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춘천에 있는 ‘김유정문학촌’의 신임촌장이 <매경LUXMEN> 독자분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지난겨울 저 개인에게 변동이 좀 있었습니다. 25년 전 어느 금융기관에서 홍보업무를 하다가 퇴직한 이후 글을 쓰는 전업 작가로만 살아오다가 뒤늦은 나이에 새로 고향 강원도에 와서 문화·문학과 관계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통은 문학관이라고 부르는데, 이곳 김유정문학촌은 김유정 선생님 고향 마을 전체가 문학 무대이고, 터전이어서 문학촌이라고 부릅니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황순원문학촌’과 함께 우리나라에 둘밖에 없는 문학촌입니다.
저는 대관령 아래에 400년도 넘게 한국 유가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촌장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이번에 새롭게 맡은 직책은 아직 낯설지만 촌장이라는 호칭만은 참 익숙합니다. 어려서부터 그 말을 아침, 점심, 저녁이라는 말만큼 많이 들으며 자랐답니다.
제가 태어난 대관령 아래의 촌장마을은 제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마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춘천으로 외학을 와 대학을 다니며 ‘연필을 깎는 기초’부터 문학공부를 했는데, 이번에 다시 저의 문학적 고향이자 요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김유정은 1908년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산에 둘러싸여 떡시루처럼 움푹한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한 작가의 인생이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요? 김유정은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말까지 더듬는 ‘멱설이’였다고 합니다. 서울에 올라가 휘문고보를 다니던 시절 눌언교정소에서 고치긴 했지만 그 일로 과묵했지요.
그의 청년기 성장과 사랑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까요?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잦은 결석 때문에 제적처분을 받습니다. 그때 김유정은 당대 명창 박녹주를 만납니다. 목욕탕에서 나오는 어느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 어릴 때 여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첫눈에 반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박녹주인데, 1928년 봄의 일입니다. 조선극장에서 팔도 모창대회가 열리고, 여기에 박녹주 명창이 출연한다고 하자 김유정은 그녀가 머물고 있는 대기실에 찾아가 대화를 나눈 다음 본격적으로 연모의 편지를 쓰기 시작하고, 수시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때 이미 정인이 있던 박녹주는 김유정에게 “당신은 학생이고 나는 이미 정인이 있는 사람이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점잖게 타이르지만 김유정은 더 불같이 사랑을 표합니다.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즈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야학운동을 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 고향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합니다.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으로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지만,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봄봄> <동백꽃> 같은 작품을 쓰지만 병은 점점 깊어갑니다. 이때 오랜 벗인 안회남(본명 안필승)에게 아주 절박한 편지를 씁니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중략)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두 권 보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오십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허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 (중략)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삼십 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뭇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기다리마.
3월 18일 김유정으로부터.
그러나 이 편지를 쓰고 열하루 만에 김유정은 세상을 뜹니다. 이런 기막힌 인생이 있나요? 그리고 83년이 지났습니다. 스물아홉 살 아까운 나이로 돌아가 남긴 작품은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에 불과하지만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연구한 석사 박사 논문만 수백 편입니다.
세계에는 사람 이름을 딴 지명들이 많습니다. 미국의 워싱턴, 영국의 빅토리아, 캐나다의 밴쿠버, 호주의 브리즈번과 같은 도시가 있고,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알렉산드리아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 이름을 딴 도시와 장소들의 공통점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태어난 사람들이 자기의 터전과 태생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곳엔 김유정역이 있고, 김유정우체국이 있고, 농협 김유정지점이 있습니다. 카페도 음식점도 일반 가게들도 어느 곳을 둘러봐도 김유정 선생님 작품 속의 인물 이름을 딴 상호들이어서 가히 김유정 마을 그 자체입니다. 제가 와 있는 김유정문학관의 도로명 주소도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김유정로’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문학도시인 춘천이 김유정 선생님의 이름으로 이루어내고 있는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우리말뿐 아니라 이곳에서 영어와 불어, 일본어, 중국어로 김유정 선생님의 일생과 작품을 설명해 나가는 세계적인 문학촌이 되도록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노란 동백꽃(김유정의 <동백꽃>은 따뜻한 남도의 붉은 동백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강나무 꽃이라고 부르는, 봄철에 피어나는 노란 동백꽃)이 필 때 이곳 김유정 마을로 놀러 오시기 바랍니다.
제가 문학촌의 대문을 활짝 열고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