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과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프랑스의 욕망이 뒤엉킨 세기말 이벤트이자 세계사적으로 한 획을 그은 사건이기도 하다. 당대 세계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에펠탑이 세워졌고, 예술로 세계 최고를 이룩하겠다는 야심에 빛나는 대궁전 그랑팔레도 위상을 뽐냈다. 이 두 걸작은 120여 년이 흘렀지만, 2024년 파리올림픽에서도 여전히 파리의 중심을 차지했다. 혹자는 말한다. 조상 잘둔 덕에 지금 잘 먹고 산다고. 하지만, 만국박람회가 남긴 유산이 상징적인 건축물만 있는 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그래서 치명적인 무엇이 두 번의 박람회를 계기로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프랑스라는 품격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신기루. 지금도 수출 물량 2위를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 산업의 비밀 병기. 바로 향수로 필두로 한 프랑스의 뷰티산업이다.
프랑스의 뷰티산업은 만국박람회를 통해, 전 세계 여성들의 욕망으로 성장한다. 화려한 귀족문화가 혁명의 정신처럼 대중에게 확산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중심에는 프랑스 럭셔리 향수의 대명사 겔랑(Guerlain)이 있다. 1828년 피에르 프랑수아 파스칼 겔랑이 히볼리(Rue de Rivoli)가 에 첫 부티크를 열며 시작된 겔랑의 역사는 1853년 나폴레옹 3세의 향후 외제니(Eugenie de Montijo)에게 헌정되며 황후의 향수라는 별칭을 얻은 ‘오 드 코롱 임페리얼’을 출시하며 당대 최고의 향수로 자리잡는다. 특히나, 외제니 황후는 프랑스 럭셔리 산업을 정의 내리는 데 있어 상징적인 인물이란 점에서 겔랑은 유럽 상류층의 주목을 받는다. 외제니 황후는 궁정 쿠튀리에(couturier)를 임명해 자신만의 옷을 디자인하게 하며 오트쿠티르(Haute Couture)의 시작을 열었고, 커스터마이징된 겔랑의 향수를 뿌렸으며, 여행을 떠날 때 드레스와 보석, 향수를 실어 나를 가방을 납품한 상점이 루이 비통의 출발이었고, 그녀로부터 거북 등껍데기로 만든 머리빗과 자수정과 금을 조합한 파뤼르(Parure, 보석세트)를 주문받으며 탄탄한 사업 입지를 다진 브랜드가 바로 까르띠에(Cartier)다. 루이 15세의 정부 마담 퐁파두르, 로코코시대 화려함의 대명사 마리 앙투와네트, 프랑스혁명과 함께 등장한 파리 사교계의 미녀 조제핀 드 보아르네에 이어 외제니 황후까지. 이들이 애용한 프랑스 상품은 유럽 최상류 계층의 머스트 잇 아이템, 럭셔리의 기준이 된다. 요즘 표현으로 셀럽 마케팅의 정수다. 그중 셀럽의 이미지를 만드는 가장 럭셔리한 아이템, 바로 향수다. 향수의 출발은 악취를 지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흑사병이 물을 통해 전염된다고 오해한 유럽인들은 귀족이나 왕족들마저도 세안과 목욕을 꺼렸으며, 몸에서 심한 악취가 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용하게 된 향수는 하얀 얼굴을 강조하는 색조 화장만큼이나 계급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노동자의 검게 그을린 피부 대신 하얗고 핏기 바랜 피부를 원했던 귀족들을 위해 발전한 색조 화장만큼 향수는 귀족문화의 정수였다. 특히, 비누와 목욕의 발달로 악취가 사라지자, 향수는 몸으로 표현하는 시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해가 지고 아직 별이 뜨기 전, 하늘이 푸르게 물들어 가는 시간”을 표현한 뢰르 블뢰(L’heure Bleue), “여성의 피부에서 나는 몽환적인 향기”를 상징하는 미츠코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상류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향수가 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급속도로 퍼져 나가며 프랑스의 뷰티산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겔랑이 1889년 박람회 기간 출시한 향수 지키(Jicky)가 현재까지도 단종되지 않고 판매되는 가장 오래된 향수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 해 박람회에는 겔랑 이외에도 피베(Piver), 겔레(Gelle… e), 우비겅(Houbigant), 오리자(Oriza) 등 명품 뷰티업체들이 참가하는데, 이들이 이듬해 결성한 프랑스 향수산업연합(Chambre syndicale de la parfumerie française)은 프랑스라는 이미지를 흠모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환상을 세계인에게 각인시킨다. 프랑스 뷰티 산업의 동력은 그렇다고 겔랑과 오리자 등 전통적인 명품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시로선 혁신적인 스타트업 제품들이 성장을 견인한 측면이 크다. 바로 과학과 결합한 새로운 스킨 케어 제품의 출시가 그것이다. 이전까지는 계급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색조 메이크업이 화장의 중심이었다면, 20세기 초 프랑스 기업들로 인해 여성다움 자체를 끌어 올리기 위한 스킨 케어가 업계의 화두로 자리매김한다.
1909년 화학자 외젠 슈엘러가 단돈 200프랑으로 창업하며 화학적 기술을 적용하여 안전한 염색을 추구한 제품은 혁신과 진보의 아이콘이 되어 현재 전 세계 최대 화장품 브랜드로 성장한다. 바로 로레알이다. 미국의 대표 뷰티기업 코티(Coty)의 출발도 프랑스다. 1904년 조향사 프랑수와 코티가 출시한 향수 라 호즈 자크미노(La Rose Jacqueminot)는 향수 시장의 본격적인 중저가 시대를 연다. 모두가 바라만 보던 제품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확장하면서도, 명품이라는 프랑스의 가치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점이 바로 로레알과 코티가 세계 최고의 뷰티 브랜드로 현재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다.
백 년 아성 프랑스 화장품 업계의 영향력을 비집고 작은 변화가 감지된다. 20세기 초 미용을 귀족에게서 대중에게로 확산시켰던 프랑스인들의 열정을 뛰어넘는 제품들이 보인다. 단오날 창포물로 머리를 감고 창포 이슬을 화장수로 쓸 만큼 예부터 자연주의 화장법을 추구해 온 역사적 전통이 있는 나라의 제품이다. K-뷰티. 한류 또는 K-컬처라는 영향 아래, 우리 화장품의 위상이 날로 커지고 있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다. 배르나르 아르노의 박물관이라는 불리는 파리 쇼핑의 중심, 사마리텐 백화점은 2024년 12월 한국 기초화장품 제품들을 모아 ‘스타일 코리아’라는 특별 매장을 구성했다. 우리의 화장품이 뷰티의 수도 파리에서 그것도 LVMH의 심장에서 인정받았음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만국박람회의 향기가 전 세계 여심의 마음을 파고든 것처럼, 기술과 진보로 무장한 우리의 에센스들이 세계인의 얼굴을 광채로 빛낼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20세기 초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K-뷰티의 인기도 21세기 우리 문화의 경쟁력을 든든한 배경으로 두고 있다. 힙하다는 한국 문화의 이미지처럼 힙하게 성장하길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