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를 ‘한상(韓さん)’이라고 부르고 나는 그를 ‘오다카(尾高) 선생’이라고 부른다. 이십여 년간 친구처럼 지내온 사이라지만 그는 나보다 아홉 살이나 위였다. 더군다나 아내의 일본유학 시절 대학의 은사였다. 몇 해 전 대학에서 정년을 맞은 그가 올가을에는 꼭 한국을 다녀가고 싶다는 여행 약속을 한 건 지난 봄, 도쿄로 찾아간 나와 벚꽃이 지고 있던 역 근처를 산책할 때의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엽서를 받은 건 지루하게 장마가 계속되던 여름이었다. 낯익은 글씨, 의례적인 인사, 가을 여행에 관한 소식인가 하며 엽서를 읽어나가던 나는 세번 째 줄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위암이 발견되어 7월 하순에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합니다. 위의 3분의 2를 잘라내는 수술입니다. 위를 잘라내는 수술이라 퇴원 후에는 아마 아무 것도 먹지 못하지 않을까. 그러니 아무래도 가을의 한국여행은 어렵겠지요…’ 그런 내용이었다.
내가 놀란 것은 암이 아니었다. ‘아마 아무것도 먹지 못하지 않을까’라는, 위의 3분의 2를 잘라낸다는 수술이었다. 대뜸 무슨 호스 같은 것을 몸에 꽂고 밥을 먹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건 떠올린다는 자체만으로도 괴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어찌할 것인가. 그에게는 퇴원 후를 돌봐 줄 아내가 없었다. 아니 가족이 없었다. 외아들이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그였다. 죽음이 찾아오는데 무슨 우편번호가 있고 주소가 있던가. 이제 그의 차례인가 하는 슬픈 생각에 젖어들며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고 그루터기 하나가 남았다. 오다카 선생은 자신의 암 진단과 대수술을 받게 되는 정황을 소상하게 전할 정도로 나를 가깝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수술을 받게 되었다면 나도 그에게 소식을 전했을까. 나는 단연코 안 했을 것 같았다.
일본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8월초 그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열흘이 되는 날이었다. 일본 시민단체에서 주관하는 전후문제에 대한 심포지엄에 들를 예정이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오다카 선생은 나에게 소식을 주었지만 나는 그에게 소식을 알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의 우정에 대한 결례 같은 것이 가슴 바닥에 남아서였다.
누워 있을 줄 알았던 그였다. 그러나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집 앞 지하철역까지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다. 역 앞에서 만난 그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위가 3분의 1로 줄었으니까 먹는 양도 그렇게 3분의 1이라 영양섭취가 안 되니까요”하면서 그가 웃었다. 아이들이 먹는 이유식처럼 거의 씹지 않아도 되는 음식을 먹고 지낸다고 했다.
그의 집에 들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을 때 그는 놀랍게도 스시집으로 향했다. 회 정식으로 저녁을 함께 하면서 한상은 술을 마셔야 하지 않겠냐면서 그는 내게 찬 일본술을 시켜주었다. 그러고는 내가 술을 마시는 동안 자신도 두 잔을 받아 마셨다. 그건 술을 마신다기보다 잔을 입술에 대었다 떼면서 조금씩 혀로 맛을 보는 것만 같았다.
“회도 술도 수술하고 나서 처음입니다. 어찌나 먹고 싶던지….” 모든 게 나를 만났다는 핑계로 처음 먹는 것들이었다. 함께 알아 온 세월만큼이나 쌓여 있는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를 먹고 나면 천천히 좀 걸어야 한다는 그와 함께 외등이 빛나는 골목길을 걷다가 집 앞에서 헤어진 것은 밤이 늦어서였다.
다음 날 나는 들끓는 8월의 햇살 속에서 일본의 전후 책임과 반성을 논의하는 심포지엄을 찾아가 돌덩이가 얹히는 것 같은 무거운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항의 촛불시위가 이어졌었다. 숨이 막히는 더위가 내리누르는 거리에 어둠이 오고 있었다. 나는 야스쿠니 합사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행렬을 따라 걸었다. 차량이 통제된 거리에서 일본 경찰은 말 그대로 철통같이 우리들을 에워싸고 일본 우익의 검은 차량이 ‘너희들 뭔 짓을 하는 거야! 한국으로 가 버려!’ 귀가 찢어지는 고성능 스피커를 달고 그 옆을 다시 에워쌌다. 시위가 이어지면서 쥐어짜면 물이 흐르게 온몸은 땀으로 젖어갔다. 우익 녀석들이 던지는 돌멩이가 여기저기 투닥거리며 우리 행렬의 가운데로 떨어졌다.
오다카 선생을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점심으로 메밀국수를 먹자고 했다. 수술 후 처음 먹는 메밀국수였다. 첫날 만날 때와는 달리 생기가 있었지만 그는 함께 시킨 연두부를 양념장을 걷어내면서 먹었다. 위에 자극을 주는 건 절대 금물이라면서. 식사를 마친 우리는 역 주변을 걷다가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도 마셨다. 왜 그랬을까. 그가 갑자기 처음 들어보는 말을 했다.
“네 형제 가운데 맏이였던 아버지는 간사이(關西)쪽에서 혼자 도쿄로 올라왔지요. 그래서 나는 집안사람들과 교류가 많지 않아요. 요즘 같은 오봉(お盆)에 고향에 내려간다거나 하는 일이 없이 살아왔으니까요. 오봉도 지키지 않는 나 같은 일본사람이 한상이 보기에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봉’이란 일본인들이 양력 8월 15일 전후해서 죽은 조상의 영혼을 추모하는 때였다. 그랬다. 때는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있었다. 우리의 한가위 명절처럼 일본의 오봉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속도로가 뒤엉키게 고향으로 몰려 내려가는 때였다.
“일본에는 족보 같은 것이 없으니까. 이제 이렇게 해서 고향이니 가문과는 인연이 끊어지는 건가, 생각하지요.”
그가 대수술을 건너며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한 사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소멸하는 것은 그 사람 혼자일까. 가계(家系)니 자식이니 집안이니… 우리들 인간이 만들어온 제도와 관습이란 무엇인가. 그것도 또한 소멸할 뿐인 것인가.
내일은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어린아이들처럼 내가 그를 집까지 배웅하면 그가 다시 역까지 나가겠다면서 그늘을 찾아 걷던 우리는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다음을 약속하며 서 있었다. 내가 말했다.
“몸조심하깁니다. 절대 무리는 하지 마시고.”
“6개월 후에 만날 때는 우리 술도 마실 수 있을 걸요.”
그는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했다. 언뜻 그와 내 얼굴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스쳐갔다. 언젠가는 식민지에서 끌고 가며 조선인을 ‘일본 천황의 아이들(陛下の赤子)’이라고 하던 그들이다. 그들이 야스쿠니에는 죽은 영혼까지도 일본에 모셔야 한다고 하면서 BC전범으로 몰려 고초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너희들은 일본인이 아니므로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방치해 버리는 일본의 모순, 그런 일본이 과거를 잊은 채, 이제는 또 평화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어디로 가겠다는 것일까. 도대체 전쟁을 그리워하는 민족은 어떻게 돼먹은 인간들이란 말인가.
과거사 위에 뿌리를 내린 우리의 우정은 과연 견고한 것인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말하고 있었다. 우린 또 만납니다. 그걸 믿읍시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려다 돌아보았을 때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나도 마치 60년대 흑인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를 향해 주먹 쥔 손을 들어올렸다. 아, 생각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날들이 가고 있는가. 이 날들이 영원이 아닌가. 떠나간 뒤에야 안다. 사라져간 뒤에야 안다. 다 써버린 다음에야 우리는 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의 황홀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