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우의 명품 와인 이야기] 가짜 와인 물리친 마르키스 당제르빌의 리더십, 최고로 인정받은 부르고뉴 와인 ‘마르키스 당제르빌 클로 데 뒥’
입력 : 2020.08.03 14:16:12
세상에는 수많은 가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감별하기 어려운 가짜는 바로 와인일 것이다. 가짜 와인이란, 병과 레이블에 표시된 와인보다 저급한 원액이 담겨 있는 와인을 뜻한다. 가짜 예술품이나 가짜 명품 가방은 판매되기 전에 전문가, 심지어 눈이 좋은 소비자에 의해 발견될 수 있다. 하지만 와인을 감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와인을 오픈하고 소비해야만 한다. 즉 와인의 진품 여부가 확인되자마자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더 이상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는 희귀하고 오래된 와인의 경우, 이 와인이 진품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줄 전문가도 찾기 힘들다.
이런 비용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진품을 확인하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다. 미국의 사업가 윌리엄 코크(William Koch)는 그가 구매한 토머스 제퍼슨의 서명이 들어간 1787년산 ‘샤토 라피트(Chateau Lafite)’ 와인을 보스턴 미술관의 전시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마침 보스턴 미술관에는 전시 전에 반드시 진품감정을 거쳐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는데, 윌리엄 코크를 위해 일하던 담당직원은 도저히 이 와인의 진위를 믿을 수 없었다. 유명한 경매사인 마이클 브로드벤트가 이 와인이 진품이라 확인해 주었지만 해당 직원은 토머스 제퍼슨 재단과 함께 와인의 출처를 추적한 끝에, 이 와인이 진품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을 인지하게 되었다. 진품임을 주장하는 판매자와의 갈등,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으로 윌리엄 코크는 와인을 오픈하여 진품감정을 받기로 결심하였고, 감정을 통해 병과 원액 모두 1787년보다 훨씬 이후의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꼽히는 ‘로마네 콩티(Romanee Conti)’는 같은 양조장에서 인근의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로 만드는 ‘라타슈(La Tache)’라는 와인보다 2배 이상 비싸다. 심지어 로마네 콩티 포도밭 바로 옆에 위치한 리슈부르(Richebourg) 포도밭에서 생산되는 일부 와인과는 100배 가까이 가격 차이가 나기도 한다. 대부분의 최고급 와인들은 수요는 많고 생산량은 적으며, 이웃의 비슷한 와인들과 비교해 보통 사람들의 입맛으로는 감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짜 와인의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사실 가짜 와인의 역사는 고급 와인의 역사만큼이나 아주 길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나 로마네 콩티보다 훨씬 이전에 유럽 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렸던 와인은 바로 낭트(Nantes) 인근에서 생산되는 ‘뮈스카데(Muscadet)’라는 와인이다. 낭트는 대서양을 끼고 있는 프랑스의 항구도시로, 와인뿐만 아니라 오늘날 게랑드 소금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낭트의 뮈스카데 와인은 같은 이름의 뮈스카데 포도로 만들며 생산지가 위치한 지리적인 이점으로 인해 수백 년 전 당시 유럽의 중요한 교역품으로 인기를 누렸다. 뮈스카데 와인의 수요가 늘어나고 이에 생산량이 따라가지 못하자 몇몇 양조업자들은 다른 곳에서 재배한 싼 포도를 가져와 뮈스카데에 섞어서 팔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가짜 와인들은 뮈스카데 시장을 파괴하여 뮈스카데는 리더의 자리를 경쟁자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낭트의 뮈스카데는 프랑스의 할인점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에 팔린다. 그리고 저렴한 가격의 이미지 때문에 좋은 품질의 뮈스카데도 좋은 가격을 받기가 힘들다.
가짜 와인을 방지하고 나아가 지역 와인 전체의 품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은 아펠라시옹(Appellation) 시스템, 즉 원산지 명칭 통제로 제도화되었다. 아펠라시옹 시스템은 보르도 혹은 토스카나 등 와인 생산 지역의 이름을 와인이름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지켜야할 것들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원산지 명칭 제도는 프랑스의 AOC지만, 이보다 훨씬 전인 1756년 포르투갈의 퐁발 후작에 의해 처음 태어났다. 1693년 영국의 윌리엄 3세가 프랑스 와인에 높은 세금을 부여하면서, 영국의 유통업자들은 포르투갈에서 생산된 와인의 수입을 크게 늘렸다. 이 와인들은 포트(Port)와인이라고 하는데, 발효 중에 알코올을 첨가하여 의도적으로 발효를 멈추고 당도와 알코올 도수를 늘린 와인을 의미한다. 런던 사교가에서도 포트와인이 인기를 끌게 되자 포도가 아닌 다른 과일이나 싸구려 알코올을 섞은 가짜 포트와인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와인들은 시장에서 포트와인 전체의 신뢰를 낮춰 1728년부터 1756년 사이 포트와인의 판매는 절반 가까이 떨어지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총리였던 퐁발(Pombal) 후작은 가짜 와인을 통제하기 위한 원산지 명칭 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는데, 덕분에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게 된 포트와인의 수출은 1799년까지 다시 10배 가까이 증가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원산지 명칭 제도는 프랑스의 전쟁 영웅이자 ‘샤토뇌프 뒤 파프(Chateauneu du Pape)’의 생산자였던 피에르-르루와(Pierre Le Roy) 남작 그리고 프랑스의 농무부 장관이었던 조셉 카퓌(Joseph Capus)가 주도하여 설립한 INAO에 의해 만들어졌다. 피에르 르루와 남작은 부르고뉴의 유명한 양조가인 르루와와는 다른 인물이다. 프랑스의 와인업계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원산지 명칭 제도를 필요로 했으나 오랫동안 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원산지 명칭 제도에 따라 어떤 포도원들은 그동안 써오던 원산지 표시를 쓸 수 없게 된다는 점에 있다. 원산지 표시를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농부들과 업자들은 목숨을 걸고 반대할 것이 분명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부르고뉴의 상황은 좀 더 복잡했는데, 부르고뉴의 원산지 명칭에는 그랑 크뤼, 프리미어 크뤼 등 와인의 등급도 같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보르도의 와인등급으로 알려진 그랑 크뤼(Grand Cru)는 원산지 제도가 정해지기 훨씬 전인 1855년에 지정된 별도의 등급인 반면, 부르고뉴의 와인 등급은 1930년대에 만들어진 원산지 제도에 포함되어 있다.
마르키스 당제르빌 포도원
앙제르빌 남작(Marquis d’Angerville), 프랑스어로 마르키스 당제르빌은 부르고뉴의 유명한 생산자이자 피에르 르루와 남작을 도와 프랑스의 원산지 명칭을 만든 1등 공신 중에 하나이다. 당제르빌이 있던 볼내(Volnay)는 “엘레강스라는 말을 알기 위해서는 볼내를 마셔보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레드 와인을 만드는 지역이다. 볼내 와인은 과거에 로마네 콩티보다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도 하였다. 마르키스 당제르빌은 원산지 명칭 제도를 반대하는 다른 농부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웃 마을인 뉘 상 조르주(Nuits St Geroges)의 농부이자 시장인 앙리 루즈(Henri Gouges)와 함께 자신들의 포도밭에는 최고의 등급인 그랑 크뤼 등급을 받지 않기로 선언하였다. 당시 와인의 품질과 가격으로 보아 그랑 크뤼의 자격이 충분하던 마르키스 당제르빌과 앙리 구즈의 희생은 다른 와인 업자들도 INAO의 원산지 명칭제도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 프랑스 와인이 큰 번영을 이루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
마르키스 당제르빌은 레이블에 표시된 등급보다 훨씬 더 뛰어난 와인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판매 가격도 만만치 않다. 마르키스 당제르빌의 대표와인은 ‘클로 데 뒥(Clos des Ducs)’으로 ‘공작들의 와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포도밭은 인근이 다른 포도밭과 함께 한때 부르고뉴 공작이 직접 소유하였다고 전해진다. 옥스퍼드 출신의 와인 평론가 윌리엄 켈리는 이 와인을 무시무시한(Terrific) 와인으로 표현하였으며, 우아하면서도 장기 숙성이 가능한 것이 ‘마르키스 당제르빌 클로 데 뒥(Marquisd’Anger ville Clos des Ducs)’의 특징이다. 자기 희생을 통해 리더십을 발휘한 마르키스 당제르빌의 와인들은 품질 면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면에서 모두 최고의 부르고뉴 와인들로 손꼽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