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말에 찾은 파리의 방돔 광장은 매서운 추위가 무색할 만큼 뜨거운 열기로 후끈했다. 명품 브랜드들의 오트 쿠튀르 쇼 주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패션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럭셔리 주얼러들이 한 해 동안 갈고 닦은 새로운 하이 주얼리 컬렉션도 선보인다. 전시장마다 창의성과 예술혼을 불태우며 브랜드의 가치와 비전을 전달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제품들로 속속 채워졌다.
팬데믹을 기점으로 하이 주얼리 수요가 큰 폭으로 상승했는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작년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국내에서 하이 주얼리 행사를 개최한 브랜드를 꼽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전통 주얼리 브랜드뿐 아니라 ‘샤넬’ ‘루이비통’ ‘디올’ ‘돌체앤가바나’ 같은 패션 브랜드에서도 본격적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기존 고객에게 하이 주얼리까지 팔겠다는 패션 공룡들의 공격적인 행보는 이 시장의 성장세를 반증한다. 하이 주얼리는 로망의 충족이든 투자의 목적이든 남들이 갖지 못한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최고의 욕망을 상징한다. 하지만 값비싼 명품 주얼리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만의 고유한 안목과 취향을 드러내고 싶다면, 하이 주얼리의 최신 동향을 알아야 한다. 과연 이 세계는 지금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파인 주얼리는 14K 이상의 골드나 플래티넘, 천연 보석을 사용한 주얼리를 통칭하는 용어다. 일반적으로 대량생산의 요소와 수작업이 공존한다. 상당한 작업 시간과 전문 기술이 필요하지만, 숙련된 기술자라면 수 시간 만에도 완성할 수 있다.
반면 하이 주얼리는 까다로운 선별 작업에서 살아남은 최상의 소재에 예술성을 담아 수작업으로 완성한 최고급 주얼리를 지칭한다. 파인 주얼리보다 ‘더 높은’ 장인 정신과 기술력이 요구되며, 하나를 만드는 데 수백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다반사다. 두 카테고리가 겹치는 지점은 있지만 제작 과정과 가치 평가 기준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하이 주얼리는 한마디로 주얼리계의 오트 쿠튀르라고 할 수 있다. 귀한 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투철한 장인 정신으로 우리 삶에 창의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예술적인 수공예 작업이다. 이 때문에 가격의 압박이 크지만 브랜드마다 하이 주얼리에 대한 기준과 정책이 다르므로 가격만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사용되는 보석도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미얀마산 ‘피전 블러드’ 루비라고 해도 대량생산된 틀에 끼워진 무료한 디자인이라면 과연 하이 주얼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히려 비전형적인 소재여도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하이 주얼리로 거듭나는 게 이 세계의 현실이다.
‘부쉐론’은 라탄과 운석, 대리석 조약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다이아몬드를 티타늄에 세팅했다. ‘돌체앤가바나’는 매머드의 상아를, ‘구찌’는 200년이 넘은 마이크로 모자이크를 재활용했다. 이들은 모두 뜻밖의 소재를 유쾌한 예술로 승화시켜 디자이너의 상상력과 장인 정신, 예술적 기교가 돋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전통과 창조에 그치지 않고 실험정신이 깃든 혁신과 헤리티지의 조화가 관건인 시대다.
하이 주얼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얼러의 예술성, 필살기 노하우, 최고의 장인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엄격한 기준으로 선별한 젬스톤, 혁신적이거나 뛰어난 기술력, 독창적인 디자인, 디자이너의 상상력과 스토리를 풀어가는 능력, 무결점의 완성도를 다 따져야 한다. 어느 각도에서든 완벽해야 하기 때문에 앞, 뒤, 옆, 잠금 장식, 중간 고리, 부속품 모두 중요하다.
심플해 보이는 솔리테어 반지라 해도 하이 주얼리라면 황금 비율과 폴리싱, 세팅 같은 디테일을 완성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투입된다. 부피가 커도 인체공학적인 설계와 편안한 착용감은 필수다. 만약 파베 세팅(크기가 작은 보석을 촘촘하게 도로 포장하듯 세팅)된 부분이 옷에 걸리거나 매끄럽지 않다면 디자인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걸러야 한다.
컬러 스톤은 모든 조건이 같다면 색이 가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때 공신력 있는 감정원에서 발행한 리포트(감별서)가 핵심 역할을 한다. 감정원 리포트는 과학적인 관찰과 분석을 토대로 정리한 의견서다. 그리고 그 종착역은 주얼리의 가치 판단이다.
소위 귀보석으로 불리는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는 처리 여부와 정도에 따라서 가격이 크게 달라진다. 고품질의 보석 중 미얀마, 카슈미르, 스리랑카 등 명성 있는 산지에서 채굴된 경우 프리미엄이 붙을 수 있다. 감정 및 감별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최근에 발급된 리포트일수록 신뢰도가 높아진다.
그렇다면 모든 제품에 리포트가 필요할까? 사용된 보석이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파라이바 투르말린 등 값비싸고 처리 여부나 원산지가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종류일 때는 필수다. 하지만 아주 작은 사이즈의 보석들이 그룹으로 세팅된 경우에는 브랜드에서 제공하는 제품 정보만으로 충분하다. 이때는 디자인과 보석의 조화, 장인 정신, 브랜드, 예술성 등으로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 물론 믿을 만한 브랜드일 경우이다.
하이 주얼리는 제작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지만 이 과정은 시간을 담는 작업이기도 하다. 태동하는 순간의 시대적 분위기와 문화적인 영향도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를 돌이켜볼 때 가장 가치 있는 주얼리는 희소성이 높은 보석에 최고의 기술과 독창적인 디자인, 그리고 ‘시대정신’이 반영된 것들이었다. 자연이 창조하고 인간이 다듬으며 개인의 역사와 유산으로 남을 가장 빛나고 매혹적인 존재, 하이 주얼리의 전성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윤성원 주얼리 칼럼니스트·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