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의 사전적인 뜻은 ‘다 쓰고 난 나머지’. 인터넷 누리꾼 등을 중심으로 경쟁에서 낙오해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존재이거나, 쓸모없는 일을 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자조적인 뜻으로 쓰이는 ‘인터넷 은어’다. (2012년 2월9일 한겨레신문 기사 중)
작년 하반기에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땅 관련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다.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 독일 영화를 패러디하여 내곡동 사건을 비꼰 동영상이 나와 화제가 되었다. 원래 영화의 대사를 사건에 관련된 내용으로 바꾸어 자막에 올렸는데, 길이와 입모양까지 맞춘 것과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그럴 듯했다.
원래 그 영상은 지난 2010년 말 롯데마트에서 ‘통큰치킨’을 내놓았을 때, 그것을 패러디하며 처음 등장했다. 가끔 강의할 때 그 통큰치킨의 패러디 영상을 보여주곤 하는데, 지금도 보여줄 때마다 청중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 히틀러가 전황이 왜 엉망이 되었냐고 그의 장군들을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질책하는 장면을 통큰치킨을 먹지 못하여 흥분한 것으로 바꾸었다. 통큰치킨에서 쓴 원판은 그대로 두고 대사 자막만을 바꾼 내곡동 동영상을 보면서 감탄을 하는데, 한 친구가 말했다. “잉여력이 작렬하는구먼!”
그때 처음으로 ‘잉여력’이란 말을 들었다. 그러고 나서 ‘잉여’란 말이 인터넷 세상에선 널리 쓰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의 ‘잉여’는 다르다
‘잉여’라는 말이야 오래전부터 있었다. 사실 ‘잉여’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필자에게 처음으로 떠오른 연상은 전후 195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중의 하나로 꼽히는 손창섭 선생의 소설 <잉여인간>이었다. 문학평론가이자 수필가로, 또 청록파 시인 3인 중의 한 분인 박목월 시인의 아들로도 널리 알려진 박동규 선생님께 소설 관련 과목을 학창시절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께서 척박하고 앞이 보이지 않던 한국전쟁 후 1950년대의 모습을 손창섭 선생의 그 소설을 사례로 들어서 실감나게 설명해주셨던 시간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잉여인간>이 영화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소설 <잉여인간>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줄곧 이범선 선생의 원작에 유현목 선생이 감독한 영화 <오발탄>의 장면들이 생각났다. 바로 그 분위기였을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출구는 보이지 않고, 주변의 모든 것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고, 거리는 황량하기 그지없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실제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다.
지금의 잉여는 손창섭 선생이 그린, 한국전쟁으로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회 전체가 피폐해진 50년대의 잉여와 다르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그래서 아무것도 만들어내는 것 없이 환경적으로 강요된 ‘무위(無爲)’의 상태가 바로 과거의 잉여였다. 이에 비해 지금은 히틀러 영화를 패러디한 동영상에서 보듯 꼭 시간이 남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의무감 없이도 뭔가를 만들어낸다. 즉 ‘무위’의 상태로 지내기를 거부하고, 뭔가를 이루고 싶은 그런 욕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잉여력이다.
남는 시간에 심각하게 한 것이 아니기에 사실 비난하거나 혹평할 이유도 없다. 그런 비평을 하는 당사자가 유치해지고 모자라게 보일 뿐이다. 대부분 잊히지만 히틀러 패러디처럼 격찬을 받는 작품들은 순식간에 인터넷을 풍미하면서 아류들이 나오거나, 원본 패러디를 다시 패러디한 잉여의 잉여 산물들이 줄을 잇게 된다. 어찌 보면 집단창작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창의와 실행력이 잉여에 보태지면
창의성 측면에서 현재의 ‘잉여’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규제되지 않고 할 수도 없는 자발적인 창작공간이자 창작물들이 잉여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한껏 뻗어나갈 수 있겠다. 그런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 바로 디지털이다. 디지털기기를 가지고 창의력이 번뜩이는 잉여의 산물들을 만들고, 디지털 공간을 활용하여 공유를 한다. 현재 잉여력의 산물들이 전시되고, 서로 은근히 경쟁하는 가장 큰 전시장은 바로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이다. 그래서 모 교수는 미래의 키워드 중 하나로 ‘디지털 잉여’를 꼽았다.
잉여가 차고 넘쳤던 한 젊은이는 <월간잉여>라는 1인 잡지를 ‘잉여력’을 발휘하여 창간했다. 안타까운 심정도 들지만, 더 크게는 희망적이라고 본다.
1990년대 말 인터넷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던 시기에, 한 미국 친구가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면서 자신의 장인 얘기를 했다. 그 장인은 젊을 때부터 은행에서 꾸준히 일한 전형적인 은행원이었다. 옛날 기차 모형을 수집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1800년대 미국에서 달리던 기차의 모형을 모았는데, 어느 하나가 빠져서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장인이 고민하는 것을 보고, 사위인 필자의 친구가 당시 미국의 네티즌들에게 가장 큰 활동무대를 제공했던 ‘아메리카온라인(aol)’ 게시판에 글을 올려보란 얘기를 했다.
aol의 게시판에 다른 것들은 다 있는데, 특정 모형이 없으니 그 모형을 가진 사람은 연락하기 바란다는 글을 올린 직후부터 연락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하고자 하는 모형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그 장인이 가지고 있는 모형들 중 일부를 지목하며 팔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장인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결국 그 장인은 평생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기차 모형을 주 품목으로 하는 온라인 골동 품상점을 열었다. 미국 친구의 장인의 온라인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이후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의 경우는 잉여의 행동이 실제 사업으로 전환된 경우이다. 그런데 잉여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렇게 행동으로 연결되는, 곧 실행력이 작용하는 부분은 극히 미미하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가수, 영원한 ‘저항의 여신’인 조앤 바에즈(Joan Baez)가 1985년 아프리카 기아(饑餓) 지원 콘서트로 1960년대의 ‘우드스탁(Woodstock)’과 비견되기도 했던 ’라이브에이드(Live Aid)’ 공연에 나온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을 필자의 블로그에 아래와 같이 썼었다. 조앤 바에즈는 그 무대에서 대체로 그보다 20년 이상 젊은 청중에게 외친다. “이것은 너희들의 우드스탁이야! 너무 오래 연기(延期)되어 버린~” 그 중계를 실시간으로 군대 숙소에서 고참과 함께 보았는데, 역시 당차구나 하는 것 이외에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조앤 바에즈가 미국 CBS의 간판 보도 프로그램인 ‘60 Minutes’에 나와서 라이브에이드 무대를 회상하며 하는 말을 들었다.
“맞아요. 그들의 우드스탁이었죠. 근데 다른 점은 거기에 생명을 걸 필요가 없고, 그런 사람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라이브에이드 무대에 서서 ‘너희들의 우드스탁이야’라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비아냥 섞인 미소가 입술에 슬며시 어리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라이브에이드 콘서트에 온 친구들은 즐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즐기면서 아프리카 난민들을 위한 자선활동에까지 참여했다는 뿌듯한 느낌을 가지고 열광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당시 라이브에이드를 기획하고 주관한 밥 겔도프가 노벨상도 타고, 귀족 칭호까지 얻었지만 과연 얼마만큼 아프리카 난민들에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절대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즐겁게 행동하며 곤경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는 취지는 좋은데, 그것이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절실함을 가지고 행했어야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조앤 바에즈의 ‘생명을 걸 필요가 없고, 그런 사람도 없다’는 말이 귀에 걸렸다. 콘서트에 참가한 젊은이들은 즐기는 자체로 사회에 저항하고, 다른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과 기꺼이 돕고자 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확인하고 뿌듯해한다. 많은 수의 그들이 모여서 사회에 일정부분 영향력을 행사하나 그 목적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규직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요즘 대다수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은 <88만원 세대>란 책의 표지 광고문안을 보면, 젊은이들에게 토플책을 집어 던지고, 짱돌을 들고 거리로 나서라고 했다. ‘토플책과 짱돌’ 그 사이에 촛불이 있었다. 가끔 2003년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이후 도심에서 벌어진 집회와 2008년의 광우병 파동 때의 보다 대규모로 이루어진 시위를 비교해보곤 한다. 가장 큰 차이는 표정이었다. 2003년 당시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굳고 단호하고 긴장이 넘쳐난다.
물론 그때도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대표되는 이전의 집회와 비교하여 집회문화가 달라졌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문화제와 같은 형식을 갖추었고, 지휘부가 모호했다. 그런 형식들이 근래에는 새로운 전파매체와 어우러지며 나꼼수 콘서트로 대표되는, 딱히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집회 혹은 참여 퍼포먼스의 백화쟁명 시기를 열었다. 공연 포스터를 만든다든지, 자원봉사자가 된다든지 하며 예전의 수동적인 관객 범위를 넘어서 실제로 참여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거기까지’, 즉 그런 새로운 형태의 공연장을 넘어서 실제 세상을 바꾸는 실행력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왼쪽부터 탈북자 북송반대 시위, 도심시위
잉여에 대해 여유 있게 대처하라
기업에 대해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기업의 특정한 행위를 꼬집고 패러디한 작품을 만들고, 그것들을 SNS를 포함한 온라인에 올려서 유포시킨다. 당하는 기업의 처지에서 보면 ‘왜 저런 데에 저렇게까지 힘을 쏟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힘이 바로 잉여력이다. 잉여력은 특히 기업과 같이 지금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일 때 더욱 작렬하기 마련이다. 그래야 더욱 폭넓고 열렬한 환호를 얻을 수 있다.
‘아주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재미있어서 계속 찌르는 것 아냐?’ 기업에서 언론 관련 업무를 맡던 어느 선배가 잘하던 말 중의 하나였다. 잉여의 산물과 그 확산에 대해서 꼬박꼬박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잉여는 잉여로써 흘러가게 해야 한다. 단, 소비자들이 나를 대상으로 잉여력을 발휘하게 만든 단초가 무엇인지는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 근본 원인에 대해 강력한 실행력을 발휘하면, 잉여는 그 자체로 오히려 기업을 더욱 친근한 대상으로 만들어주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앞서 예로 든 통큰치킨에 대한 히틀러 패러디를 보여주고 나면 이런 얘기를 덧붙였다. “통큰치킨은 바로 사라졌지만, 이런 잉여력의 산물인 패러디들이 ‘통큰’이란 브랜드를 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