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제철인 귤은 이맘때 가장 흔하고 값싸다. 물론 한라봉, 천혜향 같은 품종은 결코 헐하다고 할 수 없지만 일반적인 귤은 겨울 과일 중에서는 값이 제일 저렴한 편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달랐다. 귤이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벌써 “내가 어렸을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 귤은 아플 때나 먹는 과일이었다는 둥 1년에 한 번 먹을 수 있을까 말까 했다는 둥 추억을 떠올리는 분들도 많겠지만 고대에는 사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서양의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다면 동양의 낙원에는 귤이 있었다. 지금은 흔해서 별 주목을 못 받지만 옛날에는 귤이 나오면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얼마나 엄청난 과일이었는지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 귤이 무슨 뜻일까? 과일 이름이지 또 뭐가 있겠냐 싶지만 이 세상 모든 이름에는 전달하려는 의미가 있다. 과일 이름인 귤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 뜻을 알아보기에 앞서 먼저 흔히 쓰는 말인 귤과 감귤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귤과 감귤을 같은 말로 알고 있고, 심지어 귤 중에서 표면이 매끄럽고 예쁜 귤을 감귤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감귤은 감(柑)과 귤(橘)을 합친 말로 지금은 특별히 따로 구분하지 않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종류의 과일이다. 밀감과 금귤처럼 서로 다르다. 12세기 송나라 때 밀감의 명산지인 중국 온주 군수를 지낸 한언직이 감귤 전문서적인 <귤록(橘錄)>을 썼다. 여기에 감과 귤을 구분해 놓았는데 감귤류에는 모두 27종이 있으며, 이 중 감이 8종, 귤 14종이 있다고 했다. 나머지는 오렌지(橙), 유자(柚)라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밀감(蜜柑)이라고 부르는 귤은 엄밀하게 구분해서 말하자면 귤이 아닌 감으로 꿀처럼 단 감이라는 과일이어서 밀감이다.
<귤록>에는 감과 귤이 어떻게 다른지 명확하게 구분해 놓진 않았지만 특징을 토대로 구별하자면 감은 껍질이 얇고 맛이 단 데 비해서 귤은 껍질이 조금 더 두껍고 더 새콤하다. 이렇게 비슷하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는데 1000년 넘게 세월이 흐른 지금은 감과 귤 두 품종 사이에 수없이 상호 교배가 이뤄지면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고 무의미해졌다. 어쨌든 처음의 화두로 돌아와서 귤은 얼핏 순우리말 같지만 사실은 한자 이름인데, 그 뜻을 풀이해 보면 의미가 깊다. 우선 감귤이라고 할 때의 감(柚)은 나무 목(木)과 달 감(甘)자로 이뤄진 글자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달콤한 열매가 열리는 나무라는 의미지만, 원뜻에는 기막힌 맛(眞美)이라는 감탄이 포함돼 있다.
귤(橘)은 나무 목(木)에 율(矞)자가 합쳐진 글자다. ‘율’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는 상서로운 꽃구름이라는 뜻도 있다. 한자가 만들어질 당시 사람들이 멀리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귤나무를 보고 상서로운 기운을 느꼈던 모양이다. 귤은 그러니까 복되고 길한 황금빛 열매라는 뜻이다.
▶천지간 가장 아름다운 과일
약 2500년 전인 춘추전국시대 이전 중국에서는 귤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과일이었다. 전국시대 초나라의 정치가 굴원이 귤의 노래를 지으며 “천지간의 아름다운 귤나무여, 하늘의 뜻을 받아 남국 초나라에서만 자라는 구나”라며 강남 귤이 강북에 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다른 곳으로 옮기면 살지 못하는 귤의 특성을 자신의 곧은 뜻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렇게 드물고 귀했던 과일인 만큼 귤은 진작부터 천자한테 바치는 공물이 됐다.
<서경>의 ‘우공(禹貢)’편에는 3000년 전 홍수를 다스리고 하나라를 세운 전설상의 영웅 우 임금에게 백성들이 귤과 유자를 공물로 바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귤과 유자가 나는 곳에서 우 임금이 살았다는 곳까지는 직선으로 약 1000㎞나 되는 거리다. 이렇게 전해진 귤이었으니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예전에는 효도의 상징으로 회귤(懷橘) 고사가 널리 인용됐다. 삼국지에 나오는 원술이 여섯 살 된 아이인 육적에게 귤을 주었더니 먹지 않고 품에 간직하고 나오다 땅에 떨어트렸다. 왜 먹지 않고 품에 숨겨 간직했냐고 물었더니 여섯 살 난 꼬마가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했다고 대답했다. 지극한 효성을 강조하는 고사지만 뒤집어 보면 철 모르는 여섯 살짜리 꼬마도 그 소중함을 알았을 만큼 귤은 3세기 최고 상류층 사회에서도 함부로 맛볼 수 없는 과일이었다.
고대에는 이렇게 상서로운 기운을 머금은 황금빛 열매라는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 과일이었고 멀고 먼 거리를 무릅쓰고 천자에게 진상할 정도의 귀한 과일이었기에 사람들한테 귤에 특별한 소망을 담아 먹었는데 현대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중국 사람들, 특히 홍콩이나 광동 그리고 항저우 등지의 남방 사람들은 새해 춘절이나 중추절 명절에 귤과 유자를 먹는다. 또 귤과 유자껍질을 우려낸 물로 세수도 하고 귤과 유자 분재를 선물하기도 한다. 황금을 닮은 귤이나 유자처럼 부자되고 상서로운 기운으로 복 많이 받으라는 의미다. 귤도 귤이지만 유자를 먹는 이유는 유자의 유(柚)가 하늘이 돕는다는 천우신조의 우(佑), 있을 유(有)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전후사정 모르고 보면 얼핏 단순한 말장난에 미신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춘추시대 이전 상고시대부터 내려온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한 풍속이다.
귤 귀하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보다 날씨가 온화해서 쉽게 귤을 재배했지만 그럼에도 일본 역시 귤에 대한 이미지가 남달라 8세기 무렵에는 일왕이 총애하는 궁녀 집안에 성씨로 하사했을 정도다. 일본 4대 성씨 중 하나인 타치바나(橘氏) 씨가 생긴 배경이다. 감격해서 성까지 귤 씨로 바꿔버렸다.
우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1960~1970년대에는 문병 갈 때 가져가는 위문품이었고, 그 이전에는 중산층 가정에서도 1년에 한 번 어쩌다 맛보는 값진 과일이었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는 제주도에서 올려 보낸 귤이 한양에 도착하면 도성이 시끌벅적해졌다. 벼슬 높은 양반집에서는 임금님이 내려 준 신기한 맛의 남국과일을 맛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귤이 올라온 것을 기념해 해마다 과거시험도 열렸기 때문이다.
▶귤껍질이 최고급 향신료?
귤이 귀했으니 귤껍질 역시 함부로 버리기는커녕 최고 양념으로 쓰였다. 조선시대에 일본을 비롯해 인접국과 교류한 기록을 적은 책이 <증정교린지>다. 여기에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일행이 현지에서 귤껍질 세 포대를 선물로 받았다고 나온다. 지금 같으면 쓰레기 세 봉지 받은 꼴이지만 당시는 귀한 선물을 받았다며 기뻐했다.
6세기 중국 농업서인 <제민요술>에도 고기와 생선은 귤껍질을 사용해 요리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맛있는 요리를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금제옥회(金虀玉膾)라고 하는데, ‘옥회’는 생선회로 썰어놓은 생선살이 옥처럼 희다는 뜻이고 ‘금제’는 회와 함께 먹는 양념장이다.
금빛 향신료를 버무려 놓았다는 뜻으로 귤껍질을 잘게 다져서 겨자와 함께 무친 것인데, 노란 귤껍질을 황금처럼 빛나게 버무렸다고 해서 금제(金虀)라고 했다.
귤껍질이 이렇게 귀했으니 귤껍질 차 역시 단순하게 먹고 남은 귤의 껍질을 재활용한다는 차원이 아니었다. 왕과 양반 부자만이 마시는 고급차였고 동시에 약이었다. 조선 후기 한겨울에 영조 임금이 감기에 걸리자 약방에서 끓여 올린 것이 귤강차(橘薑茶)였다. 귤껍질과 생강으로 끓인 차로 <본초강목>에 귤껍질은 기침과 가래를 없애는데 좋다고 했으니 최고급 감기약이었던 것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지만 동양에서는 후손을 위해 1000그루의 귤나무를 심었다. 감귤천수(柑橘千樹)라는 고사다. <사기>의 ‘화식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로 삼국시대에 오나라 단양태수 이형이 자손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대신 귤나무 묘목 1000그루를 심어 남겨주었다. 전란이 잦았던 시기였던 만큼 부자들은 재물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었지만 이형의 후손은 재물과 현금이 없었기에 불상사를 겪지 않고 무사히 전쟁을 넘겼다. 그리고 귤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서 자자손손 후손들이 부자로 살았다.
귤이 한참 맛있을 때다. 귤 까먹으며 올 한 해 상서로운 기운이 넘치기를 꿈꾸어 보고 자녀에게 업적으로 자랑할 새로운 계획을 세워 보는 것도 좋겠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