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인간 욕망과 필연적 재앙’이라는 심오한 주제를 알레고리로 만든 영원한 문제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07년 칸영화제에서 공개된 뒤 2008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최고상인 작품상을 포함해 각본·각색·남우조연상까지 4관왕을 달성할 만큼 마니아층이 탄탄한 영화이지요.
미국 현대문학 거장인 코맥 매카시의 동명 소설을 원작 삼아 ‘고난 받는 영혼과 불가능한 구원’이란 주제를 추격전의 서사로 풀어나간 독특한 매력을 지닙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연옥을 생중계로 바라보는 것인 양 영적 격언이 가득하고, 인간의 불행이 어디로부터 발생하는가를 탐구하는 역작이지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심연으로 들어가 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만 보면 노인복지에 관한 작품처럼 비쳐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황량한 미국 서부의 어느 외딴 마을. 장총으로 영양을 사냥 중이던 용접공 출신 르웰린 모스는 쌍안경 저편에서 미심쩍은 자동차를 발견합니다. 언덕을 내려가 살펴보니 그곳엔 묻히지 못한 시체들이 수습되지 못한 채 죽어 있었습니다. 피 냄새를 맡고 날아온 파리 떼가 윙윙거리고 모래 먼지로 자동차 유리창이 뿌옇습니다. 마약 밀매 현장임을 직감한 모스는 200만달러가 든 돈 가방을 들고 도주합니다. 하지만 돈 가방엔 위치추적 장치가 내장돼 있어 돈 가방 주인 안톤 시거가 모스를 추격합니다.
도축용 공기총으로 사람 이마에 쏴 살해하는 괴취미를 가진 잔혹한 킬러 안톤 시거는 재앙처럼 모스와 거리를 좁혀갑니다. 코엔 형제는 모스와 시거라는 인물을 통해 욕망과 재앙의 상관관계라는 추상적 관념을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관계망을 통해 스크린에 전시합니다. 사이코패스 안톤 시거가 ‘의인화된 재앙’을 의미한다는 관점은 사실 이제 널리 알려진 이 영화의 전통적 해석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시거는 ‘스스로 걸어 다니는 재앙’을 상징합니다.
모스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함으로써 죽음의 운명에 처했고 모스가 욕망한 대가를 시거는 오직 자기 의지에 의한 죽음으로서 앙갚음하려 합니다. 움직이는 재앙, 그리고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재앙인 시거는 외적으로나마 재앙의 공정성(Fairness)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동전 던지기 게임의 결과(앞면과 뒷면)를 통해 상대의 생사를 결정하지요.
소설과 영화에 공히 나오는 대사 “이미 걸었소. 당신은 당신 인생의 전부를 걸었지. 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책 67쪽), “어느 순간 당신은 선택을 했어. 다 거기서 초래된 일이지. 그림은 그려졌고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도 지울 수 없어. 내가 당신 인생에 끼어들었을 때 이미 당신은 끝난 셈이었어”(책 283~284쪽)란 대화는 인간이 역류할 수 없는 필연적인 죽음과 그에 따른 태생적인 무력감을 느끼게 합니다. 시거의 눈으로 본다면 결국 우리네 인간의 삶이란 결국 욕망과 재앙 사이의 한바탕 춤이 아닐까요.
영화 해석이 ‘재앙으로서의 시거’에 집중되다 보니 작품에 담긴 다채로운 주제의식이 희미해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원작자 매카시는 자칫 ‘돈 가방 추격전’이라는 익숙한 플롯의 영화에 ‘혼돈과 불안의 현대’라는 주제를 삽입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모스와 시거의 추격전에 이 두 사람의 행방을 따라가는 보안관 에드 톰 벨을 끼워 넣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매카시는 모스, 시거, 벨이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 전체를 이 영화의 인질로 삼습니다. 벨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의 제목이 왜 ‘노인’인지부터 설명이 가능하지요.
책의 서두엔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가 4페이지에 걸쳐 인용되어 있습니다. 영화 제목은 첫 문장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저것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에서 따왔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이츠는 시에서 노인에 대비되는 젊은 세대를 ‘죽음의 세대(Dying Generations)’로 정의합니다. 젊은 세대가 죽음의 세대인 이유는 ‘감각’에 도취되어, 또 관능의 음악에 취해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늙지 않는 지성(Unaging Intellect)’에 무감각합니다. 이때 노인은 단지 나이 든 인간을 뜻하지 않고 그 나이가 되기까지 그들이 축적해 왔던 지성과 그 지성인 무리 전체를 함의합니다. 결국 ‘지성으로부터 탈주해버린 현대사회의 무질서와 혼돈을 경계하라’가 예이츠 시의 핵심주제이지요.
이제 이 시를 영화와 소설의 인물에 대입해볼까요. 예이츠 시에서 ‘감각’이란 영화 속 모스가 훔친 물질 욕망(돈 가방)의 다른 말이 됩니다. 모스는 그에게 달려드는 시거와 함께 ‘죽음의 세대’이지요. 한편, 지성인으로서의 노인(벨)은 혼돈의 세계를 살아가는 부적응자입니다. 보안관 벨의 관점에서, 이 세계는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도저히 지성의 합리성과 인간으로서의 절대적 윤리를 찾아볼 수 없는 혼돈의 나락이지요.
벨이 소설에서 기술하는 첫 독백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합니다(소설 각 장의 첫 부분은 한 노인의 반복적인 독백으로 채워져 있는데, 아마도 보안관 벨의 독백으로 추정됩니다). 벨은 14세 여아를 잔혹하게 살해한 19세 소년범을 가스 처형실로 보냈던 옛일을 떠올리고는 “자기의 기억이 미치는 아주 오랫동안 아무나 죽일 계획을 품고 있었다고 했다”(책 11쪽)고 씁니다. 이 소년은 스스로 자신이 재앙임을 자임하고 있으며, 시거는 이 소년의 환생체로 읽힙니다.
지성을 상실해 존재 가치를 향유하지 못한 혼돈의 인간은 결국 다가오는 재앙의 접근과 총격을 깨닫지 못하고 느닷없는 죽음의 습격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영화만의 허구일까요. 모든 우리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재앙의 숙명적인 노예가 아니었던가요.
그렇다면 혼돈의 세계가 탄생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우선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80년대 미국인의 불안감은 오일쇼크 이후의 경기불황과 베트남전이 주된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선 베트남전이 중요하게 거론됩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모스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었고, 극 중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지만 모스를 쫓던 카슨 웰스 역시 베트남전 특수부대 중령 출신입니다. 아울러 베트남전은 아닐지라도 보안관 벨 역시 ‘옛 전쟁 영웅’으로 묘사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미국식 질서를 옹호했던 세 인물은 모두 시거에 의해 곤경에 처하거나 결국 사망합니다. 이것은 뭘 의미할까요. ‘세계의 경찰’을 자임해 온 미국은, 벨을 통해 상징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력한 보안관일 뿐이며, 시거의 본격적인 등장 이후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의 세계로 물들어가지요. 벨은 과거에 젖어 있을 뿐이지 현재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단 한 가지도 전환하거나 타개하지 못했습니다. 벨은 결국 ‘미국=경찰=질서’란 도식이 해체된 시대의 버림받은 주인공입니다. 해체된 시대의 주범이지요. 혼돈스러운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누가 오고 오지 않는가를 결정하는 사람이 바로 나니까.”(책 274쪽)
시거 역시 작품 후반부에서 사고를 당하며 그 역시 한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음은 또 다른 ‘주체’를 의심하게 합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지요. 시거 역시 죽음의 대리자였을 뿐 죽음 그 자체일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봐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해석이 정말 까다로운 작품입니다. 천 명이 자기식대로 의미를 되짚는다면 천 가지 해석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작품 내내 작중 인물 사이에서 ‘물의 이미지’가 반복된다는 점, 수미쌍관으로 반복되는 동전 던지기 게임과 그 오묘한 결과 등도 다뤄볼 만한 주제이지요. 그중에서 모두가 가장 난해하다고 여기는 지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안관 벨이 털어놓는 두 가지 꿈의 의미입니다.
과거 벨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두 번 꾸었습니다. 첫 번째 꿈은 아버지가 주신 약간의 돈을 아들이 잃어버린 꿈이고, 두 번째 꿈은 벨을 보지 못한 아버지가 고개를 숙인 채 앞질러 간 뒤 벨 앞에서 불을 피우는 꿈입니다. 소설 속 문장엔 단서가 숨겨져 있습니다. 소설에서 꿈 얘기에 앞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돈에 팔린 존재이다.”(책 333쪽)
물질 욕망이 클수록 주체는 세계로부터 자기를 제거당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시거에 의해 제거당한 모스와 달리 보안관이 살아 있을 수 있던 결정적인 이유는 벨이 꿈에서나마 욕망의 상징으로서의 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버지는 벨에게 욕망을 물려줬지만 그 욕망을 무의식적으로나마 상실함으로써 벨은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잃어버린 욕망의 주체는 결국 죄인처럼 자신의 후대(아들 벨)를 위해 어두운 자리에 스스로 나아가 불을 켜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인의 자리는 결국 이승에 있지 않고 저승의 뒤안길에 준비되어 있는 것이지요. 혼돈의 세계에서 노인은 자의와 타의에 의해 뒤꼍으로 물러날 수밖에요. 그러나 지성이 떠난 자리는 여전히 공허합니다. 그것이 물질 욕망이 불가피한 현대문명의 또 다른 초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