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을린 사랑>을 세 번 보았습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았다가 눈물이 줄줄 흐르던 저 자신을 마주하게 됐던 처음을 기억합니다.
<그을린 사랑>의 서사에 담긴 힘은 다른 영화와는 결이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그리스비극에 등장하는 인간의 운명과 인간의 나약함을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비상한 힘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수백 년 지난 뒤에도 세계와 인간의 풍경이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을린 사랑>은 비극의 정본 같은 작품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예측해 봅니다. <그을린 사랑>은 와즈디 무아와드의 희곡 <화염>이 원작입니다. 연극 무대에서 관람한 드니 빌뇌브 감독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아 5년 뒤 연출해 선보인 영화입니다. 두 작품의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을린 사랑>은 결말을 알고 봐선 안 되는 작품이니 이 글을 읽기 전에 영화를 보시길 권합니다.)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의 어머니 나왈이 사망합니다. 나왈의 공증인 르벨은 남매를 불러 나왈의 유언장을 읽습니다. 어머니 나왈은 딸 잔느와 아들 시몽에게 2개의 편지를 남깁니다. 편지 하나는 너희의 아버지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너희의 형이자 오빠에게 주라는 유언이었습니다.
평소 나왈은 남매에게 너희 아버지는 전쟁 도중 죽었다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아들 시몽은 자신에게 숨겨진 아버지와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합니다. 딸 잔느는 어머니 나왈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을 들고 어머니 고향으로 떠납니다. 잔느가 나왈의 진실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경악스러운 진실이 한 무더기씩 쏟아집니다.
(※스포일러) 어머니 나왈은 10대 시절 와합과 연인이었습니다. 와합은 난민이란 이유로 총살당합니다. 나왈의 몸에 선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나왈은 홀로 낳은 니하드를 고아원에 입양 보냅니다. 슬픔을 숨기면서 아이를 찾아다니던 나왈은 난민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는 민병대 레지스탕스와 마주합니다. 종교와 이념을 떠나 복수심이 차오른 나왈은 가정교사로 잠입해 민병대 지도자를 사살합니다. 이후 나왈은 감옥 크파르 리야트에 수감된 혁명가로 주민들에게 기억됩니다.
15년간 감옥에 투옥된 나왈은 고문기술자 아부 타렉에게 주기적으로 끝도 없이 성폭행을 당합니다. 나왈은 그때마다 노래를 부르며 힘에 저항합니다. ‘72번 창녀’로 불렸고 ‘노래하는 여인’으로도 불렸던 나왈은 성폭행범 아부 타렉의 아이를 출산합니다. 그러나 나왈은 알게 됩니다. 아부 타렉이 자신이 고아원에 입양 보냈던 아이 니하드였음을. 나왈 본인의 아들이자 쌍둥이 아이들의 아버지인 기막힌 운명을 깨닫는 순간, <그을린 사랑> 관객과 <화염> 독자는 수은을 몸속에 주사한 듯한 역겨움에 몸서리칠지도 모릅니다.
원작 희곡 <화염>은 나왈의 삶을 추적하는 남매의 뒤를 따라갑니다. 여기서 중심인물은 비밀스러운 어머니 나왈입니다. 영화 <그을린 사랑>은 원작과 다릅니다. 영화는 나왈, 잔느, 시몽의 그림자에 가려졌던 한 아이, 한 남성을 부각시키지요. 드니 빌뇌브 감독은 울분에 찬 눈빛의 소년 니하드를 카메라로 비추면서 영화를 시작하고 나왈의 무덤을 찾는 성인 아부 타렉을 멀리서 카메라로 잡으며 영화를 끝맺습니다.
나왈이 아부 타렉을 니하드로 확신하는 장면도 두 작품에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지요. 영화에선 아들 니하드를 알아보는 나왈의 표지가 ‘아킬레스건 뒤에 새긴 3개의 검은 점’이었습니다. 나왈의 산파가 뾰족한 바늘을 이용해 갓난아이 니하드의 뒤꿈치에 점을 세 번 찍어 새긴 문신이었지요. 감옥에서 풀려나고 쌍둥이 남매가 성장하자 평온해진 나왈은 딸 잔느와 수영장에 갔다가 아부 타렉의 얼굴을 알아봅니다. 아부 타렉은 나왈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나왈은 아부 타렉의 뒤꿈치 문신을 보고 끔찍했던 고문기술자 아부 타렉이 자신의 첫아이 니하드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러고는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고 침묵하지요.
희곡 <화염>은 나왈이 니하드를 알아보는 계기가 다릅니다. 나왈은 니하드를 입양시키기 직전 아이의 기저귀 안에 ‘피에로의 코’를 넣어뒀습니다.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었죠. 희곡을 쓴 나즈디 무아와드는 왜 하필 피에로의 코를 이야기했을까요.
니하드는 희곡 속 법정에서 말합니다.
“조그마한 빨간 코였죠. 조그마한 피에로 코였습니다. 그게 뭘 뜻할까요? 제게 존엄성은 제게 생명을 준 존엄성이 남긴 일그러진 얼굴인 겁니다. 이 찌푸린 얼굴은 절대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170쪽)
피에로의 코는 마치 어린 니하드/아부 타렉의 운명을 드러내는 슬픈 물건입니다. 피에로는 세계 수많은 광대 캐릭터 중 하나입니다. 슬픈 얼굴을 한 광대를 의미하지요. 사생아로 태어나 고아원에 버려졌고 적들에게 납치되어 저격수로 길러진 남성. 하지만 다시 적에게 생포되어 감옥의 여성을 고문하는 기술자로 성장한 범죄자. 니하드/아부 타렉은 ‘슬픈 피에로’를 닮았습니다.
아부 타렉은 나왈이 어머니인지 모른 채 성폭행하고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계속 노래를 불러.” 감옥의 수많은 여성들은 부서지고 찢겨지는 고문 중에도 나왈의 노래에 의존했습니다. 아부 타렉은 나왈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갖고 주기적으로 성폭행했는데, 정작 성폭행을 마친 뒤엔 ‘노래를 그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부 타렉의 저 대사는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희곡에 자세히 나오는 내용입니다만, 아부 타렉이 ‘72번 창녀’ 나왈의 노래를 멈추지 않은 건 나왈의 목소리가 본능적으로 생모(生母)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생 찾아다닌 엄마를 근친상간할 정도로 바로 눈앞에 있는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엄마의 목소리가 그리웠던 것이지요. 10개월간 나왈의 배 속에서 자랐으니 목소리를 기억했기 때문은 또 아닐까요. 니하드는 피에로입니다.
나왈의 딸 잔느의 직업은 희곡에선 수학과 교수로 나옵니다. 영화에선 수학과 대학원생 조교이지요. 이 영화를 지배하는 전체적인 정서도 이성과 합리의 논증이 필수인 수학입니다. 수학은 명확한 답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학문입니다. 하지만 삶이란 게 언제나 명확한 논증과 확실한 답이 있던가요. 잔느와 시몽이 답을 찾아가는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매가 느끼는 삶과 운명의 채도는 수학보다 불투명합니다.
잔느가 수업 도중 잠시 언급하며 스쳐 지나가는 수학계의 ‘콜라츠 추측’은 <그을린 사랑> 전체를 암시하는 하나의 복선이 됩니다.
수학에서의 콜라츠 추측은 ‘임의의 자연수는 결국 다음과 같은 조작을 거쳐 항상 1이 된다’는 추측을 뜻합니다.
만약 자연수가 짝수라면 2로 나누고, 홀수라면 3을 곱한 뒤 1을 더합니다. 이 방식을 계속 하면 반드시 1이 됩니다. (가령 34는 ‘34→17→52→26→13→40→20→10→5→16→8→4→2→1’이 됩니다.) 콜라츠 추측이 ‘추측’인 이유는 모든 자연수에 대한 증명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잔느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는 내용이 어떤 경우든 1로 결론 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잔느와 시몽은 아버지 1명, 형/오빠 1명을 찾아, 즉 ‘2명’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하지만 ‘1+1’의 정답은 ‘2’가 아니라 ‘1’이었지요. 콜라츠 추측은 남매의 오빠 니하드, 남매의 아버지 아부 타렉이 동일인이라는 복선이 됩니다. 시몽이 ‘1+1=1’이라고 말하자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던 잔느가 입을 틀어막으며 내지른 비명은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픕니다.
희곡에선 나히드가 아부 타렉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자세하지 않습니다. 사실 니하드가 아부 타렉이 되어 끔찍한 악인이 됐던 이유는 자신을 버린 생모가 자기 얼굴을 알아봐주길 바라서였습니다. 어머니를 찾기 위하여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악마가 되었는데 그 길에서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를 범하는 모순의 미로에 갇혀 버린 것입니다.
영화에선 아부 타렉이 악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줌으로써 기독교 민병대와 회교도 간의 살육전을 부각하고, 이로써 반전 메시지를 분명히 합니다. 성모의 사진을 붙인 AK 소총의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10살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 동네 아이들을 끔찍하게 죽이는 장면,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난민을 산 채로 불태우는 장면도 자세합니다. 고대 신화와 성경 대목을 차용한 부분도 눈에 띕니다. 강에 버려진 쌍둥이 아이를 키우려는 72번 수감자 나왈의 간호사는 성경의 모세를 구해준 파라오의 딸을 떠올리게 합니다. 니하드의 운명이 어머니와 동침한 오이디푸스와 유관하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각색된 여러 부분 가운데 가장 제 마음에 와 닿았던 장면은 남매로부터 편지를 받은 아부 타렉이 나왈의 무덤 앞에 가만히 서 있는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아부 타렉은 자신이 알아보지 못했던 어머니이자 자신이 저지른 강간 피해자인 나왈의 무덤에 찾아갑니다. 사실 그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지요. 아부 타렉은 역겨운 전범이지만 니하드는 전쟁의 굴레에 휘말린 소년입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영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아부 타렉에게는 참회의 기회를, 나왈에게는 애도의 시간을 허락했던 건 아닐까요. 아부 타렉은 용서받을 수 없고 나왈은 용서할 수 없지만, 아부 타렉의 참회와 나왈의 애도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