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보험회사 국제회의를 다녀온 기업인 친구는 한층 고무돼 있었다. “우리 회사가 크게 돋보이는 것도 아닌데, 일부러 친한 척 다가오는 외국인이 많더군. 한국에서 비즈니스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더라고. 아예 한국인 직원을 자기네 회사에 파견해달라는 곳도 있을 정도여서 나도 놀랐어.” 경제부처 고위공무원들이 전하는 해외 분위기도 정도에 차이가 좀 있을 뿐이다. 기업인이나 관료 가릴 것 없이 한껏 높아진 한국 위상을 피부로 느낀다니 무척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잘 나간다는 것은 곧 브레이크가 걸릴 때 잃을 것도 많다는 뜻 아닌가. 우리는 착시(錯視) 현상의 뜨거운 맛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봤다. 당시엔 ‘반도체’가 문제였다. 반도체 한 품목에 대한 국제수지 흑자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상태에서 반도체 경기가 급격히 꺾이자 외환보유액이 급감한 것이다.
이번엔 휴대폰이다. 최근 국민들이 삼성전자와 애플 간에 동시다발로 진행 중인 특허전쟁에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유도 이 같은 반도체 트라우마 때문이다. 올 상반기 삼성전자가 휴대폰을 앞세운 IT·모바일 부문에서 올린 매출 비중은 62%, 영업이익에서는 70%에 이른다. 삼성그룹 전체 매출에서 삼성전자가 IT·모바일 부문만 자그마치 34%를 차지한다.
솥뚜껑 보고 놀라는 심정이랄까. 삼성전자가 제2의 애플 같은 새로운 강자의 부상이든, 특허 소송과 같은 외풍이든, 어떤 이유에선가 흔들릴 경우 바로 한국 경제의 위기로 치달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동안 한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온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주력산업도 대부분 마음 졸이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다.
<LUXMEN> 창간 3주년을 맞아 커버스토리로 기획한 ‘30년 후 세상, 30년 후 먹거리’는 이런 절박함에서 나왔다. 결론은 기존 주력사업 경쟁력을 확고히 다지면서 사업간 컨버전스를 통해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고, 또 한편으로는 기존에 없던 사업을 창출해 선도하는 ‘투 트랙’ 전략이다.
제조기술력을 지렛대로 삼아 ‘빠른 추종자(Fast Follower)’로 성공한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뤘으나 이젠 패러다임의 대전환기에 와 있다. 중국의 석학, 판강(樊綱) 중국 국민경제연구소장이 인터뷰에서 밝힌 “중국 경제는 저개발 국가들에는 비용 경쟁력에서 떨어지고, 선진국에 비해서는 첨단 기술력에서 뒤져있다”는 문제 제기는 바로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숙제이기도 하다.
산업의 새로운 판을 펼치는 ‘혁신주도자(Leading Innovator)’, ‘시장 선도자(First Mover)’는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혁신가(Innovator)는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도 크다. 혁신가를 추격하며 적정 이윤을 추구하는 ‘빠른 추종자’와는 다른 차원이다.
“전화기나 컴퓨터, 워크맨, 스마트폰처럼 인류의 삶을 한 차원 끌어올린 신기술 상품을 한국은 아직 창조해낸 적이 없다.” 잘 나간다는 한국 경제의 한계를 꼬집을 때 간혹 듣는 지적이다. 제대로 된 산업의 역사가 일천하긴 해도 세계 1등 품목이 하나 둘이 아닌 만큼 곧 해낼 것으로 믿는다.
그 토양은 기업가 정신으로 충만한 혁신가를 많이 키워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방법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적어도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풍토에선 싹을 틔우기 어렵다. <LUXMEN>이 올해 처음 제정한 ‘LUXMEN 기업가상’ 첫 수상자들도 실패와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다.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은 명문 와튼 스쿨 MBA 졸업 직후인 1972년 무역회사를 차려 승승장구했으나 1979년 오일쇼크를 넘기지 못했다. 이후 한세실업을 세워 조 단위 매출을 일궜다. 지금은 내의업체 좋은사람들을 인수해 경영자로 변신한 선경래씨는 미래에셋자산운용에서 독립한 초기에 선물투자로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이후 차비도 못 낼 처지가 됐다. 그는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재기하라며 지원해준 종자돈 (액수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겠다) 덕에 벌떡 일어섰다.
시시때때로 삼각파도가 몰아치는 불확실성 시대에 아이디어 하나로 온갖 고비를 넘기고 무사하게 항해를 마치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창조경제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실패에서 성공의 지혜를 얻는 패자부활전이 필요하다. 실리콘밸리 창업 기업인도 평균 2.8회 실패를 맛봤다고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