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개봉 30주년인 영화 ‘쇼생크 탈출’의 원제는 ‘The Shawshank Redemption’입니다. 영단어 ‘Redemption’은 되찾음, 구제(救濟), 구원 등을 의미하므로 직역하면 ‘쇼생크 구원’이 원제에 가까운 번역이겠지만 한국어판 제목은 종교색이 제거된 ‘탈출’이었습니다. 구원(Redemption)이란 단어에 집중하면서 ‘쇼생크 탈출’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조망해볼까 합니다. 쇼생크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을 ‘성경 속의 예수’로 바라보고자 합니다. ‘쇼생크 탈출’은 앤디를 예수의 현대적 버전이며 이 영화는 관객에게 하나의 종교적 체험을 주기 때문입니다. 깊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1948년 은행 임원 앤디 듀프레인이 미국 메인주의 중범죄자 감옥 쇼생크에 수감됩니다. 앤디는 20대 나이에 출세한 부행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와 아내의 정부(情夫)를 살해한 혐의로 누명을 썼습니다. 아내 몸에 네 발, 정부 몸에 네 발의 총알을 박아 넣은 젊은 은행가를 언론들은 “남녀평등 살인마”라며 대서특필합니다. 법정에 선 앤디는 “둘을 쏴죽이고 싶었지만 실행하지 않았다”며 무죄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모든 정황은 앤디를 불리한 방향으로 몰고 갔습니다.
‘두 번의 종신형’을 선고받은 앤디는 감옥에서 고통스런 삶을 보냅니다. 그는 교도소장 노튼의 돈세탁, 간수 해들리의 세금신고를 대신 해주며 신임을 얻습니다. 그러나 노튼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줄 단 한 번의 기회까지 박탈하며 그를 철창 안의 강아지처럼 대하자, 앤디는 몰래 준비했던 탈옥을 감행합니다. 수감 26년 만이었습니다. 훗날의 탈옥을 꿈꾸며 작은 돌망치(록 해머)로 탈출로를 만들었던 것이지요. 수감생활 내내 앤디를 도왔던 조력자 레드는 가석방 후 멕시코의 한 해변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앤디는 자유를 찾은 앤디와 재회하며 환하게 웃습니다. ‘쇼생크 탈출’은 이같은 줄거리를 모두가 기억하는 영화입니다만 종교적 장치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쇼생크 탈출’이 종교적인 체험을 관객에게 제공하는 하나의 증거는, 지붕 위 죄수들이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결정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앤디는 지붕 위에서 간부 해들리의 골치 아픈 상속세 문제를 해결해주고는 그 대가로 동료들이 마실 ‘맥주 3병씩’을 지급받습니다. 이 장면은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죄수들에게 선물하는 앤디의 마음을 그려내지요.
원작소설을 세밀하게 읽어보면 지붕 위 죄수의 인원이 정확히 열두 명입니다. 저 숫자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앤디와 함께 앉은 죄수 12인은 맥주를 즐기는데, 이는 성경 속 예수가 열두 제자에게 포도주를 나눠줬던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앤디는 맥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내 아버지의 나라(천국)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태 27:29)라고 말했지요. 아직 천국(탈옥의 성공)에 당도하지 못한 앤디가 맥주를 마시지 않는 상황과 동일합니다.
무죄인 앤디가 유죄를 선고받은 죄수들과 한 공간에 거주하며 자유를 갈구하는 ‘쇼생크 탈출’의 설정은, 원죄가 없는 예수가 원죄를 가진 인간들과 지상에 거주하면서 천국을 갈망하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치환됩니다. 가석방조차 불허되는 종신형 상태에서의 공간은, 그 자체로 죄인인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세계의 은유로 읽히기도 합니다. 쇼생크에서 주목할 포식적인 악인은 교도소장 노튼입니다. 앤디가 쇼생크의 예수라면 노튼은 쇼생크의 본디오 빌라도에 가깝습니다. 노튼은 입버릇처럼 ‘성경과 규율’을 입에 올리지만 예수를 핍박했던 빌라도처럼 위선자였으니까요. 구휼에 사용할 성전자금을 착복하고 과도한 세금을 걷어 유대인의 반감을 샀던 본디오 빌라도의 현대적 인물이 노튼인 셈이지요.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앤디의 취미까지도 곱씹어보게 됩니다. 앤디는 자연물인 암석을 다뤄 조각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원래 직업이 목수였던 나사렛 시절의 예수와 다르지 않습니다.
역겹고 더러운 오물이 가득한 하수구를 앤디는 500m쯤 기어갔습니다. 죽음의 길을 뚫고 탈옥한 앤디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은 멕시코의 지와타네호(湖) 인근 마을이었습니다. 영화엔 나오지 않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지와타네호 역시 종교적 의미가 깊습니다. 앤디는 수감생활 내내 자신을 도왔던 친구 레드에게 말합니다. “(지와타네호는) 태평양 연안이야. 멕시코 사람들이 태평양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 그 바다에는 기억이 없다고 하지. 나는 그곳에서 삶을 마치고 싶어.”(113쪽)
소중한 뭔가를 성취하고자, 혹은 간절한 상황에 가닿고자 지와타네호로 향하는 게 아니라 기억을 잊고 삶을 끝내고 싶은 장소로 가려 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왜 그럴까요. 종교적 측면에서 인간의 삶이란 죄의 연속이지요. 기억을 잃는다는 건 죄로부터의 해방, 즉 구원의 정신적 상태를 뜻합니다. 죄의 기억을 씻은 듯이 망각할 만한 절대적인 장소는 인류의 상상력 속에선 내세, 즉 천국뿐이었습니다. 쇼생크에서 탈출해 하수구(고통의 골고다)를 지나온 앤디에게 지와타네호는 천국의 갈릴리와 같습니다. 그렇게, 앤디는 천국으로 가고, 레드 역시 앤디의 인도를 따라 지와타네호로 향합니다.
그렇다면 레드는 누구일까요. 또 레드는 감옥 벽의 시멘트를 부술 작은 돌망치를 앤디에게 주며 그를 도운 결정적인 인물입니다. 레드가 준 돌망치는 앤디에게 그저 작은 망치가 아니었고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열쇠’였습니다. 열쇠의 종교적 의미를 사유해볼까요. 성경에서, 예수의 제자 베드로의 상징이 바로 열쇠였습니다. 성경 속 예수는 시몬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내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 16:19) 가톨릭에서 교황은 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뜻하고, 베드로는 ‘초대 교황’으로 추존됩니다.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가진 자’여서, 열쇠는 교황의 상징이기도 하지요. 교황을 그린 중세 회화에 열쇠가 자주 등장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처럼 레드는 열쇠(돌망치)를 앤디에게 건네고 함께 천국으로 갑니다.
앤디가 사라진 뒤 극도로 분노한 교도소장 노튼은 앤디의 방 벽면에 걸린 여배우의 포스터 사진에 돌을 힘껏 내던집니다. 앤디가 탈출로를 은폐하고자 붙여둔 포스터를 뚫은 건 앤디가 돌망치로 만든 돌조각이었습니다.
돌조각이 종이 재질의 포스터를 뚫고 앤디가 사라진 탈출로(터널)로 굴러 떨어집니다. 그때 노튼은 앤디가 그 터널을 통해 탈옥했음을 깨닫게 되지요. 그런데 이때, 영화에서 중요한 두 개의 숏이 이어집니다.
이 장면은, 소설에선 노튼이 종이 포스터를 거칠게 찢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영화에선 노튼이 검지손가락으로 포스터에 ‘구멍을 직접 뚫어’ 확인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이는 성경 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는 자신의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 20:27)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해 예수의 상흔을 직접 만져보려 했던 성경 속 도마처럼 앤디의 부재(자유의 회복)를 믿지 못했던 노튼은 직접 손가락으로 확인하려 했습니다. 이건 하나의 종교적 체험을 관객에게 주지요.
노튼과 간수 해들리, 그리고 레드는 앤디가 사라졌음을 터널을 통해 깨닫습니다. 세 사람을 비추는 카메라 앵글은 터널의 바깥이 아니라 ‘터널의 안쪽’입니다. 세 사람이 터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연기처럼 사라진 신이 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것은 뭘 의미할까요. 성경 속 예수가 사라진 직후 동굴무덤을 바라봤던 제자들을 ‘신의 시선’에서 보는 건 아닐까요.
‘신의 시선’이 그려진 건 이뿐만이 아닙니다. 탈옥에 성공한 앤디가 빗물 아래서 두 팔을 활짝 펼치는 모습은 영화 ‘쇼생크 탈출’ 최고의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이 장면의 카메라 앵글도 하늘에서 지상의 앤디를 바라보도록 설정됐습니다. 이것 역시 신의 시선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앤디는 돌망치를 성경 안에 숨겼습니다. 두꺼운 성경 안에 망치 모양의 홈을 파서 그곳에 숨겼지요. 돌망치를 숨긴 성경을 펼쳤을 때 보이는 구절은 엑소더스(Exodus), 즉 ‘출애굽기’였습니다. 앤디는 구원의 열쇠를 손에 쥔 예수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영화의 레드)를 애굽(이집트) 땅에서 탈출시켰던 모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