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을 달라, 아니면 죽음을….”
프랑스 혁명 때 민중이 외쳤다. 그러자 왕비였던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트아네트가 유명한 한마디를 던졌다. “빵이 없으면 대신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 프랑스 민중은 분노했고 혁명이 퍼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세상 물정 모르고 빵 대신 케이크를 먹으라고 흰소리를 했다며 세대를 이어 빈축을 사고 있다. 실제로 앙투아네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서 지금까지도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약 150년 전,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새로운 삶을 찾아서 신대륙 아메리카로 이주민들이 몰려오기 시작할 무렵, 개척시대의 미국에도 빵이 넉넉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먼저 신대륙으로 건너 온 개척민들이 가꾸어 놓은 농장에서 일하던 가난한 이주민들은 배를 곯아야 했고, 농장주에게 빵을 달라고 외쳤다. 그러자 농장 주인은 빵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빵이 없으니 대신 바닷가재를 드세요.”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농장주의 헛소리였을까? 1620년, 102명의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영국을 떠나서 오랜 항해 끝에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 항구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영국을 떠난 이주민들이 계속해서 신대륙으로 건너와 정착을 한다. 메이플라워호의 필그림처럼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원주민의 도움을 받으며 스스로 농경지를 개척해 농장을 일구었지만 나중에 온 이주민들은 이미 만들어진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새 삶을 개척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최초의 청교도로서 초대 플리머스 총독이며 또 최대 농장 주인이 된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가 갓 도착한 이민자들을 모아 놓고 농장에서의 새 삶을 소개했다.
“여러분에게는 앞으로 식사 때마다 따뜻한 물 한 잔과 바닷가재를 한 마리씩 제공할 것입니다.”
고향인 영국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먹었던 거친 빵 대신에 앞으로 식사 때마다 맛있는 바닷가재를 한 마리씩 먹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아메리칸 드림이 실현된 것 같았겠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식사 때마다 나오는 바닷가재는 고생문이 활짝 열렸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무렵 매사추세츠에 있는 한 농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바닷가재 때문에 파업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스트라이크의 원인은 식사 때문이었는데 바닷가재가 너무 자주 제공됐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바닷가재는 먹지 못하겠다. 이제는 빵을 달라.”
배부른 노동자의 터무니없는 투정 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노사갈등의 핵심 쟁점이 식사문제, 그것도 식사로 나오는 바닷가재가 문제가 됐다. 농장 노동자들의 요구조건 중 하나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바닷가재를 내놓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주일 내내 빵 대신 바닷가재를 먹어야 했던 노동자들이 내건 조건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개척 초기에 농장 주인들은 왜 노동자들이 먹기 싫다는 바닷가재를 그렇게 자주 제공했던 것일까?
지금은 바닷가재가 미국 대통령의 취임 만찬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요리며 어디에서나 고급 음식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아메리카 대륙 개척 초기, 바닷가재는 가난의 상징이었다. 하인과 어린이, 노동자, 그리고 죄수들이 주로 먹었던 음식이었다. 이 무렵 노동력이 떨어지는 어린아이는 보호대상이 아니었기에 가장 형편없는 음식을 먹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바닷가재였다. 바닷가재가 이렇게 천대를 받았던 이유는 단 하나, 너무나 흔했기 때문이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정도가 아니라 걸어 다니면 발에 채일 정도로 바닷가재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지금도 바닷가재는 미국 북동부의 메인 주에서 잡히는 것을 최고로 여기지만 개척시절 메인 주와 매사추세츠 주에는 바닷가재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바닷가재가 얼마나 흔했는지는 새로 도착한 이주 노동자들에게 매일 식사로 따뜻한 물 한 잔과 바닷가재를 제공하겠다고 했던 초대 플리머스 총독 브래드포드의 저서에 기록이 남아 있다. <플리머스 농장에 관하여(On Plymouth Plantation)>에 “인디언들이 바닷가재를 주워 바닥에 잔뜩 쌓아 놓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해변에 바닷가재가 멋대로 돌아다닐 정도로 흔했다는 이야기다.
청교도들의 초창기 미국 이민 기록이 또 하나 있다. 브래드포드와 함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청교도 지도자 에드워드 윈슬로(Edward Winslow)가 남긴 편지다. 여기에도 여름이면 해변이 바닷가재로 넘쳐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비슷한 시기인 17세기 초반, 토마스 히긴슨(Thomas W. Higginson)이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이주민들의 상황을 묘사한 책이 있다. <미국 개척민(A Book of American Explorers)>이라는 책으로 여기에도 바닷가재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바닷가재가 너무나 흔했기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바닷가재를 먹는 대신에 밭에 비료로 뿌리기도 했고 집게발은 잘라서 낚시 바늘로 쓰거나 담뱃대로 이용했다. 노동자에게 끼니마다 제공됐던 바닷가재는 아메리칸 드림의 아이콘이 아니라 활짝 열린 고생문의 상징이었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속담이 있는데 바닷가재가 여기에 해당된다. 매일 빵 대신 바닷가재를 먹어야 했기에, 신물이 날 정도로 먹기가 싫어 결국 “바닷가재 대신 빵을 달라”며 파업까지 벌였던 천덕꾸러기 바닷가재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미국에서 용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에서 바닷가재가 고급 요리고 인기를 얻게 된 것인데 어떻게 갑자기 개천의 미꾸라지가 용으로 변신한 것일까?
바닷가재는 주로 미국 북동부 메인 주와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에서 잡힌다. 차가운 바다 깊은 곳에서 사는 바닷가재가 육질이 좋아 인기가 높기 때문에 수요가 많다. 그런데 예전 미국과 캐나다 북동부 해안에서 잡은 바닷가재는 산 채로 운송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산지에서는 발길에 채일 정도로 공급이 넘쳤지만 조금만 떨어진 곳에는 아예 공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바닷가재가 산지에서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던 것이다.
유통 개선으로 고급 음식으로 재탄생
이랬던 바닷가재가 19세기 중반, 기술혁신이 이뤄지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820년 스맥(Smack)이라고 하는 바닷가재잡이 전용어선이 등장했다. 배에다 수조를 갖춘 어선으로 덕분에 바닷가재를 산 채로 운반할 수 있어 뉴욕 등지로 싱싱한 바닷가재를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이 무렵부터 동부의 인구밀집 지역인 뉴욕과 보스턴 등지에서 바닷가재 수요가 늘어났다.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기 직전인 1842년, 미국 북동부 메인 주에서 잡은 바닷가재가 최초로 산 채로 철도를 통해 중부 중심도시인 시카고까지 운송됐다. 당시 동부에서 중부까지 활어를 운송한다는 것이 특별했는지 시카고의 유력 신문, 시카고 트리뷴은 이 사실을 뉴스로까지 보도했다. 드디어 통조림이 아닌 살아 있는 바닷가재로 만든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미국 북동부에 지천으로 널려 있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던 바닷가재가 중부 시카고에서는 부자들이 먹는 대표적 고급 요리로 변신했다.
1869년, 미국 대륙횡단 철도가 완성됐다. 메인 주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잡히던 바닷가재의 수요가 미국 전체로 넓어졌다. 그러다 보니 바닷가재 수급에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수요가 공급을 훨씬 초과하면서 바닷가재의 가격이 뛰었다. 이후 바닷가재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고급 요리가 됐다.
바닷가재가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블루오션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관 및 운송 기술의 발달이 바닷가재의 가치를 바꿨다. 가치이동(Value Shift)이 이뤄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