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이어지는 폭염이 산업계의 기술 경쟁 지형까지 바꾸고 있다. 자동차와 배터리, 타이어 등 모빌리티 산업을 중심으로 고온 환경에서 제품 성능과 안전성을 유지하는 ‘열 관리’가 새로운 핵심 경쟁력으로 떠올랐다. 과거 차량의 출력이나 전기차의 주행거리 확대에 집중됐던 기술 경쟁이 이제는 폭염 속에서도 배터리와 구동계, 실내 온도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관리하느냐로 확장되는 모습이다.
특히 전기차 시대에 열관리는 단순한 냉방 기술을 넘어 차량의 기본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기술로 자리 잡고 있다. 배터리가 지나치게 뜨거워지면 충전 속도가 떨어지고 배터리 수명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심할 경우 셀 내부에서 발생한 열이 주변 셀로 확산하는 열전파(Thermal Propagation)와 열폭주(Thermal Runaway) 위험까지 커진다. 반대로 에어컨 가동에 많은 전력을 사용하면 실제 주행거리가 줄어든다. 폭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운전자와 전기차 모두 ‘퍼질 수 있는’ 셈이다.
이에 완성차와 부품업체들은 차량 안팎의 열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연구개발(R&D)을 확대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등 계열사별 기술력을 바탕으로 실내 공조부터 배터리·구동계 냉각까지 전방위적인 열관리 기술 고도화에 나서고 있다. 폭염 등 극한 환경에서도 탑승자의 쾌적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전기차의 주행거리와 충전 성능, 배터리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현대차는 차량으로 들어오는 열 자체를 줄이는 기술에 공을 들이고 있다. 태양열 반사와 차량 내부 복사열 방출을 동시에 구현하는 ‘나노 쿨링 필름’을 개발해 햇빛에 따른 실내 온도 상승을 억제하는 방식이다. 차량 내부 온도가 낮아지면 에어컨 사용에 필요한 전력을 줄일 수 있어 탑승자의 쾌적성뿐 아니라 전기차의 실질적인 주행거리 개선에도 도움이 된다.
현대모비스는 전기차 배터리에서 발생하는 열을 보다 직접적으로 제거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배터리 셀을 직접 냉각하는 ‘진동형 히트파이프’다. 초급속 충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열을 효과적으로 제어해 배터리 성능 저하와 열폭주 위험을 낮추는 데 초점을 맞췄다. 충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짧은 시간에 많은 열이 발생하는 만큼 냉각 성능은 향후 초급속 충전 경쟁에서도 핵심 변수로 꼽힌다.
현대위아는 실내 공조와 배터리, 모터 등 차량 곳곳에서 발생하는 열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통합 열관리 시스템 개발에 힘을 싣고 있다. 미래차 열관리 기술 개발과 생산 기반 구축 등에 총 5000억원을 투자한다. 2030년까지 창원 공장 열관리 생산라인과 R&D·부품 클러스터 구축에 2000억원, 미래차 열관리 기술과 생산 고도화 등 친환경사업 R&D에 1800억원을 투입한다. 슬로바키아와 인도 등 해외 열관리 부품 생산 기반 확충에도 1200억원을 배정했다.
의왕연구소 열관리 시험동에서는 영하 30℃에서 영상 65℃까지 극한 환경을 구현해 냉난방과 배터리 열관리 성능을 검증하고 있다. 모듈과 시스템, 차량 단위에서 1200회가 넘는 성능·내구 시험을 진행한다. 전기차 특성을 고려해 공조장치 소음을 30~35㏈ 이하로 낮추는 기술도 개발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차그룹의 열관리 기술은 차량으로 유입되는 열을 줄이는 현대차, 배터리에서 발생한 열을 효과적으로 빼내는 현대모비스, 차량 전체의 열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현대위아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전기차에서는 엔진 폐열을 난방에 활용할 수 있는 내연기관차와 달리 배터리에 저장된 전력을 냉난방에도 사용해야 하는 만큼 각 장치의 온도를 개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넘어 차량 전체의 열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기술이 전비와 주행거리를 좌우한다.
자동차 열관리 전문업체들도 기술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한온시스템은 차량 실내 공조와 전기차 배터리의 적정 온도를 함께 관리하는 통합 열관리 기술 개발을 확대하고 있다. 수랭식과 공랭식을 결합한 3세대 복합식 콘덴서 시스템을 개발해 냉방 성능과 배터리 냉각 효율을 동시에 높였다. 환경 영향을 줄일 수 있는 자연 냉매 기반 열관리 기술에도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폭염과 전동화가 맞물리며 자동차 열관리 시장 자체도 빠르게 커질 전망이다. 시장조사업체 프레시던스리서치는 글로벌 자동차 열관리 시스템 시장이 2024년 약 470억 달러에서 2034년 900억 달러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10년 만에 시장 규모가 두 배 가까이 커지는 셈이다. 폭염이 일상적인 주행 환경으로 자리 잡으면서 열관리 기술이 단순한 공조 기능을 넘어 전기차의 주행거리와 충전 속도, 안전성까지 좌우하는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폭염 대응 기술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은 배터리 산업이다. 배터리는 일정 범위의 온도를 벗어나면 성능과 수명이 저하될 뿐 아니라 화재 위험도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배터리 화재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하나의 셀에서 발생한 이상 고온이 주변 셀로 옮겨가는 ‘열전파’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차단하느냐다. 업계에서는 열폭주가 발생한 이후 화재를 진압하는 것뿐 아니라 이상 징후를 얼마나 빨리 찾아내고, 발생한 열을 얼마나 빠르게 제거하며, 문제가 생긴 셀의 열이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어떻게 막느냐를 핵심 기술로 보고 있다.
국내 배터리 3사의 대응 전략도 차별화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이 ‘조기진단’, 삼성SDI가 ‘열전파 차단’, SK온이 ‘냉각 성능 극대화’에 각각 방점을 찍으면서 안전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배터리에 본격적으로 열이 발생하기 전에 이상 징후를 찾아내는 기술을 강화하고 있다. 배터리 내부 상태 변화를 분석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미리 파악하는 방식이다.
배터리 내부의 가스와 압력 변화 등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기술도 고도화하고 있다. 위험 신호가 나타나면 화재로 이어지기 전에 대응하는 것이 목표다. 여기에 축적된 배터리 데이터를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해 이상 여부를 보다 정확하게 판단하는 기술도 개발하고 있다.
배터리 종류에 맞춘 안전 기술도 강화하고 있다. 에너지저장장치(ESS)용 배터리는 하나의 배터리에서 발생한 불이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 데 집중하고 있다. 차세대 원통형 배터리에는 내부 압력과 가스를 일정한 방향으로 빠르게 배출해 연쇄적인 화재 위험을 낮추는 기술을 적용하고 있다.
삼성SDI는 배터리에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열이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정 배터리 셀에서 높은 열이 발생해도 인접한 셀로 전달되지 않도록 차단해 대형 화재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는 방식이다.
제품을 설계하는 단계부터 배터리 내부에서 열이 어떻게 발생하고 주변으로 퍼지는지를 미리 계산하는 기술도 활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화재 위험을 낮출 수 있는 배터리 구조를 설계한다.
에너지저장장치에는 화재가 발생할 경우 배터리 내부에 소화약제를 직접 분사하는 기술도 적용하고 있다. 빠르게 온도를 낮춰 주변 배터리로 불이 번지는 것을 막는 방식이다. 삼성SDI는 지난달 무정전전원장치(UPS)용 배터리가 글로벌 안전인증기관의 대형 화재 시험을 통과했다. 시험 과정에서 강제로 배터리에 이상을 발생시켰지만 화재가 주변으로 확산하지 않았고 폭발이나 파열 없이 불이 꺼졌다.
배터리 외부를 감싸는 알루미늄 케이스와 내부 압력을 밖으로 배출하는 구조도 안전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외부 충격으로부터 배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내부에 과도한 열과 압력이 쌓이는 것을 막는 방식이다.
SK온은 배터리에서 발생한 열을 최대한 빠르게 식히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배터리 전체를 냉각액으로 식히거나 기존보다 넓은 면적을 냉각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냉각액을 활용해 배터리 전체에서 발생하는 열을 직접 식히는 기술은 기존처럼 배터리 아래쪽만 식히는 방식보다 약 2배 높은 열 억제 성능을 확보했다.
배터리의 넓은 면적을 직접 식히는 냉각 기술도 개발했다. 기존 하부 냉각 방식보다 약 3배 높은 열 억제 효과를 구현해 짧은 시간에 발생하는 많은 열을 빠르게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배터리 내부 구조를 단순화하면서 냉각 효율을 높이는 기술 개발도 병행하고 있다. 배터리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열을 빠르게 빼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국내 배터리 3사의 전략을 간단히 정리하면 LG에너지솔루션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 찾아내는 기술’, 삼성SDI는 ‘발생한 열이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 기술’, SK온은 ‘발생한 열을 빠르게 식히는 기술’에 각각 강점을 두고 있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전기차 배터리 경쟁의 중심이 주행거리뿐 아니라 안전성과 열관리 능력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충전 시간이 짧아질수록 짧은 시간에 많은 전력이 배터리로 들어가면서 열도 많이 발생한다. 결국 전기차 충전 속도를 높이고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배터리에서 발생하는 열을 얼마나 빠르고 안정적으로 관리하느냐가 중요해질 전망이다.
폭염은 타이어 기술 경쟁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여름철 뜨겁게 달궈진 노면에서 고속으로 주행하면 타이어 내부 온도가 상승하고 고무 특성이 변할 수 있다. 전기차는 무거운 배터리로 차량 중량이 늘어난 데다 초기 가속 시 높은 토크가 발생해 타이어가 받는 부담도 크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와 금호타이어, 넥센타이어 등 국내 타이어 업체들은 고온 환경에서 타이어 자체 발열을 줄이는 저발열 콤파운드와 저회전저항 기술 개발을 강화하고 있다. 전기차의 높은 중량과 순간적인 토크를 견디면서도 열 발생과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기차 전용 타이어 개발도 확대하고 있다.
타이어의 회전저항을 낮추면 주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손실과 발열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전기차 전비와 주행거리 개선에도 도움이 된다. 폭염 대응이 안전 문제를 넘어 에너지 효율과 직결되는 셈이다.
산업계에서는 기후변화가 장기화할수록 ‘열을 다루는 기술’의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차량 내부를 시원하게 만드는 기존 에어컨 기술을 넘어 배터리와 모터, 전력전자장치, 충전 시스템 등 차량 전체에서 발생하는 열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냉매의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냉각 성능뿐 아니라 친환경성까지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 자연 냉매와 고효율 히트펌프, 새로운 냉각 소재 등으로 기술 경쟁 영역이 넓어지는 이유다.
폭염이 더 이상 일시적인 기상이변이 아니라 자동차가 일상적으로 견뎌야 할 주행 환경으로 자리 잡으면서 산업계의 R&D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자동차 업체가 마력과 연비, 전기차 업체가 주행거리와 충전 속도로 경쟁했다면, 이제는 극한 기온에서도 이 같은 성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능력까지 상품성을 좌우하게 됐다.
자동차 부품업계 관계자는 “전동화가 진행될수록 차량 안에서 온도를 관리해야 하는 부품과 시스템이 늘어나고 있다”며 “기후변화까지 겹치면서 열관리 기술은 단순한 공조 부품을 넘어 전기차의 성능과 안전성, 효율을 좌우하는 핵심 기술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