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시칠리아의 한 어촌 마을에 안토니오란 청년이 살았다. 직업은 어부, 대대로 바다에 나가 파도와 맞서면서 물고기를 잡아서 살아가지만 근근이 입에 풀칠할 뿐 도무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안토니오는 발버둥친다. 마을의 여성 네다의 마음을 얻어 행복한 삶을 꾸리기 위해서다. 가난 탓에 네다의 부모가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안토니오는 말한다. “오늘은 부자라도 내일은 가난해질지 몰라. 오늘 가난하다고 해도, 내일은 부자가 될지 몰라.” 그러자 안토니오와 밀당 중인 네다는 가볍게 응수한다. “그렇다면 내일 이야기하기로 해요.”
‘내일’을 바꾸려고 안토니오는 행동에 나선다. 친구들을 설득하고 노인들을 회유해 물고기 판매 협상권을 얻은 후 중간 상인들과 직접 교섭에 나선다. 그 와중에 상인들의 눈속임을 알아챈 그는 그들의 저울을 빼앗아 바다에 버리는 등 항의에 나섰다가 경찰에 체포된다.
유치장에서 나온 안토니오는 집에서 직접 안초비를 만들어 팔기로 한다. 대대로 살아오던 집을 저당 잡혀서 달려든 안초비 사업은 처음엔 잘나간다. 바라던 ‘내일’이 오자 네다와 안토니오의 사랑도 깊어진다. 그러나 둘이 마음을 확인한 직후, 안토니오의 배가 풍랑에 부서지면서 몰락이 시작된다. 사업은 파산하고, 안초비는 헐값에 빼앗기고, 집마저 압류당한다. 식구는 풍비박산 흩어지고, 안토니오의 사랑도 종말을 고한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의 줄거리다. 제목 ‘흔들리는 대지’는 모든 걸 잃고 세상을 떠돌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안토니오 집안의 출구 없는 비극을 암시한다. 그들의 소박한 인생을 파멸로 내몬 구조적 원인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갈수록 나빠지는 삶, 즉 가난이다. 그러나 그 직접적 원인은 어떻게든 가난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안토니오의 도전과 저항이다. 내일에 인생 전체를 걸고 애쓰다가 막다른 골목에 이른 그의 삶은 과연 헛된 것일까. 단지 본받지 말아야 할 슬픔과 비탄의 이야기에 불과할까. 이 질문은 저항과 성패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우리를 이끈다.
저항은 한 개인 또는 집단이 기예와 능력을 다해서 주어진 삶의 상황을 바꾸려 애쓰는 일이다. 생물학에서는 이를 적응이라 한다. 저항은 변화를 낳고, 적응은 진화를 낳는다. 안토니오가 보여주듯, 저항은 어렵고 위험하다. 미지의 바다로 뛰어드는 일이라 노력에 수완을 더해도 실패에 이르고, 자칫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기쁨과 설렘보다는 고통과 불안을 가져오기에 사람들은 두려움 탓에 쉽게 저항하지 못한다.
그러나 저항 없는 인생은 없다. 가만있으려 해도 바람은 나무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저항은 필연의 형식, 즉 인간 경험의 근본 조건이다. 세상 만물의 변화가 우리의 끝없는 적응과 진화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저항이 반드시 강한 의지, 굳센 결심, 무리한 노력 등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대다수 저항은 가만있으면 삶이 더욱더 나빠질 듯해서 두려움에 떨며 할 수 없이 하는 행위다.
저항엔 수동적 저항과 능동적 저항이 있다. 수동적 저항은 힘든 경쟁에 부닥치거나 어려운 역경에 처해 어쩔 수 없이 이를 넘어서려 하는 것이고, 능동적 저항은 변화를 촉진하거나 더 나은 삶을 이룩하기 위해 스스로 안락을 거부하는 것이다. 능동적 저항을 우리는 흔히 도전이라고 부른다. 어느 쪽이든, 저항은 필연적으로 우리 삶에 변화와 혁신을 가져온다.
<철학으로 저항하다>(사계절)에서 일본 철학자 다카쿠와 가즈미 게이오기주쿠대학 교수는 저항에는 좋고 나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주 저항의 가치를 유효성의 차원에서 살피려 한다. 성공한 저항은 의미 있지만, 실패한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안토니오의 저항은 쓸데없는 짓이다. 가만있으면 힘들어도 입에 풀칠은 할 텐데, 사업을 한답시고 나서서 더 큰 고난과 불행을 불러들여서다.
안토니오의 저항이 완전히 무로 돌아간 건 아니다. 전술과 전략 부족으로 실패했을진 몰라도, 삶의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는 말할 때 “바다의 물고기는 먹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야” 같은 시칠리아 속담을 자주 사용한다. 이 말은 본래 “어쩔 수 없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라는 운명론적 체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고기의 존재 이유는 사람에게 먹히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불만을 품고 도전하는 과정에서 안토니오는 자신이 바로 “출구 없는 그물 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물고기같은 신세란 걸 깨닫고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이런 상황은 억지로라도 그물을 찢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아. 상인들을 무서워해서는 안 돼. 누군가 독립해서 일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얻어 뒤따를 거야. 그리고 우리한테 고맙다고 하겠지!” 그물, 즉 나쁜 현실에 붙잡힌 삶은 살아 있어도 이미 시체나 다름없다. 정해진 경로를 밟아 결국 죽음의 밥상에 오를 뿐이다.
억지로 그물을 찢지 않으면, 이 삶에선 사랑조차 가능하지 않다.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 삶의 무참함을 알게 된 안토니오에게 그물과 물고기는 더 이상 운명적 체념의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 전망도 없는 죽음 같은 삶이 우리 현실에 존재하고, 그물을 찢고 거기에 도전하는 삶의 출현을 알려주는 상징이다. 이로써 안토니오는 오늘 대신 내일이란 시간을, 체념 대신 도전이란 삶의 형식을 생성한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실제로 발생한 도전과 저항을 봉기라고 부른다. 그물에 갇힌 물고기처럼 그냥 죽을 순 없어서 벌떡 일어서는 일이다. 푸코는 말한다. “사람은 봉기한다. 이는 하나의 사실이다. 봉기해야 주체성이 역사에 흘러들어 숨을 불어넣는다.” 일어섰다는 사실이 역사를 작동시킨다. 더 깊게 고민하고 더 치밀하게 일어서 성공하면 좋겠으나, 그렇지 않더라도 이전과 다른 인식, 다른 인생, 다른 흐름을 창조한다. 도전과 저항은 인식을 바꾸고 감각을 혁신하며 인생을 바꾼다. 그것은 인생이란, 현실이란 “다 그런 것이다”라는 운명적 체념에 맞서서 “그런 것일 리가 없다”라고 힘차게 외치는 일이고, 지금까지의 삶의 양식과 전혀 다른 행동을 해버리는 일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현실에서 도전과 저항은 성장과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지혜와 성찰을 일으키며, 개성과 자유를 창출한다. 더 나아가 도전과 저항은 세계의 진실을 따져 물음으로써 앎의 진보를 가져오고, 옳고 그름에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행동양식과 윤리를 촉발한다. 일단 도전하고 저항함으로써 우리 삶은 숭고하고 위대해진다. 그로부터 지금 여기에서 다른 내일을, 다른 인생, 다른 세계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