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국의 슈퍼스타들이 파리를 점령했다. BTS의 지민, 제이홉, 슈가, 블랙핑크의 지수, 제니, GD, 태양, NCT 텐 등 K팝 가수는 물론 박서진, 문가영, 김고은 같은 대세 K배우까지. 미국의 빌보드도 주목했다. ‘지수(Jisoo)부터 G-Dragon까지, 2023 파리패션위크의 베스트 드레싱 K팝 스타는 누구일까? 당신의 선택은’ 빌보드 칼럼니스트 제프 벤자민의 칼럼 제목이다. 우리 최정상 연예인들이 앞다투어 찾는 파리의 특별한 주간. 파리패션위크(PFW·Paris Fashion Week).
패션위크는 파리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패션위크 세계 4대 천왕, 뉴욕, 런던, 밀라노, 그리고 파리. 이들 4개 패션위크의 카르텔은 단단하다. 뉴욕, 런던, 밀라노, 파리의 패션쇼는 마치 하나의 프로그램처럼 정교하게 일정을 맞추어 순차적으로 열린다. 이 일정을 따라 패션계의 아이콘들이 도시와 도시를 이동한다. 매년 두 차례(F/W, S/S) 뉴욕에서 시작해 파리에서 마치는 일정으로 글로벌 패션위크는 진행된다.
3월 7일. 샤넬(Chanel)과 미우미우(MiuMiu)의 쇼를 마지막으로 2023 F/W 파리패션위크가 막을 내렸다. 파리에 모였던 전 세계 패피(fashion people)들은 쉴 틈도 없이, 다시 가을에 시작될 S/S 패션위크를 위해 달릴 것이다. 오늘은 패션 전문가의 눈이 아니라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관점에서 2023 상반기 파리패션위크만의 차별화된 새로운 트렌드를 살펴보고자 한다. 키워드는 ‘확장, 미학, 기회’.
패션이 디자이너가 구현한 작품이라면, 패션쇼는 이를 대중에게 알리는 공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패션 브랜드의 총괄 디자이너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 부른다. 영화감독처럼 디렉터는 패션쇼라는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통해 서로 다른 영역의 재능을 집중시켜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클래식한 패션쇼의 존재 이유에서 파리패션위크는 한발 더 나아간다.
칸, 베니스, 부산 등 국제영화제처럼 대중예술 장르로서의 패션산업의 정체성을 글로벌 관점에서 재정의하고 있다. 전 세계의 이목을 한순간에 집중시켜 잠재적 고객층을 확대하고, 이러한 대중적 관심을 통해 패션계에서 성공하고 싶은 기업들을 끌어들이는 컨벤션 효과가 그것이다. 세계적인 파급력을 가진 매체로서의 K스타들을 파리의 명품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초청, 활용하는 것도 패션위크를 통해 패션이 대중문화산업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서울패션위크도 한국이 세계 최고를 달리고 있는 대중문화 역량을 활용한다는 관점에서 패션위크를 새롭게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국가의 패션 디자이너와 브랜드도 초청해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쇼로서의 국제패션축제의 장으로 성장시켜 보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파리만의 독특한 패션위크 특징이라면 오트 쿠튀르(Hau te Couture)를 들 수 있다. 영어로는 하이패션, 우리말로는 맞춤옷으로 해석될 수 있다. 패션위크는 기성복(불어로는 pret a porter)을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파리는 기성복 패션위크 전에 맞춤옷 패션위크를 진행한다. 샤넬, 디오르, 펜디 등 명품 브랜드들 이 외에도 우리나라 박소희(Miss So Hee) 디자이너와 같이 라이징 디자이너들도 초청받는 이 독특한 패션위크는 맞춤옷이라는 특성답게 미학적 측면이 강하게 부각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색으로 페인팅하고 3만 개의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을 정성스럽게 붙여 장식한 미국 가수 도자 캣(Doja Cat), 마치 극사실주의 작품 같은 동물 머리 의상을 입은 모델 이리나 사크와 카일리 제너 그리고 나오미 캠벨까지. 지난 1월 23일 시작된 2023 파리 오트 쿠튀르 패션위크는 시작부터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 관심의 주인공 이탈리아 브랜드 스키아파렐리(Schiaparelli)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니엘 로즈. 그는 시인 단테에게서 받은 영감을 구현했다고 한다. 입기에 불편해서 명성을 잃었던 브랜드가 여전히 입기에 불편하지만 다시 주목받는 이유. 바로 패션이 대중을 향하면서도 가치는 예술을 꾸준히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우영미 쇼도 런웨이 배경에 한지를 모티브로 한 영상을 배치하여 한국적 예술미를 높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다양한 예술적 실험들이 페브릭이라는 캔버스와 쇼라는 갤러리를 통해 구현되고 경쟁하는 패션의 전쟁터. 그리고 SNS로 대변되는 모바일의 작은 화면과 짧은 숏폼 영상에 적합한 새로운 미학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도시가 파리다.
파리의 기회는 세계 최고 명성에게만 주어진 건 아니다. 오히려 파리를 강하게 만드는 건 최고가 되기 위해 영혼을 갈아 넣고 있는 실력 있는 도전자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재봉틀 하나로 시작해 30년이 되기도 전에 기업가치 1조원에 이르는 브랜드로 성장한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프랑스 남부 작은 마을 출신으로 유년의 기억을 모티브로 급성장한 자크뮈스(Jacquemus). 제2의 이자벨, 자크뮈스를 꿈꾸는 이들에게도 파리패션위크는 기회의 장이다.
패션위크 기간 모인 영향력 있는 리더들을 향한 도전자들의 각별한 구애가 집중되는 시기 또한 패션위크다. 파리의 서민들이 사는 11구의 낡은 창고를 개조한 공간을 쇼룸으로 선택한 26살의 젊은 디자이너 메트레피에르(Maitrepierre). 그의 패션에는 요즘 MZ세대가 지향하는 가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재활용한 소재로 만든 원단, AI가 디자인한 패턴, 그리고 이 젊은 디자이너는 60대 모델을 자신의 피날레 무대에 세우는 용기로도 주목을 받았다.
우리 패션업계도 파리패션위크에 다양한 방식으로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발망(Balmain) 디자이너로 일하다 자신의 브랜드 YLLVV16을 론칭하며 주목받고 있는 박정미 디자이너. 올해 트라노이 전시회에 참가해 관심을 받은 여성복 브랜드 므아므(MMAM)의 박현 디자이너. 세계를 향한 우리 디자이너들의 도전도 당차다.
패션은 삶의 모든 것이다. 그 삶의 핵심을 아주 짧은 순간에 화려하게 구현한 패션쇼에 대중은 열광한다. 세계의 대중문화를 열어가는 K컬처. 패션이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야, 너도 할 수 있어.’ 2023 파리패션위크가 대한민국을 자극한다.
조우석 칼럼니스트
현재 주프랑스대사관 참사관 겸 영사로 일하고 있다. 주미대사관과 유네스코대표부 공공문화외교국, 대통령실 행정관(의전)을 지낸 외교부 문화외교분야 전문가다. 인스타그램(@mrcho_a_poet)에서 조작가라는 필명으로 활동 중이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51호 (2023년 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