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드보이>에 관한 몇 줄의 문장을 이 세계에 덧붙인다는 것은 드넓고 깊은 바다에 ‘모래 한 알’을 던지는 일만큼이나 무의미하고 또 무쓸모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전은 탄생할 때부터 확장적 해석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지요. 박찬욱 감독의 2004년작 영화 <올드보이>는 일본 작가 츠치야 가론이 글을 쓰고 미네기시 노부아키가 그림을 그린 1996~1998년 일본 연재만화 <올드보이>를 원작 삼습니다. 한국에선 8권짜리 종이책으로 판매 중입니다.
개봉 후 햇수로 20년이 지나면서 단어 ‘올드 보이(old boy)’는 이제 흔히 사용되곤 합니다. ‘올드 보이’란 단어는 두 작품에서 은유적입니다. 나이 든 소년.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도, 만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고토 신이치도, 소년 시절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곤경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영화 <올드보이>는 원작 만화에서 줄거리 뼈대만 가져왔다고 알려졌지만 원작을 읽어보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 운명에 관한 예언과도 같은 작품, 그 자체로도 커다란 비유의 숲을 이루는 걸작의 내면으로 들어가 봅니다.
익숙한 영화 줄거리는 넘어가기로 하고, 츠치야 가론의 <올드보이> 스토리라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야쿠자가 운영하는 사설 형무소 ‘7.5층(7층과 8층 사이 숨겨진 비밀 층)’ 독방에서 30대 남성 고토 신이치가 10년 만에 감금에서 풀려납니다. 고토는 자신을 사설 형무소에 연금한 의뢰인을 찾아 나섭니다.
타고난 복서인 고토는 굴지의 체육관에서 일부러 스파링에 나서고 프로선수였던 상대를 쓰러뜨려 단숨에 유명해져 야쿠자계 내부 정보를 얻습니다. 야쿠자 조직 간부 사이죠의 안내로 고토는 자신을 가둔 범인인 기업 회장 도지마(본명 카키누마)와 만납니다. 복수심에 불탄 고토는 자신과 동갑의 도지마에게 자신을 가둔 이유를 묻지만 도지마 회장은 그런 고토에게 목숨을 건 내기를 제안합니다.
내기의 요체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신의 본명을 알아낼 것. 둘째, 자신이 고토를 폐인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던 학창시절의 ‘그 사건’을 기억할 것. 도지마는 고토가 사건을 기억하면 즉시 자살해주겠다고 제안합니다. 고토가 도지마를 죽이면 그 이유를 영영 알 수가 없게 되겠습니다. 도지마는 고토에게 말합니다.
내가 왜 너를 가뒀는지를 기억해낸다면 승자는 너다. 내가 고백을 하게 된다면 너의 패배겠지. 패자는 죽어주면 돼. 만약 네가 이기면 너만이 납득할 수 있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영화 <올드보이>에서 우진이 대수를 가둔 이유는 우진의 가벼운 혓바닥 때문이었습니다. 영화와 만화의 결정적인 차이는 도지마 회장, 아니 소년 카키누마가 소년 고토에게 받았던 상처의 기억 때문입니다. 후술하겠지만 영화와 만화에서 시작점은 아예 다릅니다. 또 미도가 여주인공으로 설정된 영화와 달리, 만화 <올드보이> 여주인공은 카키누마와 고토를 중학교에서 지도했던 여성 쿠라타 선생입니다. 이미 오래전 교단을 떠난 뒤 소설가로 활동하는 쿠라타 선생은 고토를 도와 카키누마가 낸 문제를 함께 풀어 나갑니다. 영화에서처럼 대수와 미도의 근친상간이나 우진과 수아의 열애와 작별은 원작에 없습니다.
영화 <올드보이>를 보면 한 가지 궁금증이 발생합니다. 우진은 왜 대수의 방에 15년간(만화에선 10년) TV를 설치해뒀을까요. 원작 만화에서도 고토는 TV를 자주 봅니다. 대수와 고토가 내다볼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창이 TV였으니까요. 우진(도지마 회장)이 대수(고토)를 그의 설명대로 폐인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굳이 세상을 들여다볼 TV를 내줄 필요는 없었겠지요. 만화에 나오는 고토의 다음 한마디는 그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그것이 뉴스이든 가요프로든 쇼프로든 연극 영화든 교양 있는 다큐멘터리든 TV에 비치는 것은 모두 픽션이다.’
TV는 삼라만상을 모사하는 가상의 거울입니다. TV는 화면에 보이는 사물과 인물이 현실의 반영이라는 일종의 환상을 인간에게 심어줍니다. 대수는 TV를 보며 운동을 배우고, TV에 나온 여성 가수의 노래를 부르며 수음합니다. TV는 대수의 말처럼 그의 선생님이자 애인이지요.
대수는 TV에서 자신이 살인자로 오해받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가짜(거짓)이지만 고통스럽게도 현실세계에서 규정하는 실재의 자기 자신입니다. 우진이 대수에게, 도지마가 고토에게 하루 24시간 TV 시청을 허락했던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골방에 갇혔더라도 완전히는 미치지 않게 하려는 기능적인 도구였겠지만 이 문제가 간단치가 않은 것이지요.
우진의 기억에 따르면 고교생 대수의 입에서 거짓이 발설되었고 그 거짓이 씨앗이 되어 사랑하던 누나 수아는 상상임신을 한 뒤 합천댐에서 자살합니다. 배가 불러오자 견디지 못하고 댐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지요. 거짓으로부터 잉태된 현실의 고통. 우진은 대수에게 TV를 통해 전형적인 앙갚음을 했던 건 아닐까요. 대수가 7.5층에서 사용하던 유리컵을 아내의 살해현장에 갖다 둠으로써 대수를 아내 살인범으로 꾸몄고 그 거짓말을 TV에 전시하면서 ‘거짓말(가짜 뉴스)로부터 파생된 현실의 고통’을 돌려줬으니까요.
고토는 원작에서 이렇게도 사유합니다. ‘픽션 위에 상상력을 더해 해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카키누마도 대수도 상상력을 덧대 복수를 감행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대수와 미도의 성교 이전부터 우진의 복수는 이미 완성됐던 건 아닐까요.
만화에서 도지마(카키누마)는 버블 시대에 태어나 토지와 맨션을 굴려 천문학적인 자산을 소유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거품이 터지리라 예측할 만큼의 명석한 두뇌로 완전한 부를 이룬 문제적 인물입니다. 도지마가 고토를 10년간 사설 형무소에 연금한 이유는 소년 시절, 고토가 카키누마의 노래에 감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고토는 인기가 많은 호감형의 학생이었습니다. 반면 카키누마는 볼품없는 외모 탓에 따돌림을 받던 아이였습니다. 성적만큼은 ‘학년 톱’이었지만 늘 비웃음의 표적이었죠. 이후 성인이 된 카키누마는 작은 교통사고를 핑계로 성형수술을 한 뒤 다른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날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음악시간에 카키누마는 반 친구들 앞에서 가창과제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음침한 노래를 들으며 모두가 낄낄댔지만 고토만은 한 급우가 부른 노래 음색에 감동하여 진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일은 금세 잊어버렸지요. 카키누마에게 고토의 눈물은 평생 그를 흔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데, 카키누마는 선천적으로 인간을 불신하며 살아왔는데 고토의 눈물은 자신의 그런 신념을 파괴하고 괴롭히는 중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자신이 완전한 명성과 지위를 얻었을 때 ‘평생 자신의 자아를 괴롭힌’ 고토를 찾아내어 복수극을 꾸민 것이었습니다. 카키누마는 원망하며 말합니다. “내 생애에서 너만이 나의 고독을 알아차린 것이다. 굴욕이었다. 네 놈만 없었다면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영화에서 대수와 미도의 근친상간은 그리스 비극에서 논해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해석됩니다. 전해오는 글에 따르면 박찬욱 감독은 오이디푸스에서 이름 ‘오대수’를 빌려오기도 했다지요. ‘오이(오)디(대)푸스(수). <올드보이>와 오이디푸스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유는 주인공이 상대에게 복수하려 나서는 과정, 즉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과정이 자신도 모르던 딸과의 근친상간을 밝히는 여정이 되어버린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사건 전말을 알게 된 뒤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처럼 대수 역시 혀를 가위로 잘라버리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근친상간이 등장하지 않는 원작 만화 <올드보이>에선 그리스 비극의 오디이푸스보다도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가 더 어울리는 해석일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소년 카키누마는 바로 미노타우로스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타우로스는 인간과 소의 수간을 거쳐 만들어진 반인반수 괴물로 미궁 라비란토스에 갇히지요. 도지마는 자신의 긍정적인 면(음악시간의 음색)과 부정적인 면(수치심과 설욕, 복수심)이 혼재됐던 인물입니다. 그는 부와 권력을 사용해 칸막이가 없는 사각형 독방에 고토를 감금했습니다. 그러나 고토가 정작 10년의 감옥생활을 끝낸 뒤 미궁 밖을 나가 여정 끝에 발견한 건 여전히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년에 갇혀 자생적인 미노타우로스, 바로 동급생 카키누마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원작 만화에서 전 교사이자 여성 작가인 쿠라타 선생의 필명은 구사마 야요이로, 이는 실재하는 일본 미술작가의 이름에서 빌려왔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미술작가인 구사마 야요이는 현재 가장 유명한 세계적 작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 <초록 호박>은 지난 3월 열린 2023년 홍콩 아트바젤에서 한화로 약 78억원에 팔렸습니다. 아주 유명한 작가이지만 그는 어린 시절에 큰 아픔을 겪은 인물로, 평생을 강박증과 질환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나는 예술을 한 게 아니라 치유의 행위를 했다”라고 밝히기도 했지요.
<올드보이>의 원작자가 그런 구사마 야요이를 쿠라타 선생의 필명으로 사용한 건 우연이 아닐 겁니다. 도지마도 어린 시절의 극복하려 10년 동안 고토를 가둬두었고 그래서 이런 ‘게임’을 진행했겠지요. 따지고 보면 우리는 어린 시절의 한 사건이나 한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운명의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게 삶이겠지요. 그래서인지 만화 <올드보이> 후반부에 쿠라타 선생이 고토에게 던지는 한 마디 말은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마치 내 소설의 주인공 같아. 고난 속에 서 있는 한 마리의 야수처럼.”
김유태 매일경제 문화스포츠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