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편리한 도구와 뛰어난 기계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인간(Human)의 시대가 끝나고, 인류가 인간·기계 결합체인 사이보그로 진화하는 포스트휴먼(Posthuman) 시대에 돌입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흔하다. 온종일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사는 호모 텔레포네스(Homo Telephones)의 삶을 떠올려 보면 과장만은 아니다.
그러나 정보 습득, 인간관계, 금융거래, 공적 활동, 사회 운동, 쇼핑, 길 찾기 등 생활 전체를 자동화 알고리즘을 통해서, 또는 인공지능에 의존해서 처리하는 호모 텔레포네스의 삶은 정말 괜찮은 것일까. 좋은 것은 늘 나쁜 것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구글, 카카오, 네이버, 페이스북, 유튜브 등에 중독될수록 우리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없을까. 미국의 미래학자 니컬러스 카는 <유리 감옥>에서 자동화 기계와 결합한 인간이 더 큰 자유를 누리기는커녕 기계 감옥에 갇혀서 작은 변화조차 스스로 해결할 줄 모르는 수동적 상태로 퇴화해 버렸다고 주장한다. 단순 작업이나 반복 절차를 기계에 맡기면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사실이다. 그러나 일찍이 테일러 시스템이 보여주었듯이, 기계의 효율에 맞추어 일하도록 하면 인간은 견딜 수 없다. 카카오나 쿠팡 등과 같은 플랫폼업체 노동자나 택배업체 노동자는 최근의 선명한 사례이다. 기계는 지치지도 잠들지도 않으나, 인간은 일정 시간 일하면 피로한 몸을 재생하고 소진된 마음을 달래야 다시 일을 할 수 있다. 더욱이 플랫폼 노동자들은 강도 높은 일자리 불안에 시달린다. 위험과 격변에 노출된 생명체가 스트레스로 괴로워하는 것처럼, 인간 역시 일상이 모험이 되면 불안에 쫓긴다. 인간 생리를 고려하지 않는 알고리즘의 무자비한 규칙에 목숨을 내맡긴 채 일을 구걸해야 하는 일자리 난민의 생활은 인간 마음에 좌절, 치욕, 분노 등을 치솟게 한다.
게다가 기계는 ‘무어의 법칙’에 따라 가속적으로 효율이 높아지지만, 인간은 ‘다윈의 법칙’을 좇아서 천천히 진화한다. 따라서 기계의 효율에 맞추도록 강요하면, 인간은 병들거나 죽을 수밖에 없다. 육체 건강만 문제는 아니다. 디지털 기기를 통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업무지시는 인간의 정신 건강을 완연히 파괴한다. 결과는 인간 파멸이다. 게오르크 뷔히너는 <보이체크>에서 약육강식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살인적 사회체제가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보이체크는 아내 마리, 아들 크리스티안과 함께 사는 가난한 소시민이다. 말단 병사인 그는 중대장 이발사 노릇을 하면서 언어폭력에 괴롭힘당하고, 의사의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한 달 내내 완두콩만 먹는 등 힘겹게 생계를 꾸려 간다. 심지어 집에 들러서 휴식을 취할 짬도 없을 정도다. 끝없이 그를 몰아붙이고 조롱하는 상관의 극악한 폭언, 그가 죽든 살든 과학 성과만 따지는 의사의 잔혹한 실험이 그의 몸과 마음을 좀먹으면서 보이체크는 서서히 환청과 환각에 빠져든다. 여기에 역시 가난에 지친 마리가 선물 공세를 펼치는 군악대장의 유혹에 넘어간다. 마지막 희망마저 빼앗긴 보이체크는 광기를 이기지 못하고 아내를 살해한 후 물에 빠져 죽는다. 피와 살의 한계 이상으로 인간을 몰아붙이는 노동체제를 뷔히너는 ‘노동을 통한 살인’이라고 부른다. 보이체크는 마음 편히 일하고 안식할 수 있는 삶을 빼앗긴 뿌리 뽑힌 인간의 원형이다. 뷔히너는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의 삶 속으로 침잠”해 보라면서 모든 걸 빼앗긴 인간이 가져오는 광기와 폭력, 살인과 죽음의 연쇄 반응을 경고한다.
호모 텔레포네스의 삶에는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카에 따르면, “디지털 기기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무기력해진다.” 컴퓨터를 ‘만능열쇠’로 여기기 때문이다. 한 문학 교수는 “컴퓨터가 고장 나거나 인터넷 접속이 되지 않을 때, 두 손이 모두 절단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기계의 가속적인 진화에 적응하는 데 너무 에너지를 쏟는 바람에 점차 기계 없이 사는 법을 망각하는 중이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은 말한다. “인간이 기계를 만들고, 기계가 생활을 만든다. 일상이 계산으로 움직이면, 인류는 자잘한 합리의 감옥에 갇힌다.” 이 감옥은 인간에게서 창조적 진화에 필요한 힘, 즉 생각하는 힘을 빼앗아 간다.
사람들은 흔히 인공지능이 대단히 똑똑하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데이터 처리 효율엔 차이가 있으나, 슈퍼컴퓨터는 근본적으로 주판이나 계산기와 다르지 않다. 주판이나 계산기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도 생각하지 못한다. 정해 둔 알고리즘에 따라 입력 정보를 계산해서 단순히 출력할 뿐이다. 구글을 보라. 수많은 CPU를 병렬로 연결한 연산 능력을 보유 중이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검색하면 몇 번을 물어도 ‘결과 없음’이라는 답을 ‘똑같이’ 내놓을 뿐이다. 아마도 인간이라면 ‘모른다’라고 하지 않고, 추측하고 상상해서 매번 다른 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지도가 없어도 길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다. 모든 생명체는 답이 없을 때도 살아야 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도 목적지를 향해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며, 감지할 수 없는 것을 느낀다. 생각이란, 답이 없을 때 답을 만듦으로써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행위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현재에서 미래를 찾지 않고, 미래에서 현재를 빚어낸다. 생각이란 허구를 바탕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그 낯선 이해를 징검다리 삼아 답 없는 현실을 건너가는 힘이다. 인간은 생각을 통해 우리 안에서, 또 세계 속에서 가능성을 끄집어낸다. 이것이 우리가 똑똑하다고 부르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 지능과 반대로 작동한다. 인공지능은 우리 안의 가능성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가령, 넷플릭스의 추천 엔진이 제안하는 영화는 아무리 만족스럽더라도 어제의 내 선택을 반복하는 것이거나, 그들이 비싸게 사들여 수익을 뽑아내야 하는 영화일 뿐이다. 카의 말처럼, “그들은 인간이 엉뚱한 행동보다 예측 가능한 행동을 더 선호하리라고 가정한다.” 다른 엔진도 별다르지 않다. “자동화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더 쉽게 얻을 수 있게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가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인공지능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반복해서 강화할 뿐이다. 거기에 맞춰 살면 어제 한 일을 오늘 또 하도록 몰아가는 강박, 즉 중독에 빠진다.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에서 애덤 알터는 현대인이 일종의 ‘디지털 마약’에 중독되어 있다고 말한다. 디지털 기기는 자동화 알고리즘에 따라 인간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고 조작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을 돌보는 능력을 빼앗고 제품 사용을 멈출 수 없게 만든다. 행위 중독은 호모 텔레포네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다. 행위 중독에 빠진 인간은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잊고 눈앞의 쾌락에 중독되어 결국 파멸한다. 파산할 줄 알면서도 주문을 멈출 수 없는 쇼핑 중독자처럼 말이다. 호모 텔레포네스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익숙한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는 능력이 약해져 있기에, 이들은 인생이 정해진 경로 바깥으로 떨어졌을 때 당황할 뿐 잘 대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해진 길이 막혔을 때, 궁리를 통해 벽을 문으로 바꾸는 힘 없이 인간은 살 수 없다. 단테가 <신곡>에서 보여주듯, 인간의 위대함은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지옥에서 천국으로 여행할 줄 아는 상상력에 달려 있다.
알고리즘의 쾌락에 중독돼 해롱거리는 호모 텔레포네스의 삶 대신 몸을 던져 새로운 경로를 개척하는 순례자의 삶을 살아갈 때, 인간은 아름답게 빛난다. 시인은 말한다. “지금 나에게는 칼도 경(經)도 없다./ 경(經)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황지우, ‘503’) 경(經, 알고리즘)이 답을 내놓지 않을 때 스스로 길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알고리즘 시대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