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대 높던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확실히 최근 몇 년 새 좀 달라졌다. (그래봐야 10센티미터 콧대가 8~9센티미터로 낮아진 정도지만.) 한국 고유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대규모 패션쇼와 팝업 전시회 등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이벤트들을 잇따라 열고 있다. 구찌가 25년 만에 경복궁에서 크루즈패션쇼를 열었는가 하면, 루이비통은 한강 잠수교 런웨이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또 신진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한국 예술가들의 전시 기획이나 후원에도 적극적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국내 패션시장이 전 세계 브랜드들이 주목할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 명품 소비시장은 142억달러(유로모니터)로 세계 6~7위 수준이다. 1인당 명품 소비는 325달러(약 40만원)로 미국(약 35만원)과 중국(약 7만원)을 제치고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게다가 한국이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가장 트렌디하고 중요한 시장으로 부상한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은 문화적 시대정신을 대표한다”는 서랜도스 넷플릭스 CEO의 말처럼, 한국은 K팝, K드라마와 영화로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에 서 있다.
K컬처의 영향력과 MZ세대의 구매력이 결합하자 전 세계 명품들이 한국으로 향하고 있다. 이미 파트너십 형태로 들어와 있던 브랜드들은 앞다퉈 직진출로 전환 중이다. 한국은 동남아시아 신흥시장은 물론 북미, 유럽 등 글로벌 진출의 성공 여부를 가늠할 테스트베드로,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의 격전지가 된 것이다.
특히나 ‘플렉스’ 문화를 즐기는 MZ세대가 명품 소비 큰손으로 부상하면서 인플루언서들을 통해 SNS나 유튜브로 명품 소비가 더욱 빠르게 확산 중이다. 명품 브랜드들이 트렌디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K팝 아이돌들을 글로벌 앰버서더로 기용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인간 샤넬’이라 불리는 블랙핑크 제니를 비롯해, 요즘 인기 있는 아이돌들은 심지어 10대까지 명품 브랜드들의 글로벌 앰버서더로 활동하며 ‘명품돌’로 주가를 올린다. 10대들의 명품 소비를 부추긴다는 비판도 있지만, MZ세대가 명품 소비 주류가 되면서 견고한 전통 명품 틈새에서 아미, 메종키츠네, 톰브라운 같은 ‘신명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새로운 명품 브랜드의 탄생은 어렵지만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중국 SPA 브랜드 <쉬인>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불과 10여 년 만에 패스트패션 업계의 정상에 올랐다. 한국 토종 명품 브랜드의 탄생은 가능할까. 한국 패션 브랜드들은 글로벌 공략에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대신 글로벌 브랜드를 인수하거나, 최근에는 패션과 전혀 관련없는 해외 브랜드를 들여와 패션 브랜드로 성공시킨 ‘우회’ 사례들도 종종 나오고 있다.
이제 대외적인 환경은 무르익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손재주와 기술, 동대문이라는 생산인프라, IT 기반, 트렌디한 소비층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게다가 한류열풍을 타고 한국적인 것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그 어느때보다 높다. 우리의 스토리와 디자인, 고유한 브랜드 정체성을 담은 K명품 브랜드의 탄생도 넘볼 만하다. 이미 그 출발을 알린 토종 브랜드들도 제법 있다. 머지않아 글로벌 K명품이 탄생할 날이 기대된다.
[김주영 월간국장 매경LUXMEN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