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벌새 | 영지 선생님은 은희에게 왜 하필 ‘우롱차’를 우려줬을까
김소연 기자
입력 : 2022.09.08 14:21:15
수정 : 2022.09.14 09:51:21
‘독립 영화계 아이돌’. 김보라 감독을 설명하는 수식어다. 김 감독은 2019년에 선보인 <벌새>라는 독립영화로 일약 영화계 주역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그저 독립 영화계 스타로만 머문 것이 아니다.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포함해 백상예술대상 감독상과 여우조연상, 부일영화상 최우수작품상 등 무려 25개 상을 받으며 ‘무서운 신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뿐인가. 벌새단이라는 ‘벌새 팬클럽’도 만들어졌다. 도대체 <벌새>가 어떤 영화길래.
‘1994년,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14살 ‘은희’의 아주 -보편적이고 가장- 찬란한 기억의 이야기’. <벌새>에 대해 소개하는 문구다. 벌새는 1초에 많게는 90번 날갯짓하는 몸집이 아주 자그마한 새다. 벌새는 어쩌면 ‘90번 날갯짓’을 하며 죽을 둥 말 둥 매일매일을 살아내는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 분)를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친구로 인해 상처받은 은희에게 영지 선생님은 우롱차를 우려준다. 우롱차는 특히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서로 죽일 듯 싸우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하는 부모님,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모범생이지만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수험생 오빠, 겁 없이 남자친구를 방에 데리고 와 재워주는 비행소녀 언니와 함께 사는 은희는 중학교 2학년이다. 대치동에 살지만 학업에는 별 의욕이 없다. 친한 친구도 몇 없다. 뜬금없이 한문 학원에 다닌다. 그 나이대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꽤 염세적인 편이고, 비속어도 곧잘 쓴다. 풋풋한 것인지 그저 풋내 나는 것인지 그런 연애도 하고 가끔은 콜라텍도 간다.
은희는 응어리를 분출할 때보다 삼킬 때가 많다. 언제나 경계를 서성이는 은희. “괜찮냐?”라는 물음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은희는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 ‘괜찮아’ 보인다. 사실 객관적으로도 환경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떡집 장사를 하는 부모님은 은희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무관심으로 방치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영화의 배경인 1994년, 그때는 다 그렇게 비슷비슷하게 살았을 테니.
‘어정쩡한’ 결핍에 시달리며 ‘어정쩡한’ 반항을 하는 은희가 유일하게 맘을 열고 기대는 인물이 한문학원에서 만난 영지(김새벽 분) 선생님이다. 영지 선생님은 가정폭력을 당하는 은희에게 “너 이제 맞지 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알겠지”라고 말한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펴 봐. 그리고 움직이는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손가락은 신기하게도 움직여져”라고도 말해준다. 그 말이 손가락 대신 영지의 마음을 움직였을 수도 있다.
‘相識滿天下(상식만천하) 知心能幾人(지심능기인)’.
영지 선생님이 수업 첫 시간에 칠판에 쓴 글귀다. <명심보감>의 ‘교우(交友)’ 편에 나오는 문장. ‘얼굴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한데,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라는 뜻이란다. 은희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영지 선생님임을 보여주는 단면일까. 실제 영지 선생님은 친구로 인해 상처받은 은희에게 말없이 차 한 잔을 따라준다.
“무슨 차예요?”
묻는 은희에게 영지 선생님이 대답한다.
“우롱차.”
‘우롱하다’ 할 때의 그 ‘우롱’이 아니다. 한자로 ‘오룡차(烏龍茶)’ 라고 쓰는데, 그 ‘오룡’의 중국어 발음이 ‘우롱’이라 ‘우롱차’다. 이름에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 한 농부가 차나무 무더기를 발견해 따려고 다가갔는데 검은 뱀이 차나무를 휘감고 있는 것을 봤다. 중국인은 본디 뱀을 싫어한다. 그래서 ‘검은 뱀’ 대신 ‘까마귀처럼 검은 용’이라 미화시켰고, 여기서 ‘오룡차’라는 이름이 생겼다. 우롱차는 특히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우롱차 한잔을 내려주는 장면을 보며 영화 <기생충>의 그 유명한 대사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하고 감탄을 내뱉은 이유다.
▶우롱차는 한자 ‘오룡차’의 중국어 발음… ‘청차’ 가리켜
까마귀 ‘오’·용 ‘룡’… ‘까마귀처럼 검은 용’이란 의미
우롱차는 6대 다류 녹차, 백차, 황차, 청차, 홍차, 흑차 중 청차를 가리킨다. 녹차는 영어로 green tea, 백차는 white tea, 황차는 yellow tea라고 부른다. 모두 단어 그대로 영어로 번역했다. 그런데 청차는 blue tea가 아닌 ‘oolong tea’다. 왜일까?
서양에서 가장 흔하게 마시는 차는 홍차와 우롱차다. 1980년대 대만 사람들이 우롱차라는 이름으로 서구에 차를 대량 수출하면서 서양 사람들은 우롱차에 익숙해졌다. 대만 청차의 대부분이 ‘청심오룡’으로 만들어진 차라 그냥 우롱차라 불렀다. 차의 종주국이면서 청차도 가장 많이 생산했던 중국은 공산화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차 산업이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당연히 수출은 꿈도 못 꿨다. 그 틈을 대만이 파고들었고 그렇게 청차는 ‘우롱차’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홍차는 red tea가 아닌 black tea라 부르는데,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영국이 홍차를 수입할 때 영국에는 이미 red tea라 불리던 차가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수입한 루이보스티였다. 허브차의 일종인 루이보스티는 당시 영국에서 꽤 인기를 끌었는데 탕색이 붉어 rea tea라고 불렀다. 홍차를 들여오긴 해야겠는데 red tea로 들여올 수 없어 고민하던 영국인들은 찻잎이 검다는 의미로 black tea라고 명명했다. 다음에 다시 흑차 표기 문제가 생겼다. 흑차야말로 black tea가 아닌가. 고민하던 서구인들은 흑차에는 dark tea라는 이름을 붙였다. 엉망진창 차 이름 표기의 역사다.)
왼쪽 차는 민남우롱의 대표주자인 ‘철관음’. 오른쪽 차는 민북우롱의 대표주자인 무이암차 ‘육계’. 차는 산화도에 따라 탕색이 달라진다. 옅은 색 철관음은 산화도가 낮고 좀 더 짙은 붉은색 ‘육계’는 산화도가 높은 차임을 알 수 있다.
청차는 6대 다류 중에서 스펙트럼이 가장 넓다. 6대 다류를 가르는 기준은 제다방법과 산화도다. 그중 산화도만 따졌을 때 녹차는 비산화차, 홍차는 100% 산화차, 백차는 덖지 않고 그냥 시들리기만 해 아주 미약하게 산화된 차, 황차는 가볍게 민황(발효)한 차, 흑차는 제다 후 발효 과정을 거친 차 등 명확한 정의가 가능하다. 그러나 청차는 산화도 20~70%에 달하는 모든 차를 아우른다. 찻잎 색깔이 녹색일 수도, 황갈색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산화도가 낮을수록 찻잎 색깔이 녹색에 가깝고 산화도가 높을수록 찻잎 색깔이 진해진다).
청차는 전통적으로 중국 복건성과 광동성에서 만든다. 청차를 크게 4가지로 분류하는데, ‘민북우롱’ ‘민남우롱’ ‘광동우롱’ 그리고 ‘대만차’다. 모두 지역에 의한 분류다.
우선 민북우롱과 민남우롱. 여기서 ‘민’은 복건성을 가리킨다. 중국 남동부에 위치한 복건성은 바다 건너 동쪽으로 대만과 마주보고 있다. 청나라 때 대만은 복건성에 속한 부속섬이었다. ‘민’이 복건성이니 ‘민북’은 복건성 북쪽, ‘민남’은 복건성 남쪽이라는 의미다.
민남우롱의 대표주자로 안계철관음이 있다. 안계 지역에서 만드는 ‘철관음’이란 이름의 차다.
민북우롱은 보통 ‘암차’라고 불리는 ‘무이암차’를 가리킨다. 복건성 북쪽에 중국 차의 아주 중요한 산지인 무이암산이 자리한다. 원래 이름은 무이산. ‘암’이라는 단어가 붙은 데서 볼 수 있듯, 사방천지에 바위가 널린 산이다. 그 무이암산에서 자라는 차나무로 만든 차가 바로 ‘무이암차’다. 무이암차는 최고급 녹차 다음 ‘두 번째쯤 비싼 차’로 꼽힌다. 차는 와인처럼 생산 지역이 좁게 규정될수록 가격이 더 비싸진다. 무이암산 중에서도 가장 좁은 단위가 ‘정암’, 정암 주변을 둘러싸는 지역이 ‘반암’, 반암 주위 산 중턱 아래로 내려오는 지역이 ‘주차’, 무이산이 아닌 무이산 주변을 ‘외산’이라 부른다. 당연히 가격은 정암차가 가장 비싸고 반암, 주차, 외산으로 가면서 낮아진다.
갑자기 ‘나도 그 비싸다는 암차 한번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터. 그렇다고 찻집에 가서 “암차 주세요”라고 하지는 말 것. 전통차를 판매하는 곳에서도 암차를 취급하는 곳은 많지 않다. 또한 암차는 무이암산에서 나는 차를 통칭하는 용어일 뿐이다. 암차의 종류만도 수십 가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암차로 ‘대홍포’ ‘육계’ ‘수선’ 등이 있다. “암차 있나요? 육계 마셔보고 싶어요.” 이 정도는 얘기해야 ‘차 좀 아시는 분’이 된다.
청차는 동글동글 말려 있는 ‘구슬’ 형태가 대부분이다.
▶우롱차의 대표주자 ‘무이암차’… 무이암산에서 생산
‘대홍포’ ‘수선’ ‘육계’ ‘철라한’ 등이 대표적인 무이암차
지금이야 코로나19로 다 끊어졌지만 중국 패키지 여행 프로그램을 잘 뜯어보면 ‘무이산 패키지’라는 것이 있다. 무이산은 차와 상관없이도 중국 10대 명산으로 꼽히는 산이다. 무이산의 계곡, 봉 등 여러 절경을 둘러보고 차밭도 함께 돌아보는 패키지다. 그중 하루 저녁에는 공연을 보는데 <붉은 수수밭>으로 유명한 장예모 감독의 <인상대홍포>라는 공연이다. 3000여 석의 의자가 놓인 객석이 무대 주위를 360° 뱅글뱅글 돌아가는 야외 공연장에서 수백 명의 출연진이 나와 펼치는 공연은 엄청난 장관이다. 무이산 옥녀봉과 대왕암의 유래, 무이산을 대표하는 차인 대홍포에 대한 이야기 등을 담은 공연이 끝난 후에는 대홍포 시음 시간이 이어진다.
광동성에서는 어떤 청차를 만들까. 복건성 북쪽에 무이산이 자리한 것처럼, 광동성에는 봉황산이 자리 잡고 있다. 봉황산에서 만들어내는 청차를 ‘봉황단총’이라 한다. ‘봉황우롱’이 아니고 ‘봉황단총’? ‘단총’은 ‘자연적인 수정에 의해 잡종이 생기지 않도록 주위 환경을 조성해, 한 종류의 나무에서 채엽한 찻잎으로 만든 차’라는 의미다. 봉황단총을 만드는 품종은 모두 수선이다(무이암차에서 나왔던 그 수선 맞다. 수선화 할 때 수선(水仙)과 한자가 같다). 봉황단총은 향에 따라 ‘봉황단총○○향’ 같은 식의 이름으로 구분한다. 가장 유명한 것이 ‘오리똥 향’이라는 뜻의 ‘압시향’이다. 진짜 오리똥 향이 나서 ‘압시향’이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차가 너무 좋아 ‘오리똥 향이 나니 관심두지 말라’ 해놓고 몰래 마시려고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설도 있다. 이 외에도 ‘계화향’ ‘말리향(재스민향)’ ‘지란향’ ‘강화향(생강향)’ ‘유화향’ ‘밀란향’ 등 다양한 봉황단총이 존재한다.
그리고 마지막이 대만 차다. 오늘날 청차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대만에서 생산되는, 흔히 ‘대만 차’라고 불리는 차다. 대만에 여행 간 사람들이 주로 구입해 오는 ‘동방미인’이니 ‘아리산 고산차’니 하는 차들이 다 대만청차다. “오홋 대만 차 궁금해~” 하시는 분들, 대만 차는 다음 회 대만 영화 <음식남녀> 편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니 기다려주시길!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편집장 sky6592@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