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내 고향 강릉에 ‘어머니의 길’이라는, 이름부터 매우 의미 있는 걷는 길 하나가 만들어졌다. 우리말로 하면 어머니의 길이고, 영어로 하면 ‘The Mother’s Road’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인물을 꼽든 어머니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어디 있는가. 어머니들이야말로 자기 자식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고 친구이며 위로자이고 동반자이다. 살아계실 때에도 그렇고 돌아가신 다음에도 자식의 마음 안에서 떠나지 않고 고이 간직되어 자식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지켜보며 동반한다.
이렇게 모든 어머니가 다 귀하고 훌륭하지만 그래도 나라마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어머니가 있다. 우리나라에 역사적으로 겨레의 어머니라고 불릴 만한 인물로는 어떤 사람이 있을까. 많고 많으신 어머니 가운데, 어릴 때부터의 교육 때문이든 다른 연유이든 누구나 오래 생각하지 않고도 바로 떠오르는 인물 중에 신사임당이 계시다.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년) 강릉 북평촌 오죽헌에서 태어나 열아홉 살 때 자신이 자란 집 마당에서 혼례를 올렸다. 그 집은 특이하게 어머니가 태어난 집에서 자식도 태어났다. 사임당 자신이 태어난 곳도 오죽헌이고, 혼례를 올린 곳도 오죽헌이며, 아들 율곡 선생을 낳은 곳도 오죽헌이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신혼부부들이 오죽헌에 와서 자신들도 사임당과 율곡선생과 같은 2세를 낳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경내를 둘러본다. 오죽헌에서 태어난 사임당은 서른여덟 살까지 그곳에서 여섯 명의 아들딸을 낳을 때까지(일곱째인 막내만 서울에서 낳았다) 오죽헌에서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율곡의 나이 여섯 살이었다. 서울에 계신 시어머니가 사임당을 불렀다. 이제 당신은 연로하니 서울에 와서 며느리에게 시댁의 살림을 맡으라고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오죽헌에도 연로하신 친정어머니가 계시지만, 서울 집의 살림을 맡으라는 시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나는 사임당도 많은 준비를 하고, 떠나보내는 친정어머니도 여러 준비를 했을 것이다. 옛날에는 오죽헌에서 서울로 갈 때는 지금처럼 자동차 길이 있는 강릉시내 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오죽헌 앞으로 흐르는 냇물을 따라 핸다리라는 마을과 아직도 450년의 유교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위촌리 마을을 거쳐 대관령을 넘었다. 어머니와 딸은 오죽헌 대문 앞에서 마지막 이별을 나누었을 것이다. 눈물을 뿌린 다음 집 앞 냇물을 따라 핸다리 마을로 걸음을 떼었을 것이다. 그 길은 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오죽헌에서 나와 서울로 갈 때 처음 걸음을 뗀 길이고, 4년 후 율곡의 나이 열 살이 되었을 때 아들과 함께 강릉 친정나들이를 할 때 다시 걸었던 길이다.
‘핸다리’라는 마을 이름이 재미있다. 어느 마을이나 냇물이 있으면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런데 마을에 놓은 다리의 색깔이 먼 데서 보았을 때 하얗게 빛난다고 해서 그 마을의 다리를 ‘백교’ 혹은 ‘흰다리’라고 불렀다. 마을의 상징과도 같은 이 ‘흰다리’가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며 핸다리로 변하여 지금도 이곳 마을을 한자로는 백교(白橋) 우리말로는 핸다리라고 부른다.
핸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을 따라 사임당과 율곡은 위촌리를 지나 대관령으로 나아간다. 핸다리에서 물을 따라 곧장 서쪽으로 가면 위촌리가 나오고, 북쪽으로 가면 도로표지판에도 ‘즈므’라고 적혀 있어서 혹시 ‘주무’라는 글자에서 아래 획이 떨어져 ‘즈므’가 된 게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마을이 나온다. 이곳 ‘즈므’ 마을도 사임당과 사임당 어머니에게는 깊은 사연이 있는 곳이다. 사임당이 결혼하기 바로 한 해 전, 열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오죽헌에서 함께 살고 있는 아내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을 받고 서울에서 강릉으로 오던 사임당의 아버지가 걸음을 재촉하다가 길 위에서 큰 병을 얻었다. 거의 죽을 목숨이 다 되어 대관령을 넘어온 아버지를 사임당의 어머니가 대관령 아래까지 마중을 나가 북평촌에 있는 오죽헌으로 모셔오지 않고 즈므로 모셨다.
즈므에는 오죽헌을 처음 지은 할아버지의 산소와 산소를 보살피는 재실이 있었다. 사임당의 어머니는 남편을 재실에 모신 다음 자신의 외할아버지 산소에 올라가 손가락을 잘라 하늘에 바치는 단지(斷指) 기도를 올리며 천지신명과 외할아버지 혼령께 남편의 목숨을 빌었다. 사임당의 어머니가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기도를 올린 다음날, 사임당의 아버지는 씻은 듯이 병이 나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그래야만 사람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고, 또 그래서 나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 일로 나라에서 오죽헌 앞에 사임당의 어머니 용인이씨의 열녀정각을 세워주었다. 이때가 사임당도 어머니와 함께 오죽헌에 살던 스물다섯 살 때의 일인데, 지금 오죽헌에는 이 열녀정각이 남아 있지 않다. 서울 시댁으로 가며 오죽헌을 나와 핸다리 마을 갈림길까지 걸어오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이 사임당 머릿속을 오갔을 것이다. 위촌리와 즈므 갈림길 앞에서도 더욱 많은 생각이 밀려들었을 것이다. 위촌리를 지나고 금산을 지나 대관령을 넘을 때는 저 멀리 북평촌에 두고 온 어머니 생각에 저절로 마음이 복받쳤다.
이제 저 고개를 마저 넘어가면 다시 돌아보기 어려운 고향이다. 우리 마음에 고향이 어디던가. 그곳은 바로 어머니가 계신 곳이 아니던가.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그때는 마음속의 고향마저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자 왠지 왈칵 서럽고도 슬픈 생각이 밀려들었다. 거기에 흰 구름까지 몇 점 대관령 굽잇길에 흰 띠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사임당은 산 아래 저 멀리 북평촌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시 한 수를 지었다.
늙으신 어머니를 강릉에 두고
홀로 외로이 서울을 향하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정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더라도 어머니 살아계실 때 돌아가 뵐 수 있을까? 그 많은 생각이 담긴 오죽헌에서부터 핸다리 마을까지, 그리고 사임당의 어머니가 단지한 즈므 마을까지의 길이 바로 어머니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