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킬라. 이름만 들어도 인상부터 찌푸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면 한결같다. “다음 날 숙취로 고생했다”는 것. 그럴 때마다 열심히 항변해왔다. “술은 잘못이 없다. 마신 사람의 잘못일 뿐”이라고. 대부분 수긍하지만 떠나간 마음을 붙잡기엔 부족했다. 한국에서 테킬라는 주로 칠링해서 ‘원샷’하는 술로 소비돼왔다. 소주의 음용 방식과 비슷하다 보니 높은 도수를 무시하고 연달아 마시는 일이 부지기수다. 취했다고 느낄 때는 이미 늦었고, 다음 날 지옥의 문턱 앞에서 후회를 반복하다 결국 테킬라와의 관계가 서먹해지고 만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글로벌 시장의 흐름과 달리 테킬라는 한국 시장에서 오랫동안 좀처럼 기지개를 켜지 못했다.
전 세계적으로 지난 몇 년간 화이트 스피릿이 강세를 보인 가운데, 올해 발표된 IWSR(글로벌 주류 통계 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테킬라는 화이트 스피릿을 넘어 증류주 전체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그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대규모 주류회사들은 테킬라 증류소의 지분을 사들이거나 아예 증류소를 새로 짓는 등 적극적인 태도도 취하고 있다. 국내 사정은 어떨까.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테킬라의 국내 수입금액은 586만달러. 2021년에 비해 95%나 상승했다. 그렇지만 팬데믹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 주류 수입 자체가 원활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꼭 숫자의 크기만큼 유의미하지는 않다. 그보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현장의 변화다. 국내 테킬라 시장은 규모 자체도 작지만 그마저도 오랫동안 단일 브랜드가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해왔다. 나머지도 세 손가락에 꼽힐 만큼 소수 브랜드들이 점유하고 있었다. 변화가 시작된 건 2022년. 지난해를 기점으로 부동의 시장을 파고드는 신흥 세력들이 프리미엄이라는 이름 아래 등장하더니, 이미 수입되고 있었지만 빛을 보지 못했던 제품들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바텐더들이 칵테일을 만들 때 기주로 으레 사용하던 테킬라 사이로 생소한 브랜드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백 바(Back Bar)에서의 지분도 조금씩 넓혀가더니 아예 테킬라를 전문으로 다루는 바 ‘라 알마’도 등장했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많은 테킬라를 다루는 곳이 ‘라 알마’라는 것을 감안하면, 국내에서 맛볼 수 있는 테킬라는 대략 25여 개 브랜드, 총 70여 개이다. 그중에는 가히 ‘진격’이라고 표현할 만한 걸음을 뗀 테킬라도 있다. 바로 ‘클라세 아줄 레포사도(Clase Azul Reposado)’다. 이름은 모르더라도 바 애호가라면 백 바에서 이 테킬라를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청아한 소리를 내는 종 모양의 모자를 쓰고 푸른색의 멕시콘 전통 문양을 걸쳐 입은, 구석에 놓여 있어도 눈이 갈 수밖에 없는 위풍 넘치는 자태를 지녔으니 말이다. 클라세 아줄 레포사도는 멕시코 할 리스코주 가장 높은 곳에서 자라는 블루 아가베 중 6~8년생을 선별한 후 72시간에 걸쳐 오븐으로 열을 가해 단맛과 아로마를 끌어올려 양조한다. 이후 위스키 배럴에서 8개월간 숙성해 완성한다. 부드러운 목 넘김, 커피, 시나몬, 바닐라 등이 교차하는 우아한 풍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테킬라 한 잔에 싱글몰트 위스키 버금가는 가격을 선뜻 지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테킬라 음용 방식이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플루트나 글랜캐런 글라스에 담아 서브되면 사람들은 한입에 털어넣는 대신 와인처럼, 위스키처럼 마신다. 물론 해당 테킬라의 등장 전에도 1년 미만 숙성을 거치는 레포사도, 1년 이상 숙성하는 아네호 등급의 테킬라가 국내 시장에 존재했지만 이처럼 음미하기를 ‘적극 권장된’ 테킬라는 드물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바를 넘어 다이닝의 주류 리스트에서도 테킬라를 찾아볼 수 있게 된 이유로 작용했다. 숙성을 통해 아가베의 단맛을 풍부하게 끌어올린 프리미엄 테킬라들은 특히 디저트 술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지난해 오픈한 ‘필레터’가 좋은 예다. 숯불에 구운 파인애플에 페이스트리, 코코넛 커스터드를 곁들인 디저트 메뉴에 레포사도 등급의 테킬라 매칭을 추천하는데, 테킬라에 대한 그간의 편견에서 벗어나기에 충분을 넘어서는 맛의 조화를 즐길 수 있다.
라임이나 소금을 곁들여 먹는 전통적인 방법을 존중하지만 프리미엄 테킬라의 풍미를 느끼는 방법으로는 썩 달갑지 않다. 찌르는 산미나 짠맛이 종종 맛의 여운을 지워버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라임보다는 시나몬 파우더를 뿌린 오렌지를 추천한다. 테킬라와 서로 결이 다른 단맛을 주고받으며 제대로 시너지 효과를 낸다. 스모키한 아로마를 가진 테킬라는 체이서로 샹그리타를 곁들여도 좋다. 토마토주스, 오렌지주스, 라임주스, 타바스코, 후추, 소금 등을 넣어 만든 음료로 강렬한 감칠맛을 즐기기 좋은 조합이다. 바텐더들에게서 얻은 경험이니 한번 믿어보시라. 편견을 벗어나 새로운 술의 세계로 입문하고 싶다면, 오늘은 테킬라 한 잔이 좋아 보인다.
장새별 F&B 콘텐츠 디렉터
먹고, 마시는 선천적 애주가. 미식 매거진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현재는 스타앤비트를 설립해 F&B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