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만에 부활한 80년대 부의 상징 ‘각 그랜저’ 원조 디자인 계승… 기술 더하고 예술 입혔다
원호섭 기자
입력 : 2022.10.27 16:13:48
수정 : 2022.10.27 16:14:11
지난 10월 19일 외관이 공개된 7세대 신형 그랜저 대기 고객이 8만 명을 넘어섰다. 지난 7월 말 3만 명이던 대기 고객은 불과 두 달 사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신차 제원을 비롯해 가격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같은 반응은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7세대 그랜저는 올 초부터 1세대 그랜저로 알려진 ‘각 그랜저’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을 적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최근 완성차 업계에서 불고 있는 ‘레트로(복고풍)’ 바람이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업계는 차 반도체 부족에 따른 출고 적체 현상이 길어지면서 차를 조금이라도 빨리 받기 위한 수요가 합쳐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현대차 디 올 뉴 그랜저
▶파격적인 내외관 모습에 관심 폭발
업계에 따르면 신형 그랜저 예약자 수는 지난 9월 7만 명을 넘어섰다. 지난 7월 말 예약 대기자는 3만 명, 8월 초 4만 명이던 예약 대기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한 현대차 대리점 관계자는 “신형 그랜저 출시 일정과 계약을 묻는 전화가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온다”고 말했다. 이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신차 출시 전 계약자만 10만 명에 달할지 모른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여기에 신차가 출시된 후 시작되는 정식 계약까지 더하면 한국 완성차 역사상 역대 최대의 사전 예약자 수 기록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소비자의 취향이 고급화되면서 그랜저는 쏘나타에 이어 국민차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2016년 출시된 6세대 그랜저는 기존 대비 젊은 감각의 디자인을 선보이며 ‘성공한 사람이 타는 차’에서 3040세대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현재 도로 위를 다니는 그랜저는 총 151만3057대인데 이 중 6세대는 63만4759대로 42%에 달한다. 역대 그랜저 중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이기도 하다.
그랜저 6세대는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국내 승용 부문 판매 1위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다. 과거에도 판매량 부문에서 그랜저가 1위를 차지한 적은 있었지만 최근 추세처럼 압도적으로 1위를 달린 적은 없었다. 국민차가 쏘나타에서 그랜저로 확실히 바뀐 셈이다. 이 같은 추세라면 그랜저는 올해도 베스트셀링카에 오를 확률이 높다. 지난 8월 판매량은 4893대로 7월 대비 36%가 줄었는데 이는 아산 공장에서 아이오닉6 생산에 따른 생산량 조정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4분기 출시를 앞두고 있는 7세대 신형 그랜저는 6세대 대비 차체가 커졌을 뿐 아니라 동급인 기아의 K8이 사륜구동 기능을 제공하고 있는 만큼 같은 옵션이 탑재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네 개의 바퀴가 모두 작동하는 사륜구동은 고속 주행 안정성이 뛰어나고 눈길이나 빗길에서도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는 장점 때문에 최근 세단으로 범위가 확대되는 추세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7세대 그랜저가 1세대 그랜저가 갖고 있는 특유의 ‘각’ 디자인을 얼마나 계승했는지 여부다. 최근 현대차가 공개한 7세대 그랜저 티저 이미지에는 직선을 강조한 도어와 수평으로 배치된 후면부의 리어램프 등이 드러나면서 각 그랜저로 잘 알려진 1세대 디자인을 계승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1세대 그랜저는 현대차가 일본 미쓰비시와 공동 개발한 차량으로 국내에서 최고급 세단으로 인기를 끌었다. 실제 위장막을 한 상태로 도로 위를 다니고 있는 7세대 그랜저의 사진이나 주행 영상 등이 이미 많이 노출됐는데, 스타리아의 앞모습을 연상시키는 헤드라이트를 비롯해 뒷좌석에 있는 C필러 부분이 1세대 그랜저를 연상시켰다.
19일 공개된 외관 디자인은 차량 후미에서 트렁크와 천장을 이어주면서 날렵하게 뒤로 뻗은 기둥(C필러)과 삼각형 창문, 독특한 스티어링 휠(운전대) 등이 1세대 그랜저에서 가져온 디자인 요소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각 그랜저의 이미지에 기존의 그랜저가 갖고 있던 젊은 감각을 가미해 6세대 그랜저와 마찬가지로 3040세대를 공략할 것”이라며 “여기에 큰 차를 선호하는 최근 트렌드에 맞춰 기존 그랜저 대비 차체도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7세대 그랜저가 화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각 그랜저가 갖고 있는 이미지 때문이다. 최근 언론 등에 1세대 그랜저를 보유한 차주가 등장하거나, 1세대 그랜저를 비싼 돈 주고 구매해 수리해 타는 사람들이 소개가 되는 등 완성차 시장에서 ‘복고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아이오닉5를 비롯해 쌍용자동차의 토레스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랜저·토레스… 복고의 시대
최근 국내 완성차 시장에서 복고 열풍의 시작을 알린 차는 아이러니하게도 자동차보다는 ‘모빌리티’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전기차 아이오닉5다. 현대차그룹이 전용 플랫폼을 적용한 첫 전기차인 아이오닉5는 대한민국 최초의 승용차인 ‘포니’를 재해석한 모델이다. 기존 포니가 갖고 있던 느낌을 살리면서 현대적인 요소를 덧붙여 일명 ‘모던하면서도 클래식한’ 느낌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를 기반으로 아이오닉5는 2030세대뿐 아니라 5060세대 공략에도 성공했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8월까지 아이오닉5 누적 판매량 2만6712대(법인·개인사업자 제외) 가운데 60대 이상 구매자가 36.7%(9807대)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50대 고객(6866대)까지 합하면 전체의 62.4%에 달한다.
올해 국내 완성차 시장에서 복고 열풍을 이어간 차종을 꼽으라면 쌍용차의 토레스를 빼놓을 수 없다. 7월부터 판매를 시작한 토레스는 9월 4781대가 판매되며 판매량 부문에서 국내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현대차와 기아 외의 브랜드가 전체 판매량 부문에서 3위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토레스는 출시 전 스케치가 공개됐을 때부터 과거의 무쏘를 연상시키는 굵은 디자인으로 호평을 받았다. 실제 출시된 차의 디자인도 스케치와 크게 다르지 않아 소비자들이 열광했다.
현대차가 최근 그랜저 출시 35주년을 맞아 1세대 그랜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든 전기차 ‘그랜저 헤리티지’를 공개했다.
이는 토레스의 사전계약 대수가 말해준다. 토레스의 첫날 사전계약 대수는 1만2383대로 쌍용차가 출시한 신차 사전계약 물량 중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완성차 업계에서 사전계약 1만 대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동안 사전계약 1만 대를 넘긴 차량은 2019년 그랜저, 2020년 아반떼와 쏘렌토, 2021년 투싼과 스포티지를 비롯해 아이오닉5와 EV6 등 국민차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한 모델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현대차와 기아 외의 브랜드가 사전계약 1만 대를 돌파한 것은 2016년 르노코리아자동차의 SM6 이후 6년 만의 일이다. 쌍용차는 과거 인기 모델 ‘코란도’를 계승한 ‘KR10’ 프로젝트도 내년 중 선보이며 복고 열풍을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수입차 업체도 복고 열풍에 가세하는 추세다. 포드코리아는 올해 3월 국내에 SUV 뉴 포드 브롱코를 선보였는데 이 모델은 1966년 출시돼 1996년 단종된 포드 1세대 브롱코를 계승하고 있다.
업계는 완성차 시장에서의 복고 열풍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전기차 전환으로 자동차 산업이 급변하는 과정에서 소비자들은 오히려 아날로그적인 외관 디자인을 봤을 때 보다 안정적인 마음을 갖게 된다는 분석부터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 너무 곡선에 치우쳐 있다 보니 오히려 거부감을 일으키면서 복고 열풍이 강화됐다는 설명도 나온다.
▶출고 지연 흥행에 차질?
하지만 신형 그랜저의 사전계약 대수 증가를 단순히 ‘선호’와 ‘기대’로만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차 반도체 부족에 따른 출고 지연 현상 때문이다.
사실 현대차는 지난 8월, 신형 그랜저에 대한 사전계약을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차 반도체 부족으로 지금 생산되고 있는 6세대 그랜저의 출고 대기 기간도 옵션 등에 따라 3~6개월에 달하기 때문이다. 인기 차종인 그랜저 하이브리드는 10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출고 대기가 긴 상황에서 신형 그랜저 사전계약을 받으면 6세대 그랜저를 계약한 고객들의 출고 기간이 뒤로 더 밀릴 수 있다. 하지만 예약을 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자 대리점에서는 6세대 그랜저로 계약을 먼저 받고, 신형 그랜저가 출시될 때 계약을 바꾸는 ‘전환계약’을 이어가고 있다.
현대차 디 올 뉴 그랜저 내부.
업계 관계자는 “차 반도체 부족 현상이 올해 말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분위기인 만큼 조금이라도 차를 빨리 받기 위해 사전 예약자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제원은 물론 차량 가격도 공개되지 않은 차에 너무 많은 고객들이 예약을 걸어놓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그랜저의 경우 옵션을 조금 넣으면 3000만원대 후반에서 4000만원에 달하는 만큼 가격대가 만만치 않다.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4000만원대 차량의 사전계약을 무분별하게 받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그랜저의 월간 생산량이 올해 들어 3000~ 7000대인 만큼 현재 예약된 차량이 출고되는 데만 10개월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차를 받고 싶은 마음에 사전계약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