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만 해도 서울에서 호텔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다이닝(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은 보기 드물었다. 이제는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이런 레스토랑을 찾을 수 있게 됐지만 역시 5년을 넘긴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파인다이닝이 지금보다 훨씬 생소하던 시절부터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켜온 곳이 있다.
주방에서만 30년을 보낸 이방원 오너셰프(51)의 프렌치 레스토랑 ‘파씨오네’다. 2012년 8월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인근에 문을 연 파씨오네는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10년 넘게 운영되고 있는 다이닝 레스토랑이다.
파씨오네는 ‘프렌치는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고 누가 맛보더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음식을 추구한다. 한국의 제철 식재료를 정통 프렌치 스타일로 풀어낸 메뉴들은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고 먹어야 하는 날 선 음식보다는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음식에 가깝다. 산지에서 직송하거나 새벽 시장에서 공수한 재료만을 고집하고, 아름다운 플레이팅을 위한 식용 꽃은 직접 재배도 하고 있다.
프라이빗 룸은 4인석 1개만 운영하고 있지만 일반 홀 좌석도 파티션 등으로 구획이 돼 있어 집중이 흐트러지지는 않는다. 프렌치 레스토랑답게 우아하면서도 차분하고 아늑한 분위기는 손님을 대접하는 데도 손색이 없지만, 비즈니스로 만난 상대와의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이기 충분하다. 감각적이지만 반듯하지만은 않아서, 깔끔하지만 지나온 세월도 켜켜이 쌓여 있는 그런 공간이라서 더욱 그렇다.
이방원 셰프는 전북 전주의 고즈넉한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만들 때 가장 행복했던 그는 졸업 후 막연하게 취업했던 식품회사를 한 달 만에 그만두고 끌리듯 요리사가 됐다. 손수 만든 음식을 누군가가 먹을 수 있고 즉각 반응이 온다는 것에 신선한 호기심과 재미를 느꼈다. 전주의 한 호텔 주방에서 10년 정도 일하다 국내 최초의 원테이블 레스토랑이었던 프렌치 1세대 서승호 셰프의 ‘라미띠에’의 문을 두드려 2002년부터 3년간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이후 그는 헤드셰프로 레스토랑 2곳을 더 거쳤지만 스스로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겼다. 결국 마흔이 다 된 늦은 나이에 프랑스 파리로 무작정 떠나 현지에서 1년간 견습생 생활을 했다. 아내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 둘을 한국에 남겨둔 채로. 프랑스어는 속성으로 배워 어눌했지만 프렌치 요리만큼은 자신 있었던 그였다. 덕분에 세계적인 미식 리스트 ‘미쉐린 가이드 파리’의 3스타 레스토랑인 ‘아르페주’와 ‘라스트랑스’에서 경험을 쌓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방원 셰프는 “당시 견습생을 하면서 받은 돈은 겨우 방값을 낼 정도밖에 안 됐기 때문에 먹는 것도 아끼고 숙소에서 레스토랑까지 6㎞ 거리를 매일 걸어 다녔다”면서도 “그래도 배울 수 있음에 행복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그때의 그 열정을 모두 쏟아부어 만든 곳이 지금의 파씨오네다. 파씨오네(Passionne0 )란 이름은 프랑스어로 ‘열정적인’ 또는 ‘열정적인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다이닝 레스토랑에서는 테이블 위에 오늘의 코스를 간략히 적은 메모지가 놓여 있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파씨오네에서는 이방원 셰프가 직접 커다란 칠판을 들고 매번 10여 개의 테이블을 직접 찾아다니며 메뉴를 설명해준다. 프린트된 딱딱한 글자 대신 셰프가 그날그날 칠판에 적은 손글씨로 손님을 맞는 것이다. 덕분에 음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먹는 것은 물론, 같은 경험을 공유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게 돼 자연스러운 아이스 브레이킹을 꾀할 수 있다.
이 셰프는 “메뉴를 정해 놓더라도 당일 들어오는 식재료의 컨디션에 따라 조금씩 메뉴를 바꾸기도 한다”며 “이럴 때의 편의를 위해 프린트 대신 칠판을 쓰기 시작했는데 손님들 반응이 좋고 우리 레스토랑의 시그니처처럼 돼서 계속 이렇게 해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단골 손님도 많지만 처음 오시는 분들도 많아서 손님들과 직접 인사를 나누고 설명하는 게 도움이 될 때가 많다”며 “모든 손님을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음식에 대한 손님들의 반응을 살필 수도 있고 어떤 분들이 주로 우리 레스토랑을 찾는지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7월 12일 저녁 7시께 찾은 파씨오네. 이방원 셰프는 이날도 어김없이 칠판을 들고 손님들 앞에 섰다. 칠판에는 프랑스어와 한글로 오늘의 코스 메뉴가 적혀 있었다. 이 셰프는 메뉴를 하나씩 짚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파마산 치즈와 닭 육수를 섞어 만든 크림에 소금에 절인 연어와 트러플을 곁들인 아뮤즈 부쉬로 시작해서 파스닙이란 채소로 끓인 스프, 가리비 구이와 바지락 리조토, 표고버섯을 비롯한 여러 가지 버섯을 이용해 만든 라비올리, 볼락·홍새우·삼치 등에 바닷가재 비스크 소스를 곁들인 해산물 요리가 준비돼 있고요. 수박으로 만든 소르베(셔벗), 그리고 메인 디시로 한우 안심, 양 어깨갈비, 닭 다리살, 오리 가슴살, 돼지 항정살 요리 중에 하나 선택해주시면 됩니다.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파씨오네는 점심과 저녁 각각 한 가지 코스로만 운영된다. 점심 코스는 프랑스어로 ‘입안의 즐거움’을 뜻하는 아뮤즈 부쉬(Amuse bouche·전채)로 시작해 수프, 샐러드, 해산물 요리, 메인 코스인 스테이크(한우 안심·양 어깨갈비·닭고기·오리고기·돼지 항정살 중 택1), 디저트와 커피 또는 티로 마무리된다. 메뉴를 구성하는 식재료는 계절 등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저녁 코스는 점심과 비슷한 코스에 두세 가지 메뉴가 더 제공된다. 와인이나 에이드 등 음료도 곁들일 수 있다.
파씨오네의 가격대는 다이닝 레스토랑치곤 저렴한 편이다. 점심 코스의 가격은 1인당 6만5000원, 저녁 코스는 11만원이다. 다만 메인 코스에서 한우를 선택할 경우에는 1만7000원이 추가된다. 그래도 코스 가격만 1인당 20만~30만원을 웃도는 다른 다이닝 레스토랑들과 비교하면 가성비가 상당히 높다. 와인은 보틀(병)로도 주문 가능하지만 글라스(잔) 단위로도 주문할 수 있다. 와인 가격은 보틀 기준 10만~20만원 안팎, 글라스 기준 1만5000~2만원 정도다.
파씨오네의 가격 정책은 ‘누구나 합리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가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질 뿐 음식과 서비스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방원 셰프는 “손님들이 큰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도록, 그래서 가능하면 좀 더 많은 사람이 다이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으로 가격을 정했다”며 “만약 늘어난 인건비 등을 고려해 가격을 올리면 테이블을 지금보다 줄여서도 운영이 되겠지만 그런 방식은 본래 이곳을 열었을 때 생각한 취지와 맞지 않다”고 강조했다.
파씨오네만의 특별한 맛을 담은 시그니처 메뉴는 메인 요리 전에 제공되는 프랑스식 해산물 요리와 마지막 디저트 메뉴 중 하나로 나오는 밀푀유다. 각각을 담백하게 익혀낸 서너 가지 해산물과 이를 아우르는 소스, 그 위에 올려진 향긋한 채소와 곁들여진 콘킬리에(파스타 면의 일종)…. 들꽃을 연상시키는 플레이팅으로 기분 좋게 시작해 비린내 없이 깔끔하면서도 풍성한 맛과 다양한 식감의 변주로 먹는 내내 지루함이 없다. 먹다보면 ‘이게 메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1000장의 나뭇잎’이란 뜻을 가진 밀푀유는 여러 겹의 바삭한 페이스트리 사이사이를 크림 등 달콤함으로 채운 프랑스 정통 디저트다. 파씨오네는 ‘밀푀유 맛집’으로도 유명하다. 고소하고 바삭한 페이스트리 안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한 크림이 채워진 ‘단짠’ 디저트다. 살짝 곁들인 슈거 파우더와 캐러멜 시럽도 매력을 더해준다. 그 밖에 수프, 구이소스 등에서 식감을 더욱 부드럽게 해주는 거품도 파씨오네의 매력 포인트다.
건물 2층에 자리한 파씨오네는 한쪽 벽면이 크고 긴 창으로 이뤄져 있어 낮에는 자연 채광이 실내를 밝게 비춘다. 그렇다고 눈이 부시거나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은 아니다. 건물 외벽을 둘러싼 넝쿨나무가 늘어뜨린 초록 잎들이 창 대부분을 커튼처럼 덮고 있기 때문이다. 잎사귀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제법 은은하고 숲속의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덕분에 바쁘고 복잡한 건물 밖 도시 풍경은 잠시 잊고 오롯이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
전체적인 인테리어 역시 나무, 돌 등 자연 소재가 가진 색채 그대로를 이용해 내추럴한 분위기다. 웜톤의 우드와 화이트, 그린, 그레이가 조화를 이뤄 남녀노소 누구나 아늑함을 느낄 수 있다. 나무 기둥 여러 개를 서로 다른 각도로 기울여 세운 파티션과 유약도 바르지 않은 미완성의 도자기들, 훤히 모습을 드러낸 노출 천장도 왠지 모를 편안함을 더해준다. 매장 곳곳에 걸린 그림이나 액자에 담긴 풍경을 엿보는 것도 묘미다. 주방의 셰프들 모습을 담은 작품을 포함해 이방원 셰프의 이니셜인 ‘ㅇㅂㅇ’이 새겨진 그림은 이 셰프가 직접 그린 것들이다.
전문성과 노련함을 갖춘 홀 직원들의 막힘 없는 서빙도 큰 장점이다. 손님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각 손님의 식사 현황을 훤히 꿰뚫고 있는 듯이 움직인다. 마지막 한입을 먹고 나면 어디선가 나타나 금세 테이블을 정리하고 다음 코스를 준비한다. 큰 소리를 내지 않고 다니는데도 홀과 주방의 호흡이 척척 잘 맞는다. 손님은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대화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
이 같은 매끄러운 코스 진행은 비즈니스 미팅에서 특히 중요하다. 음식이 너무 늦게 나오거나 아직 다 먹지도 않았는데 홀 직원이 그릇을 치우려 다가오면 흐름이 끊기면서 방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손님을 가까이서 보고 있는 것도 좋지 않다. 혹시라도 업무상 민감한 내용의 대화가 오갈 경우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파씨오네는 이런 밸런스를 잘 아는 곳이다.
한편 파씨오네는 2018년부터 올해까지 6년 연속 ‘미쉐린 가이드 서울’에 이름을 올렸다. 국내 맛집 가이드인 블루리본서베이가 발표하는 ‘서울 최고의 맛집’에도 2014년부터 10년 연속 선정됐다.
파씨오네(Passionné)
장르 프렌치
위치 서울 강남구 언주로164길 39, 2층
영업시간 월~금 12:00~22:00(15:00~18:00 브레이크 타임), 토 12:00~21:30(15:30~18:00 브레이크 타임), 일 정기휴무
가격대 런치 코스 6만5000원, 디너 코스 11만원
프라이빗 룸 1개(4인석)
전화번호 02-546-7719
주차 발렛파킹
송경은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