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평론가 윤덕노의 음食經제]뿌리는 생선 액젓, 어원은 중국말 사투리…케첩에 담긴 동서양 향신료 무역 역사
입력 : 2015.05.29 17:43:17
토마토케첩을 먹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 패스트푸드가 아닐까 싶다. 감자튀김이나 햄버거, 핫도그와 프라이드치킨은 토마토케첩과 찰떡궁합을 이루는 음식들이기 때문이다. 다음 연상 작용으로는 미국 음식문화가 그려질 수 있다. 햄버거, 코카콜라와 함께 토마토케첩 역시 미국을 통해 세계적으로 퍼진 식품이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저급 음식문화와도 연결된다. 패스트푸드가 아무래도 고급요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미국 음식이라도 스테이크나 바닷가재와 같은 값비싼 요리를 먹을 때 토마토케첩을 소스로 곁들이는 사람은 흔치 않다. 개인별 식성과 선호도와는 관계없이 토마토케첩이 고급이며 건강한 느낌을 주는 식품은 아니다.
정리하자면 토마토케첩은 패스트푸드, 미국 음식문화, 그리고 서민적이며 대중적인 식품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토마토케첩이지만 뿌리를 캐보면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케첩은 전형적인 슬로푸드에서 비롯된 식품이다. 지금은 미국 음식의 상징으로 여기지만 본고장은 아시아다. 게다가 유럽에서 그리고 아시아에서도 한때는 부자들이나 먹는 귀족적인 음식이었다. 현대인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토당토않은 소리처럼 들리지만 케첩의 뿌리와 변신의 과정을 밝혀 줄 열쇠가 그 이름에 남아 있다.
뿌리는 아시아의 생선 액젓
베트남의 생선 간장인 넉맘, 태국의 생선 젓갈 남쁠라, 필리핀의 생선 액젓인 파티스 같은 음식이 케첩의 기원이다. 동남아 생선 소스가 낯설어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생선 액젓을 떠올리면 된다. 즉, 까나리 액젓이나 멸치 액젓이 서양으로 건너가 토마토케첩이 됐다는 이야기다.
토마토케첩은 주재료인 토마토를 설탕, 소금, 식초를 비롯한 갖가지 양념에 버무려 만든다. 케첩을 만드는 여러 재료 중에 생선 액젓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토마토케첩의 뿌리가 아시아의 생선 액젓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직접적인 흔적은 토마토케첩이라는 이름에 남아 있다. 토마토(Tomato)라는 영어 이름이 남미 원주민인 인디오 언어에서 비롯된 것처럼 케첩(Ketchup)이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 역시 중국 남부와 동남아 일대에서 쓰는 언어인 민남어(閩南語)가 뿌리다. 민남어는 지금의 중국 남부 복건성과 광동성, 그리고 타이완에서 쓰는 중국어 사투리와 동남아 말레이 계통 언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17세기 무렵의 동남아와 중국 남부에서는 생선 소스를 케첩이라고 불렀다. 물론 지역에 따라 케첩, 쿠에찹, 코에챱 등으로 발음이 조금씩은 달랐지만 모두 생선 액젓을 나타내는 말로 한자로는 규즙(鮭汁)이라고 적었다. 1873년에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가 발행한 민남어-영어 사전에서는 우리말로 ‘규즙’이라고 발음하는 생선 소스를 ‘쾨챱(Koe-Chiap)’이라고 부른다고 표기했다. 규(鮭)는 구체적인 생선으로는 복어나 연어를 나타내는 한자지만 일반적으로는 생선요리를 가리킬 때 물고기 어(魚)자 대신 쓰는 한자다. 즙(汁)은 국물이라는 뜻이니 쾨챱, 즉 규즙은 문자 그대로 생선으로 만든 즙, 생선 액젓이라는 의미다. 어원학적으로 토마토케첩의 뿌리가 동남아시아와 중국 남부지방에서 쾨챱이라고 부르는 생선 액젓에서 비롯됐다는 흔적이다.
물론 쾨챱과 케첩이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토마토케첩의 뿌리가 동남아의 생선 액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원뿐만 아니라 각종 문헌에서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를테면 1711년, 찰스 록키어라는 영국인이 쓴 <인도에서의 무역장부(An Account of The Trade in India)>라는 책에는 “가장 좋은 케첩은 통킹에서 온 것”이라며 “케첩은 중국에서 만드는데 값이 매우 싸다”고 적었다. 베트남 통킹만에서 만드는 생선 젓갈이 가장 맛있다는 소리고 아시아 현지에서는 값이 그다지 비싸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도 ‘케첩’의 어원을 ‘생선이나 조개를 절인 젓갈에서 비롯된 단어’라고 밝히면서 1699년에 발행된 문헌에서는 동인도에서 온 소스라고 언급되어 있다고 소개했다. 여러 문헌에 나오는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케첩은 17세기,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의 선원들이 유럽에 가져간 생선 액젓에서 발달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설이다. 케첩의 뿌리가 아시아의 생선 젓갈이고 케첩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중국어 사투리 내지는 동남아 언어에서 비롯됐다는 사실까지는 단순한 흥밋거리에 불과한 에피소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배경을 보면 뜻밖의 경제사를 발견할 수 있다.
생선 액젓이 토마토케첩으로 변신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선원들은 왜 하필 아시아의 생선 액젓을 유럽으로 가져간 것일까? 먼저 찰스 록키어의 기록을 보면 동인도 회사 선원들이 생선 액젓을 유럽에 가져간 까닭은 단순히 낯선 이국의 식품을 고향에 소개하거나 혹은 장기 항해 때 선원들이 먹는 조미료 차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주도적인 생선 액젓 교역 품목이었던 것이다.
생선 발효 냄새가 지독한 싸구려 생선 액젓이 왜 동인도 회사의 교역 품목이 됐는지는 17세기 동인도 회사의 역할을 생각하면 분명해진다. 당시 동인도 회사는 후추를 비롯해 생강, 계피, 정향, 육두구를 비롯해 아시아의 차까지 각종 향신료 무역으로 돈을 벌었다. 생선 액젓도 예외가 아니었다. 동남아 현지에서는 값싼 생선 젓갈이었지만 유럽에 가져가면 신비로운 동양에서 온 값비싼 조미료로 둔갑했다. 아시아에서 가져간 생선 액젓이 당시 유럽에서 얼마나 비싼 값에 팔렸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주변 정황으로 보면 상당히 고급 조미료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영국에서 최초의 케첩 레시피는 1758년에 엘리자 스미스가 쓴 요리책 <완벽한 주부(Compleat Housewife)에 실려 있다. 여기에 케첩은 유럽 멸치인 안초비에 정향, 생강, 후추를 넣어 만든다고 나온다. 아시아의 직수입 젓갈이 고가였기에 대체품을 만든 것인데 들어가는 재료가 18세기의 정향, 생강, 후추였으니 상당히 고가 재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사무엘 존슨은 1755년에 쓴 저서 <사전(Dictionary)>에서 영국의 버섯 케첩은 초기 아시아에서 온 오리지널 소스의 맛을 모방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음식이라고 풀이했으니 왜 동인도 회사가 아시아의 냄새 나는 생선 액젓을 유럽으로 수입해 갔는지 이유가 분명해진다.
토마토케첩이 등장하기 전까지 영국에서 케첩은 주로 호두와 버섯, 굴 등으로 만들었다. 물론 값싼 소스도 아니었다. 이랬던 케첩이 식민지 시대 영국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드디어 토마토케첩이 등장한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토마토에 독성이 있다고 생각해 먹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케첩에 토마토를 넣은 까닭은 독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케첩의 제조원가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아시아에서 직수입한 고가의 생선 액젓 케첩이 세월과 함께 유럽에서 미국으로 전해지면서 서민들도 먹을 수 있는 저렴한 소스로 대중화된 것이다. 미국에서 토마토케첩이 널리 퍼진 것은 남북전쟁이 끝난 후인 19세기 후반으로 100개가 넘는 군소 토마토케첩 생산업체가 난립했고 그 과정에서 불량 토마토케첩이 쏟아져 나왔다. 참고로 토마토케첩은 보통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 용기에 담겨 있다. 이유는 안에 담긴 토마토케첩에 나쁜 첨가물을 넣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882년 투명한 용기의 케첩 병이 특허를 받으면서 군소 업체들이 정리됐는데, 처음 투명용기를 만든 주인공은 헨리 하인츠(Heinz)라는 사람이다.
케첩의 뿌리가 생선 액젓이라는 사실, 어원이 중국어 사투리라는 것도 흥미롭지만 케첩의 발달과정에는 세상을 바꾼 조미료 후추처럼 동서양 향신료 무역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 사실도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