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은 평범한 사람들의 것이었다.” 세계인이 사랑하는 작가 파울로 코엘료를 전업 작가의 길로 인도한 자전적 소설 <순례자>의 한 구절이다. 그의 말처럼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 순례를 마쳤지만, 순례를 마친 이후 그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데뷔작 <순례자>를 시작으로, 전 세계 170개국 이상 83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들은 3억 2000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고, <연금술사>를 통해, ‘한 권의 책이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작가’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록스타, 극작가, 음반회사 중역 등으로 활동하다 모든 걸 내려놓고 홀연히 떠난 순례길. 코엘료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변화한 자신을 바라보며, 이 길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고백한다. 누군가는 코엘료와 같은 성공을 꿈꾸며, 누군가는 자신을 찾기 위해, 누군가는 자신을 잊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평범한 이들이 자신만의 이유를 마음에 품고 순례의 길 위를 걷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던 도보 여행을 떠올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걷기의 역사(History of Walking)>를 저술한 사회 운동가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말한다. “인간은 자유를 위해 걷는다”라고. 실제로, 중세 유럽 카탈로니아(Catalonia)는 11세기 모든 이들이 도로를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법을 유럽 최초로 제정하는데, 이 자유를 통해 발전한 것이 산티아고 순례길(the Pilgrimage to Santiago de Compostela)이다.
프랑스 걷기(도보 여행)의 역사도 자유를 즐기기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어로 랑도네(Randonne‘ e)라는 단어가 있다. 산책길이라는 뜻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긴 거리를 걸어야 하는 길은 ‘긴 산책길, 그랑드 랑도네(Grande Randonne’ e)’라고 하고, 줄여서 GR이라고 부른다. GR의 역사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스카우트나 모험적인 청년들이 카라반(caravan)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퐁텐블로 숲과 같은 곳에서 비교적 긴 거리의 걷기를 시작한 것이 그 시초다. 그 이후, 1936년 노동자의 권리에 있어서 혁신적인 제도로 평가받는 유급휴가제도(conge‘ s paye’ s)가 모든 노동자를 대상으로 확대 시행되면서, 도보 여행은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노동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평범한 이들이 선택한 가장 손쉬운 여행이 바로 걷기였다는 방증이다.
걷기에 대한 대중들의 높은 관심 속에, 1947년 잔다르크로 유명한 도시 오를레앙(Orle‘ ans)과 보장시(Beaugency) 사이를 잇는 전장 28㎞의 첫 번째 GR가 만들어지고, 1951년 한국인들도 익히 들어본 몽블랑 산악 GR도 뒤를 따른다. 코르시카섬의 날카로운 능선 GR, 황량한 바닷바람을 이겨내야 하는 노르망디 해안 절벽 GR 등 프랑스 곳곳의 명소를 연결하며, 현재 프랑스 전역의 GR은 6만㎞에 이르고 있다.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자연의 명소를 중심으로 조성하던 GR의 일반적 경향에서 벗어나, 2013년 프랑스인들은 전혀 새로운 개념의 도보 여행 길을 고안해 낸다. GR2013으로 이름 붙여진 세계 최초의 도시 산책길(Sentier Me‘ tropolitain, 영어로는 Metropolitan trails). 프랑스 제2의 도시 마르세유의 역사, 예술, 자연 명소를 연결한 이 길은 도시의 깊은 내면을 이해하는 새로운 자유를 순례자들에게 선물하기 시작했다. 도보 여행이 일상 속으로 보다 가깝게 다가오며, GR이라는 공간은 상상하는 만큼 확대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이처럼, 메트르폴리탄 트레일의 개념은 프랑스를 벗어나 이스탄불, 런던, 도쿄, 서울 등 전 세계 주요 대도시로 확대되며, 그들만의 이야기를 산책로에 헌정하고 있다.
파리도 2017년 2024 올림픽 유치를 목적으로 특별한 산책로를 조성한다. 1900년과 1924년 파리 올림픽 경기장으로 사용된 시설과 파리 외곽 체육시설을 테마로 한 총길이 52㎞의 도시 산책길, GR75(75는 파리의 우편번호)가 그것이다. 도시외곽순환도로(Boulevard Pe‘ riphe’ rique) 옆을 따라, GR75는 파리를 한 바퀴 돈다. 파리의 명소 루브르, 오르세, 에펠탑, 몽마르트르 언덕은 당연히 이동 동선에 존재하지 않는다. 기존 메트로폴리탄 트레일과는 결이 다르다. 겉으로 보기엔 파리 변두리의 우중충한 회색 건물들 사이로 만들어진 전혀 파리답지 않은 길에 불과해 보인다. 하지만 여러 차례 GR75를 완주한 지금 파리에 살고 있다면, 파리를 방문한다면, 시간을 내서 꼭 완주하거나 적어도 한 구간이라도 걸어보라고 강하게 권유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올림픽을 테마로 한 독특한 스토리텔링 때문이 아니다. 나에게 GR75는 일상 속의 경이로움을 찾아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스승 같은 길이기 때문이다.
파리의 동서에서 허파와 같이 푸른 숲을 제공하는 뱅센숲(Bois de Vincennes)과 불로뉴숲(Bois de Boulogne)을 포함해 75개의 크고 작은 녹지가 우중충한 회색 건물들 사이에 보석처럼 숨어 있다는 사실, 알지 못했다. 포트라 드 라 빌레트(Porte de la Villette)의 운하를 가르는 작은 여객선, 하나의 거대한 운석 같은 비정형 건축물 필하모니드 파리(Philharmonie de Paris), 포르테 드 빈센(Porte de Vincennes)에서 포르테 도리(Porte Dore‘ e)까지 이어지는 옛 철길 위에 들어선 하늘길, 해리포터에서 본 듯한 Cite 공원, 국제대학촌 본관 건물, 열차 정비창 부지에서 탈바꿈한 바티뇰(Batignolles)의 인공 습지와 석양 그리고 흔들리는 갈대. 평소 알지 못했던 숨어 있는 어린 왕자의 별 같은 파리였다. 길을 걷는 동안 차오르던 새로운 발견에 대한 희열이 아직도 강렬하다. GR75 순례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다. 새로움을 찾기 위해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평소 선입견으로, 무관심으로, 알지 못했던, 스쳐 지나갔던, 주위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도 새로움이다. 인간이 걷는 이유는 길에서 마주친 그 무엇이 전해주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닐까?
‘(자유) 한 단어의 힘으로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프랑스의 저항시인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의 마지막 문장이다. 우리에게 걸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아직 잃지 않은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힘내자. 당신만의 자유를 담은 GR를 걸으며, 새로운 당신과 만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