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금융자산으로 10억원 이상 보유한 부자는 13만 명(2010년 기준)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있었던 2008년에는 8만4000명에 달했던 부자가 2년 뒤에는 13만 명으로 54%나 증가했다.
이 보도를 접하며 몇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10억원이 과연 노후자금의 적정규모인가’와 ‛한국의 인구 4800만 명 중 13만 명(가족까지 포함하면 50만 명 정도)에 포함되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노후에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이었다.
금융회사가 제시하는 노후걱정 없는 부자의 기준은 대체로 금융자산 10억원이다. 하지만 10억원은 금융회사가 마케팅 전략의 하나로 내세운 상징적인 구호일 뿐 지나치게 많은 액수로 보인다. 미래에 들 생활비에다가 매년 물가상승률을 복리로 계산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곶감 빼먹듯 벌어놓은 돈을 쓴다고 가정하니 노후자금 규모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많이 나오는 것이다. 금융회사의 은퇴컨설팅은 길어진 노년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순기능이 있는 반면 지나치게 공포감을 조장하는 역기능이 심각하다. 가뜩이나 교육비·주거비 부담에 허리가 휘는 이 땅의 4750만 명에 가까운 중산층 서민들은 로또에 당첨되면 몰라도 도저히 10억원을 모을 수 없으니 패닉에 빠질 만하다.
너무 겁먹지 말 일이다. 노후자금이 예상만큼 많이 들지 않는다. 물론 생활수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노부부가 은퇴 후 텃밭이라도 가꾸면서 소박하게 살면 1개월에 200만원 안팎이면 충분하다. 은퇴준비에 취약한 세대인 베이비부머(1955~63년생)라도 국민연금을 꼬박 납부했다면 60대 초반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월 130만원 정도를 탈 수 있다. 집이 있으면 살고 있는 주택을 담보로 주택연금을 받을 수 있다. 허드렛일이라도 할 각오가 있고 자식에게 상속을 하지 않을 생각이면 노후문제는 크게 걱정할 일 아니다.
어느 여론조사기관이 은퇴 후 삶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더니 영국인들은 ‘행복’을 떠올렸는데 한국은 ‘돈 걱정’부터 했다고 한다. 선진국에서는 은퇴하면 재교육을 받으러 가거나 곧바로 재취업을 준비한다. 한국에서는 동창들과 어울려 산으로 간다. 물론 등산이 건강에 좋긴 하지만 일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월 100만원 수입이라면 지금 같은 저금리에서는 현금 3억~4억원 정도를 갖고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인생은 어차피 완벽하게 미래에 대비하며 살 수는 없다. 누구나 어느 정도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수명이 90세를 넘어서는 2030년쯤엔 인생을 두 번, 세 번 쪼개서 사는 ‘이모작 인생’, ‘삼모작 인생’이 널리 확산될 전망이다. 진정한 은퇴는 대체로 앙코르 커리어(지속적인 수입원, 삶의 의미 추구, 사회적인 영향력 유지)까지 마친 70대 중반 이후가 돼야 한다.
보이지 않는 미래 때문에 걱정하느라 지나치게 돈에 얽매어 살면 그 인생은 불행하다. 공연히 위축되지 말고 오랫동안 일하며 가족·이웃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살 계획부터 세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