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에서 중원지방은 두 차례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다. 5호 16국의 시대라고 부르는, 서진(西晉)이 멸망한 후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하기까지의 시기와, 5대 10국의 시대라고 부르는, 당(唐)나라가 멸망한 후 북송(北宋)이 전 중국을 통일하게 되기까지의 시기가 바로 그 혼란기이다.
이 시기에 중원지방에서는 이민족의 말발굽 소리와 전쟁의 불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 두 차례의 혼란기를 겪은 이후 중원지방은 역사의 중심에서 점차 멀어졌다.
명·청 시대에 정치의 중심은 베이징으로 옮겨갔고, 지식인의 대거 이주와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말미암아 경제·문화의 중심지는 강남지역으로 바뀌었다. 이런 점에서 뤄양(洛陽)과 카이펑(開封)은 중원지방의 영화를 오로지 기억으로 간직한 도시이다. 그 영화의 기억을 우리에게 한사코 현실로 각인시키려 드는 것이 바로 카이펑의 번성함을 그린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이다.
존경의 길과 치욕의 길… 역사의 평가는 합당한가
나는 뤄양의 북쪽에 있는 망산(邙山), 그 때문에 우리가 북망산(北邙山)이라고 부르는 곳에 묻혀 있는, 한족·조선족·돌궐족 등 다양한 민족의 인물들을 둘러보면서 중원지방의 역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민족들이 중원으로 몰려왔던 평화의 시대와 혼란의 시대를 상기하면서 나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풍도(馮道)’라는 특이한 인물에 미치고 있었다. 5대 10국의 혼란한 시기를 한 몸에 고스란히 짊어지고 살아간 이 특이한 인물의 생애를 나는 쉽사리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난세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풍도의 생애만큼 시사적인 생애는 달리 없다. 중국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악비(岳飛)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악비처럼 충의의 길을 걷는 것은 후세가 기억해주는 영광의 길이며, 이미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귀감을 보여준 길이다. 그러나 풍도가 걸어간 길은 모멸의 길이고 귀감이 없는 독특한 고난의 길이다. 그래서 나는 풍도의 길이 악비의 길보다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풍도는 당나라 말기 ‘황소(黃巢)의 난’이 한창일 때 태어나, 5대 10국이 교체되는 혼란기에 다섯 왕조, 여덟 성씨, 열한 명의 천자를 섬기며 50여 년 동안 고위관직에 있었다. 이 난세에 30년은 고위관리로, 20년은 재상으로 지내면서 천수를 모두 누리고 73살에 죽었으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처세를 했으면 그처럼 빈번하게 바뀌는 왕조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반면에 악비는 풍도보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북송시기에 태어났지만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39살의 젊은 나이에 살해당했다. 금(金)의 침입으로 북송(北宋)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을 조직하여 후베이(湖北) 지역의 실력자가 된 그는, 악가군(岳家軍)이란 정병을 양성하여 송나라 역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금나라와 싸워 이기는 전공을 올린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전공과 항전의지가 당시의 재상으로 주화파였던 진회(秦檜)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에 그는 비극적인 죽임을 당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악비(岳飛)는 관우(關羽)와 함께 중국 사람들이 충절의 화신, 애국의 화신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대표적 인물인 된 반면, 풍도(馮道)는 한족의 왕이건 이민족의 왕이건 가리지 않고 섬긴, 지조 없는 경우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악비는 ‘악왕(岳王)’이란 명칭에서 보듯 중국 인민들이 존경하며 기억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고, 풍도는 사마광(司馬光)의 평가에서 보듯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삶을 산 사람이 되었다. 두 사람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과 역사적 평가는 이렇게 엇갈리지만 우리는 이러한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두 사람이 걸어간 길에 대해 후세 사람들이 ‘존경의 길’과 ‘치욕의 길’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합당한 것일까? 나는 중원지방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당나라 멸망이후 중국북방에서 명멸한 5대 10국의 역사를 돌이켜 보는 가운데 올바른 지식인의 길이 단순한 것도 명쾌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있었다.
풍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악비사당이었다. 항조우(杭州)의 악비사당에서 받은 충격을 나는 카이펑의 악비사당에서도 마찬가지로 받았다. 그것은 이제 역사의 죄인이 되어 중국인민들 앞에 꿇어 앉아 있는 진회 부부와 그 동조자들의 초라한 조각상 때문이었다. 살해당한 악비는 웅장한 사당에 모셔져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칭송하는 대상이 되어 있는 반면 악비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사람들은 무방비 상태로 모멸과 가해의 대상이 되어 있는 현실을 보면서 나는 역사적 삶을 산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위)악비조각, (아래)악비사당에 있는 간신 조각
위기의 시대에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악비가 한족의 민족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데에는 분명히 송나라의 치욕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악비가 살해당한 후 남송은 금나라와 굴욕적인 화의조약을 맺었다. 금나라에 대해 자손대대로 신하의 예를 지킬 것을 분명히 하고, 회하(淮河) 이북의 땅이 금나라 땅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매년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바칠 것을 약속한 것이다. 한족의 송나라가 오랑캐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참담하게 굴복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굴복은 남송의 정치적·군사적 여건이 낳은 불가피한 결과이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부강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취약했던 송나라는 이미 북송시기에 서하(西夏)와 막대한 경제적인 보상을 통해 평화를 사는 조약을 맺은 바가 있었다.
또 수도인 카이펑이 함락되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포로로 끌려가는 ‘정강의 변’ 이후 건국한 남송은 군사적으로 줄곧 금나라에게 패배하면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병자호란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한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는 굴욕적인 화의조약을 맺었다.
그렇지만 이후의 역사는 현실적인 주화파보다는 비현실적인 주전파들을 더 높이 평가하며 기리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김상헌과 삼학사가 충의지사로 추앙받은 반면 화의를 주도한 최명길이 나라를 치욕스럽게 만든 사람으로 비난 받은 것에는 분명히 비현실적인 명분론과 보상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풍도가 선택해서 살아간 길은 지극히 현실적인 길이었다. 그는 힘 있는 절도사들이 수시로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확히 구별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 백성의 안녕을 위해, 문화의 보존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면서 황제의 자리가 바뀌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컨대 석경당(石敬塘)이 거란의 도움을 받아 황제가 된 후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풍도를 사신으로 보내려 했을 때 그는 “폐하께서는 북쪽 왕조의 은혜를 입었으며, 신은 폐하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기꺼이 그 직을 수행했다. 그랬기 때문에 명분론에 입각한 정통사학의 거두인 사마광은 풍도를 이렇게 평했다.
“정절을 지키는 여인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성스런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 충성스럽지 않은 신하는 제아무리 재능이 많고 공적이 빼어나도 훌륭하다고 볼 수 없다. (……) 풍도가 재상으로서 다섯 왕조와 여덟 성(姓)을 섬긴 일은 나그네가 객방을 스쳐가는 일과 마찬가지다. 아침에는 서로 원수였는데 저녁엔 임금과 신하 사이로 변하자, 표정과 말을 바꾸면서도 부끄러워 한 적이 없다. 큰 절개가 이랬으니, 설사 그가 착한 일을 몇 가지 했다고 한들 어찌 괜찮다고 말하겠는가?”
풍도에 대한 사마광의 평가는 이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졌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아마도 풍도가 “나그네가 객방을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생각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황제였을 것이다. 맹자가 “나라의 사직이 중요하지 임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던 것처럼 풍도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황제가 아니라 나라, 다시 말해 나라를 구성하는 백성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풍도는 평생을 고위직에 있었지만 사사로운 이익을 취한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간신이었다면 아부와 모략을 일삼았어야 하는데 그는 그런 적이 없다.
그는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면서 혼란의 시대에 백성을 걱정하고, 전화가 가져오는 살상을 막고, 나라를 하루 빨리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그가 명종 앞에서 외운 섭이중(聶 耳中)의 「농부를 아프게 하는 노래」란 시에 나오는 “우리들 바라건대 군주의 마음이/밝은 빛을 내는 촛불로 되어/그저 호사스런 술자리만 비추지 말고/유랑빈의 빈집까지 두루두루 비추기를”이란 구절이 그의 자세와 마음을 잘 대변해준다고 생각한다. 위기의 시대에 한 지식인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지나친 이상주의자로 살아가는 것도 현실주의자로 살아가는 것도 올바른 지식인의 길은 아니다. 강렬한 명분을 내세우며 세상을 등지는 일은 세상에 참여하면서 자신을 관리하는 일에 비해 훨씬 더 쉬울 수도 있다.
김병익의 말처럼 지식인은 자신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와 발을 디디고 있는 구체적 현실 사이에서 “환상에 빠지지도 않고 공동체적 관련성을 버리지도 않을 때”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누가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나는 불경스럽게도 풍도의 길이 그 어려운 길의 한 모범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악비사당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