의 <레미제라블>은 국가별 수익을 살펴봤을 때 한국이 미국과 영국, 일본 다음으로 4위를 차지했다. 또 <트랜스포머> 1편에 이어 2편인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과 <트랜스포머 3>도 각각 네 번째, 세 번째로 수익이 많았다. 이처럼 한국은 아시아에서 중국, 일본에 버금가는 영화시장으로 성장했다.
중국의 전체 인구가 13억명, 일본이 1억명 이상임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영화 시장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근 2~3년간 한국 영화의 강세로 외국 영화가 흥행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막상 흥행작이 터지기만 하면 기대를 뛰어넘는 높은 스코어를 기록하는 것도 할리우드가 한국을 유독 주목하는 이유가 됐다.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인 20세기 폭스가 올 초 개봉한 한국 영화 <런닝맨>에 투자를 시도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할리우드에서 <박쥐>와 <황해> 등 한국 영화에 일부 투자한 적은 있지만,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고 제작과 배급까지 100% 총괄한 것은 <런닝맨>이 최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한국의 영화 시장이 매력적인 것”이라며 “일본과 인도 등 기존 강국들의 영화 시장은 불황이지만 한국의 영화 산업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티켓 가격이 낮고 인구가 작지만 의미 있는 수익이 발생하는 한국을 할리우드가 그냥 놔둘 리 없다”고 분석했다.
인구 5000만명의 한국이 인구 13억명의 중국 시장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이채롭다. 물론 이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중국보다는 한국을 더 많이 찾고 있다는 관점에서의 이야기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개봉 영화 한 편의 입장료가 한국 물가로 뮤지컬 한 편 보는 고가인 탓에 중국인들은 개봉관에서 영화를 그리 자주 보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익히 잘 알려진 것처럼 중국이 영화 불법 다운로드의 천국이라는 점이다. 모두가 중국을 황금알을 낳는 시장으로 여기고 있지만 아직은 성공적인 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그들은 중국 시장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 간다.
한국 개봉 결과 일본 프로모션에 활용
앞으로도 할리우드 스타들의 내한은 계속 이어질까? 이젠 한국이 일본 시장을 뛰어넘는 것이 급선무다. 한국영화 시장이 과거에 비해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할리우드 제작, 배급사들은 한국에서의 영화 흥행 추이와 지표를 참고해 일본 개봉 시 프로모션에 활용한다. 여전히 한국 시장보다는 일본 시장이 그들에게 더 중요하며, 그 결과 한국보다는 일본에서 더 많은 영화 프로모션이 진행되고 있다. 사실 일본도 할리우드 스타의 방문이 직접적인 흥행 수익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이 아시아 최고의 영화 시장이라는 상징성이 중요하다. 또한 그들에게 엄청난 개런티가 보장되며 광고 등 스타 개인에게 돌아가는 부가적인 수입이 만만치 않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을 넘어서면 이 모든 상황은 자연스럽게 뒤바뀔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인 한국을 전쟁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엄청나게 위험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는 그들의 선입견도 문제다. 조금 더 체계적이고 구체화된 국가의 이미지 메이킹이 절실하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열혈 영화 네티즌들에게 임무가 남았다. 마약처럼 달콤하고 손쉬운 영화 불법 다운로드에서 과감하게 손을 뺄 것을 ‘강권’한다. 계속 이런 식이 이어진다면 그들에게 한국은 중국 시장의 또 다른 버전으로 격하되며 ‘없는 시장’으로 여겨질 가능성도 다분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