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노동을 해야만 하는가? 속된 말로 ‘먹고 살기 위해’ 노동하는 것일까? 인간이 노동을 해야만 한다는 최초의 문헌기록은 인류의 첫 문명을 이루었던 수메르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2000년경 갈대를 뾰족하게 깎아 그 끝으로 말랑말랑한 점토에 글을 새겼다. 이 글자를 쐐기문자라고 한다. 그들이 남긴 신화에 따르면, 우주가 처음 생성되던 원초적인 시간에는 신들밖에 없었다. 당시 신들은 두 계급으로 나누어졌다. 우주를 기획하고 관장하는 ‘위대한 신들’과 그들의 명령을 받아 수행하는 ‘조그만 신들’이다. ‘조그만 신들’은 우주를 질서정연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온갖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그들의 노동은 주로 침적토를 걷어 올려 물이 잘 흐를 수 있는 수로를 만드는 작업이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은 아르메니아에서 발원되어 수천 킬로를 굽이쳐 내려온다. 이어 바빌론 근처에서 완만한 지형을 만나 페르시아만에 도착할 때까지 늪지대를 이루고, 침적토만 산처럼 쌓기 때문이다.
결국 ‘조그만 신들’이 ‘위대한 신들’에게 불평하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 어떤 존재를 만들어 준다면, 그들은 최고신들을 ‘왕들’로 모실 것이라고 제안한다. ‘위대한 신들’은 이 말을 기쁘게 받아들여 이들을 대신하여 노동할 대체물을 창조한다. 바로 이 대체 존재가 ‘인간’이다. 결국 인간은 노동을 위해 창조된 존재이다.
인간창조이야기는 성서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도 등장한다.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에덴동산이라는 신화적인 땅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신이 인간처럼 지상에서 걷기도 하고 인간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신은 수많은 나무들 가운데 동산 한 쪽에 우뚝 서있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지식의 나무’를 심어놓았다. 그는 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한다. ‘선과 악’이라는 고유한 고대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개념을 나열함으로 전체를 의미하는 용례이다.
그러므로 이 나무는 ‘모든 지식의 나무’이다. 인간은 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다. 이 행위는 전통적인 신학 해석에 의하면 인간을 불순종과 원죄의 시작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우주의 신비를 느끼고 추구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메타포라는 것이다.
신은 우주의 지식을 획득한 아담에게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음식을 먹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노동은 신이 인간에게 명령한 소명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아를 실현한다. 신은 이브에겐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서 저자는 인간이 죄를 지어 여자가 해산의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출산하는 일에 대한 기원을 설명한 것이다.
유대인이 남긴 탈무드에 <선조들의 어록>이라는 항목이 있다. 당시 최고의 유대 랍비들의 가르침을 모은 어록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우주는 다음 세 가지를 기초로 지탱되고 있다. 첫 번째는 토라, 두 번째는 노동, 그리고 세 번째는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나라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삶의 세 가지 원칙을 정했다. 이들 중 첫째와 셋째는 명약관화하다. 첫째 ‘토라’는 유대인들의 경전이다. 토라는 깊이 묵상하고 삶에서 실천하라는 주문이다. 셋째 ‘친절 베풀기’는 이웃의 삶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친절을 베풀라는 명령이다. 시간이 지나면, 진심어린 친절이야말로 최고의 투자이다. 두 번째 ‘노동’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대개 ‘service (in the temple)’로 번역한다. 사실 이 번역은 탈무드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
‘노동’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보다’이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게 이 단어는 서로 상충되는 두 개의 개념이 존재한다. ‘아보다’는 ‘노동’이면서 ‘예배’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인간의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을 넘어 신에게 예배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일주일 동안 하는 일과 신을 경배하는 일은 분리할 수 없으며,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기도 하다고 여겼다.
1611년 영국의 성서학자들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서를 번역할 때, 그들을 당황시킨 히브리 단어들 중 하나가 바로 ‘아보다’이다. 그들은 ‘아보다’를 위해 새로운 단어를 고안해 냈는데, 그 단어가 바로 ‘service’이다. 자신이 일상에서 하는 일을 신에게 하는 일처럼 행하라는 의미이다. 공자도 유사하게 <논어> 194편에서 ‘인’에 대해 묻는 중궁에게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즉 “문을 나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큰 손님을 만난 것처럼 행동하고 백성을 대할 때는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하라”고 말한다.
예수도 복음서에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인간에게 노동이란 곧 예배이다. 속되고 일상적인 삶 가운데 거룩하고 숭고한 것을 찾는 행위가 바로 종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