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명저 ‘장미의 이름’, 많은 분이 기억하실 겁니다. 이 작품의 핵심 문장은 바로 다음 문장이지요. “아드소,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897쪽).
윌리엄 수도사와 함께 한 수도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뒤쫓는 베네딕토회 소속 18세 수련 수사 이름이 아드소였습니다. 소설은 1980년, 영화는 1986년 우리 곁을 찾았는데 둘 다 시대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내적인 진동이 큰 불멸의 책입니다. 오늘은 ‘장미의 이름’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때는 1327년 가을, 이탈리아 북부의 한 수도원에서 초유의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한 젊은 수도사가 절벽에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불명확했습니다. 윌리엄과 조수 아드소는 문제의 수도원으로 가서 숨겨진 단서를 추적합니다. 타고난 합리성과 추리력을 가진 윌리엄은 난수표 같은 정황 속에서 사건의 본질과 근원에 다가서려 하고, 아드소는 그런 윌리엄을 곁에서 보조합니다. 하지만 검은 장막 뒤의 범인은 두 사람을 위협하지요. 이미 많은 분들이 본 작품일 테니 결론부터 되짚는다면 범인은 인간의 ‘웃음’을 전면 부정하려 했던 노인 수도사 호르헤였습니다.
호르헤는 잘못된 신념을 가진 위험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강조합니다. “인간의 웃음이 신성(神性)을 위협한다.”
호르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을 주제로 저술한 ‘시학(詩學) 제2권’의 유일한 필사본의 페이지마다 비소(독)를 묻히고, 이 책을 읽으려는 젊은 수도사를 침묵 속에서 살해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시학 제2권’은 ‘희극’에 대한 책인데, 이 책은 우리가 사는 실제 현실에서도 그 내용이 추정되기만 할 뿐 현존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시학’은 ‘비극’만 다룹니다.) 기호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시학 제2권’이란 저 미지의 숙제를 ‘장미의 이름’을 통해 명쾌하게 풀어냈습니다. 소설 ‘장미의 이름’은 900쪽이 넘는 장편입니다. 긴 분량 전체를 두 시간 남짓한 영화에 전부 구현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겁니다. 따라서 소설엔 나오지만 영화에선 삭제된 내용을 일일이 비교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고, 아래 글에선 두 개의 주제를 중심으로 ‘장미의 이름’을 추념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가짜 그리스도’, 다른 하나는 ‘창조로서의 성(性)’입니다.
영화 ‘장미의 이름’에는 ‘가짜 그리스도’가 두 차례 언급됩니다. 도입부에서 윌리엄이 “적(敵)그리스도에 대한 풍문을 경계해야 한다”고 아드소에게 말하는 대목이 먼저이고, 이후 호르헤가 젊은 수도사들 앞에 서서 “수도원 살인사건은 해결되었다. 적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성한 수도원에서 추방되었다”고 거짓으로 선언하는 장면이 후반부에 나옵니다. 하지만 원작에선 호르헤와 윌리엄 간의 가짜 그리스도(적그리스도) 논쟁이 수십 페이지에 걸쳐 반복 서술되고 있습니다. 원작 ‘장미의 이름’의 핵심 주제가 가짜 그리스도임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대목이지요. 좀 더 깊이 살펴볼까요. ‘가짜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호르헤와 윌리엄은 극단적으로 불화합니다. 호르헤가 보기에, 가짜 그리스도는 “신성을 모독하는 허깨비”(746쪽) 전체를 의미합니다. 신의 숭고성을 저해하는 모든 건 ‘헛것’이며, 그건 신성을 깨부수는 이단이라고도 호르헤는 규정합니다. 특히 그에게 신을 수호하는 수도사들이 지켜야 할 절대적 규범이란 신성을 옹호하기 위한 결의의 자세, 즉 내적 엄숙주의뿐입니다. 결기 넘치는 엄숙을 위해선 절대 웃음이 부정당해야 한다는 논지였지요. 그는 인간의 웃음 자체를 제거하려 합니다. 호르헤는 그 이유를, 성경 속 예수의 모습에서 찾습니다. 호르헤 윌리엄에게 묻습니다. “그리스도가 웃지 않았다는 건 모르지 않겠지요?(253쪽)” 메시아 예수는 결코 웃은 적이 없으므로, 메시아처럼 살아야 하는 우리도 웃음을 거부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의 생각은 다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웃지 않았음이 사실인지와는 별개로, 윌리엄은 ‘예수가 인간의 웃음을 금하신 적도 없다’는 논지를 폅니다. 윌리엄이 보기에, 웃음은 인간적인 감정의 표출입니다. 웃음이란 ‘불합리한 명제의 권위’를 무력화하는 힘을 가졌고 또 인간의 허위의 가면을 벗길 수 있다고도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결론에 이르러, 호르헤는 장서관 화재 속에서 산화합니다. 비소가 묻은 ‘시학 제2권’을 한 장씩 찢어 자기 입으로 삼키고 결국 불속에서 타죽습니다. 호르헤는 자신의 신체를 비소 묻힌 책의 ‘무덤’으로 삼음으로써 웃음에 대한 고대의 지혜(아리스토텔레스)를 말살시켰습니다. 윌리엄은 그런 호르헤를 보며 아드소에게 “저 모습(호르헤의 광기와 광신)이 바로 가짜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가짜 그리스도는,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896~897쪽)
따라서 ‘장미의 이름’은 영화보다 소설에서 주제의식이 더 명확하다는 결론이 가능할 겁니다. 영화가 범인 호르헤를 추적하는 두 수도사의 추리 서사에 기대는 반면, 원작소설은 ‘우리 시대의 가짜 그리스도는 누구이고 또 무엇인가’를 정면으로 질문했기 때문입니다. 윌리엄의 저 말은 소설은 가짜 그리스도가 하나의 격(格)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심층 속에서 언제든 뛰쳐나올 수 있는 감정적 괴물 그 자체임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아드소는 수도원 주방에 잠입한 가난한 젊은 여성과 성관계를 맺습니다(여성의 이름이 영화에서 불분명하니, 이 글에선 A라고 지칭하겠습니다). 수도사들로부터 음식을 얻기 위해 주기적으로 몸을 파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A는 아드소를 본 뒤 매료돼 주방 바닥에서 몸을 섞습니다. 훗날 종교재판에서 A가 마녀로 몰려 화형 당할 처지에 놓이자 아드소는 A를 구하지 못하는 무력감에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영화에서 A의 등장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무명(無名)의 A가 느닷없이 틈입해 아드소와 교합하지 않더라도, 영화 서사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아드소의 심적 고통을 극대화하는 것 외에 A의 등장은 영화 ‘장미의 이름’ 전체적 주제와 전혀 연결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데, 젊은 10대 수도사 아드소가 자신에게 먼저 ‘달려드는’ 젊은 창부(娼婦) A와 수도원 안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선정성이 부각됩니다. 심지어 교황청이 보낸 이단심문관 베르나르도 귀가 몸수색을 이유로 별 이유도 없이 A의 상의를 직접 찢어 나체의 가슴을 수도사들(정확히는 이 영화의 관객들!) 앞에서 보이는 후반부 장면은, 영화 진행상 불필요하기에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저 숏을 보여줄 이유가 없으므로 이는 이 영화의 최대 단점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작소설 ‘장미의 이름’을 꼼꼼히 읽어보면 A의 등장은 불가피하며, 영화의 단점을 봉합합니다. 영화의 핵심 주제인 ‘인간의 웃음’, 그리고 ‘아드소와 A의 교합’이 상호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아래 두 문장을 살펴볼까요. 소설 중반부에서 아드소가 성교 사실을 고백하자 윌리엄은 아드소에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거니, 하느님께서 이 못난 것들을 그냥이야 창조하셨겠느냐? (중략)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나름의 갖가지 특권과, 광영 입을 그릇을 주셨을 거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469쪽)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모든 권력자가 여성의 존재를 부정할지라도, 여성 역시 신의 엄연한 창조물임을 윌리엄이 설파하는 대목이지요. 또 주목해서 읽어볼 소설 속 문장은 윌리엄이 호르헤에게 희극의 필요성을 힘주어 말하는 대목입니다. 윌리엄은 세빌리아 사람 이시도루스의 비유를 빌려 말합니다.
“희극이란 동정녀의 음란죄와 창부의 사랑이라던가?”(862쪽)
두 문장을 결합하면 호르헤가 금지하려 했던 ‘웃음’과 아드소와 A의 성교(사랑)는 서로 연결됩니다. 웃음도, 사랑도 결국 신의 창조 결과임을, 저자 움베르토 에코는 주장한 것입니다. 비극의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희극 없이는 삶이라는 고통을 이겨낼 수 없는 가련한 이방인들이 아니던가요. 아리스토텔레스도 윌리엄도, 그런 점에서 희극을 긍정합니다. 희극의 첫 글자 ‘희(喜)’에는 엄숙성을 깨부수는 웃음, 성교(사랑)를 통한 희열도 공히 포함될 겁니다. 웃음도 섹스도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감정적 행위임을 인정해야 함을, 저자 움베르토 에코는 윌리엄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윌리엄이 인간의 웃음을 막으려는 호르헤와 맞서 싸우는 이성적 철학자라면, 어린 아드소는 인간의 사랑(성교)를 금하려는 종교 전체의 교리에 대적하는 작은 몸짓의 다윗이었던 것이지요. 윌리엄은 그 싸움의 필요성을 스스로 인지하고 링 위에 섰으나, 아드소는 자신이 윌리엄보다 더 큰 싸움이 벌어지는 언덕에서 자신이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있었음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저자 움베르토 에코는 이 책의 제목 ‘The Name of The Rose’가 한 수도사의 오래된 시 ‘속세의 능멸에 대하여’에서 왔음을 후술한 바 있습니다.
저 시에는 ‘예전의 장미는 그 이름일 뿐, 우리에겐 그 이름들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적혀 있는데, 에코는 이 책 후기에서 “우리에게서 사라지는 것들은 그 뒤로 이름을 남긴다. 이름은, 언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존재하다가 그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까지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918쪽)고 썼습니다.
에코의 장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만을 의미하진 않을 겁니다.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까지도 우리에겐 모두 장미였으며, 이 책의 주제는 그러므로 인간이 상실한 그 모든 것들로 나아갑니다. 웃음도 사랑도 잊힐 뻔했던 인간의 영원한 가치를 ‘장미의 이름’은 복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