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판문점 경비대 B-2 초소 군인이 북한군 가-1 초소 경비명 두 명을 사살합니다. 한 명은 수차례의 격발로 ‘온몸이 골고루’ 산산조각이 났고, 다른 한 명은 어깨를 크게 다쳤습니다. 스위스 중립국 감독위원회 정보부의 여군 소령이 판문점에 도착하면서 조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초소에 있던 남북한 군인들에겐 자신들이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 있었지요. 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줄거리입니다. 2000년작인 이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은 거의 없을 테지요. 그날 벌어졌던 일의 ‘진실’을 모두들 목격하셨을 겁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박상연 작가의 소설 <DMZ>가 원작입니다. 1996년 민음사 문예지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박상연 작가는 1997년 이 소설을 장편으로 출간했고, 훗날 <고지전> <뿌리깊은 나무> <육룡이 나르샤> 등을 집필한 유명 각본가입니다.
장편소설 <DMZ>는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만음사가 이 책을 ‘오늘의 작가 총서’ 40번째 책으로 재출간했습니다. 책을 열어보니 영화엔 나오지 않았던 수십 수백 개의 또 다른 ‘비밀’이 발견됐습니다. (아래 내용엔 소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선 영화와 다소 다르게 표현되는 인물 한 명을 간단히 들여다봅니다. 소설 <DMZ>의 주인공은 스위스 중립국 감독위원회 소속 소령으로, 영화에서 이영애 배우가 맡았던 바로 그 역할입니다. 남한 측 수혁(이병헌)과 성식(김태우), 북한 측 경필(송강호)과 우진(신하균)의 만남과 갈등이 극의 주축을 이루는 영화와 달리, 소설 주인공은 스위스의 소령인 것이지요. 영화 속 소령 이름은 지그 베르사미이며, 무엇보다도 여성이 아닌 ‘남성’입니다.
소령 지그 베르사미는 이제 막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브라질 주재 스위스 외신 기자인 어머니와, 북한 인민군 출신으로 한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아르헨티나로 건너간 빨치산 남성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르사미는 대학을 중퇴하고 장교시험을 봐서 군인이 됐습니다. 스위스 출신인 어머니를 닮아 5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의 수재였기에 통역장교로 배치됐고 이미 한국에서 5년간 근무했던 수재였습니다.
소설 <DMZ>의 중심서사는 초소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베르사미 소령의 현재와, 그의 아버지의 과거가 뒤섞인 상태로 진행됩니다. 베르사미 소령의 아버지는 이경수(훗날 본명이 밝혀짐)로, 이경수는 인민군 출신이면서도 평생 김일성을 저주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스위스 아내 사이에서 낳은 아들 베르사미를 늘 못마땅해 했습니다.
베르사미는 아내 쿠비가 준, 아버지가 인민군 시절 썼던 일기장을 갖고 DMZ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넘었을 바로 그 장소였지요. 부친의 트라우마, 그리고 부친에 대한 베르사미의 트라우마가 소설의 절반에 가깝습니다.
소설 <DMZ>에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엔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다수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 가운데 한 가지 차이점만 이야기하려 합니다. 영화를 잠시 복습해보면, 북한군 측 우진이 초소에서 기르는 강아지 한 마리를 기억하시겠지요. 이 강아지 때문에 밀회가 발각될 뻔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 강아지는 큰 역할을 해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소설 <DMZ>에서 강아지(군견)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로 나옵니다.
일단 소설 속 수혁의 보직은, 영화와 달리 군견병입니다. 영화에선 북측이 개를 기르는데, 소설에선 남측이 개를 기르지요. 수혁은 DMZ를 수색하는 개를 보살피는 보직인데, 담당하는 군견 이름은 ‘마루’입니다. 초소 살인사건 이후 수혁이 조사 때문에 구금되자 군견 마루는 입에 물 한 모금조차 대지 않다가 결국 굶어 죽고 맙니다. 사실 수혁이 입대하기 전, 수혁의 선임은 마루를 장기 학대한 상태로 수혁에게 넘겼습니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을 군견에게 실행한 겁니다.
며칠 굶기자 마루는 아주 사나워졌습니다. 흥분한 상태로 먹이를 먹으려하면 선임이 몽둥이로 마루를 두들겨 패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손전등을 개의 눈에 비추며 천천히 먹이를 먹였습니다. 그 뒤로 마루는 손전등으로 불빛을 비춰야만 먹이를 먹었습니다. 수혁은 선임이 전역한 뒤 마루의 습관을 고치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마루는 여전히 수혁이 손전등을 켠 상태에서만 식사를 했지요. “손전등의 강렬한 빛이 비치지 않으면 식사를 안 했고,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처럼 손전등 불빛을 비추어도 침을 질질 흘리는 것은 물론이고요.” (217쪽, 남한군 수혁의 회고)
마루의 파블로프 조건반사 실험은, 소설에서 대단히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합니다. 수혁이 총격이 발생했던 그날 우진과 경필에게 총을 쏜 이유가, 바로 마루의 처지와 다르지 않았거든요. 좀 더 깊게 들어가 봅니다.
북한군 가-1 초소에 네 명의 남북한 남성이 모여 있습니다. 수혁, 경필, 우진, 성식.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기에 네 사람 모두 울적하고 아쉬운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최만수 상위(김명수)가 네 군인의 밀회를 목격하면서 갈등은 극에 달합니다. 여기까지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클라이맥스이지요.
그런데 소설에는, 최만수 상위와 같은 다른 인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영화엔 다섯 명의 핵심인물이 등장하지만, 소설에선 이미 언급된 네 명뿐입니다. 그러면 누가, 왜, 어떻게 가장 먼저 총을 뽑은 걸까요. 제일 먼저 총을 꺼낸 건 수혁이었습니다. 수혁이 총을 꺼낸 이유는 이랬습니다. 네 명의 군인이 모였던 깊은 새벽, 2㎞ 거리의 다른 초소에서 총성 한 방이 울렸습니다. 단순한 오발사고였는데, 네 사람이 88 담뱃갑을 뜯어 한 대씩 물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총성이 울리자 놀란 우진이 권총 지갑에 손을 대려 했고, 그 순간 속사수인 수혁이 더 빨리 권총을 뽑아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동작은 그야말로 반사적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네 병사의 예상 불가능했던 오해가 시작됩니다. 모두가 서로를 아끼지만 이데올로기 앞에서 실은 모두 적(敵)일 뿐이라고 오판한 것이었지요.
경필은 수혁을 말리려 합니다.
“수혁아…, 이해 못 하가서? 단순히 반사적으로 옆구리에 손이 간 것뿐이라는 거 모르가서…? 이건 그냥 무의식적인 거라 이 말이야….” (301쪽, 북한군 경필의 말)
그러나 수혁은 극단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총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때 경필의 손에서 뭔가가 반짝였습니다. 아마도 라이터로 추정되는데, 수혁은 그게 경필의 단도(短刀)라 생각하고 결국 경필 가슴에 방아쇠를 당겨버리지요. 경필이 총을 맞자 우진이 권총을 빼려 했고, 이 모습을 본 성식이 더 빠르게 우진에게 총을 먼저 쏘면서 초소는 아수라장이 됩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진의 몸에는 13발의 총알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게 사건의 전말입니다. 이후 북한군은 특수부대원 북파설을, 남한군은 남파부대원 납치설을 주장합니다.
영화와 소설은 이처럼 결이 다르지요. 저자 박상연 작가는 인근 초소에서 들린 오발사고 소리를 바로 “이데올로기의 총소리”로 표현합니다. 고작 50m 남짓한 거리에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네 명의 군인은, 서로가 별반 다를 바 없는 동족의 젊은이란 걸 알면서도, 국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지요. 오발사고의 총성은 네 사람에게 불현듯 의심을 심어주었고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기게 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총소리’는 수혁이 기르던 개 마루의 처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마루가 손전등을 비추면 먹이를 먹는 행동을 반사적으로 했던 것처럼, 우진과 수혁과 경필과 성식도 총소리가 들린 직후 반사적으로 행동한 것이니까요. 수혁의 선임은 곧 수혁에게 반사적으로만 행동하는 개를 물려주었고, 국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최전방 젊은이들에게 이데올로기적 대치 상황을 물려줬습니다. 군견병 마루는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젊은이들의 이데올로기 콤플렉스의 상징인 것이지요.
초소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주체는 스위스 중감위에서 나온 베르사미 소령입니다. 그런데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베르사미 소령에겐 인민군 출신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일기장에도 ‘이데올로기의 총소리’와 똑같은 상황이 있었지요. 거제 포로 수용소에서 반공 포로와 공산 포로의 패싸움이 벌어졌을 때, 공산 포로 행동대장이던 베르사미의 아버지 이경수(본명 이연우)는 저 멀리서 ‘그 소리’를 듣자마자 적개심에 휩싸여 피붙이 동생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말았습니다.
파블로프의 실험을 당한 군견 마루, 2㎞ 인근 초소에서 들린 오발사고 총소리 직후의 수혁,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졌던 베르사미 부친의 동생 살인은 따라서 동일한 맥락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엮이는 것이지요. 이것이 박상연 작가가 <DMZ>를 통해 이룬 성취입니다. 책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더 많습니다. 경필이 제거해준 수혁의 지뢰가 실은 ‘폭발지뢰’가 아닌 ‘조명지뢰’여서 행여나 터지더라도 별일 아니었기에 경필이 기꺼이 지뢰를 해체해줬다는 점, 정우진이 김일성대 외교학부 출신이란 점, 어리바리한 성격으로 그려지는 성식이 실은 서울 명문대 단과대 운동권 학생회장 출신이란 점도 기술됩니다. 특히, 포로수용소에서 베르사미의 부친 이연우가 들은 ‘그 소리’가 무엇이었는지는 책에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김유태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1호 (2024년 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