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국 검색 시장을 지켜온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정보기술(IT) 공룡들은 ‘인공지능(AI) 혁명’으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오픈AI가 지난해 11월 챗GPT를 내놓은 이후 전 세계 곳곳에서 AI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단연 가장 앞서가는 나라는 ‘AI의 본산지’로 불리는 미국이다. 미국에서는 실제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까.
지난 9월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AI 인사이트 포럼’을 주재하면서 미국의 ‘AI 권력’들을 워싱턴에 불러모았다. 이날 샘 올트먼 오픈AI CEO(최고경영자),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등은 의회가 주도하는 AI 룰세팅과 관련해 전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 5500억달러(약 730조원)에 달하는 순자산을 보유한 빅테크 거물들은 의회의 갑작스런 호출에도 이례적으로 정장을 입고 워싱턴으로 달려왔다. 이날 머스크 CEO는 AI 규제를 위한 연방 정부 차원의 ‘AI 담당 부서’가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AI 경쟁이 개별 기업 차원을 넘어 군사·안보와 직결되는 국가 간 패권 경쟁으로 치닫는 가운데 미국 정치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규제의 방향성은 자국 빅테크를 상대로 ‘채찍’만 휘두르기보다는 이들이 글로벌 시장을 장악할 수 있도록 안전망을 깔아주는 미국 주도의 ‘룰세팅’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AI 주도권을 위해 규제보다는 산업 육성에 초점을 두면서, 저작권 논란을 비롯한 사회적 부작용에 대해선 기업이 자율적으로 규제하는 일종의 ‘정제된 운동장’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주목할 점은 중국의 기술 추격이 거세고, 유럽(EU)이 미국 빅테크에 대한 규제 강도를 높이는 가운데, AI를 대하는 미국 정계의 입장이 초당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AI 인사이트 포럼을 주최한 4명의 공화당과·민주당 상원 의원은 ‘초당적(bipartisan)AI’를 표어로 내세웠다. 의원들에게 개별 질문이 허용되지 않았음에도 상원의원의 3분의 2에 달하는 65명이 비공개 회동에 자리하는 등 관심이 높았다. 중국의 AI 기술 추격이 거센 가운데 과연 미국 기업과 국가가 직면한 위협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초당적으로 뭉쳐 IT 업계 거물들을 불러 모아 소통을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 같은 시각은 상원뿐 아니라 하원에서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테드 류 하원의원(민주당)은 지난 9월 워싱턴DC 의회 회의실에서 매일경제를 비롯한 12개국 언론사 기자들과 만나 “인공지능은 지각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도구일 뿐이며 도구에는 당파성이 없다”며 “기술(Tech)은 초당파적인 지지를 받는 분야”라고 했다.
AI 규제와 관련해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던 미국 의회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AI 시장 선점을 위한 글로벌 경쟁이 개별 기업 차원을 넘어 국가 간 패권 경쟁으로 치닫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특히 중국은 뛰어난 AI 기술 확보를 최우선의 국익 수단으로 판단하며 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은 막대한 시장 영향력으로 늘 규제의 대상이었던 자국 빅테크를 바라보는 미국 정치권과 행정부에 중대한 각성과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AI를 바라보는 미국 정계의 시각도 독과점에 대한 피해 우려 등에 따른 ‘고강도 규제’에서 ‘기술과 혁신 진흥’으로 무게추가 옮겨가고 있다는 게 미국에서 만난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척 슈머 원내대표는 “기술 혁신의 측면에서 중국과 같은 적대국을 포함한 다른 정부들이 앞서 나가기 위해 막대한 자원을 투자하고 있다”면서 “우리가 뒤처지면 (미국의) 국가 안보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다만 구체적인 규제안 마련과 관련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짜뉴스와 저작권 침해, 비윤리적 이용을 포함한 문제 때문에 AI 규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유럽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빅테크 본고장인 미국에선 규제안 마련에 신중을 기하고 있어서다.
기업 사이드에서는 변화의 속도가 더 빠르다. 우선 AI 전쟁 1라운드에서는 오픈AI,구글 등 미국 빅테크가 한발 앞서나간 것으로 평가된다. 이들 기업은 ▲챗봇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 사용자 ▲글로벌 단위의 막대한 데이터 확보 ▲AI 기업으로서의 브랜딩과 신뢰도 구축 ▲기업 등이 참여하는 AI 앱 생태계 등을 무기로 AI 분야에서 ‘초격차’를 만들어낼 기반을 다지는 데 성공했다. 특히 이 같은 선점 효과를 무기로 AI와 데이터가 본격적으로 결합돼 거의 모든 영역에서 AI가 접목되는 ‘혁신의 2단계’에서도 우위를 점해 한국, 중국 등 제3국의 거센 반격에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자체 개발한 대규모언어모델(LLM)을 상용화하면서 AI 챗봇인 챗GPT와 바드처럼 기성품으로 만들어진 AI솔루션 시장을 먼저 장악했다. 이에 대한 제3국 기업들의 대응이 늦어지는 사이 1,2위 국가(기업)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 구조로 AI 시장 판도가 짜이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지난 8월 네이버가 더 늦지 않게 하이퍼클로바X를 출격한 배경이다. 후발주자인 한국의 경우 LLM 공개와 함께 챗봇 시장을 선점해 네트워크 효과를 노리는 빅테크의 ‘사업방정식’을 건너뛰고 곧바로 기업을 중심으로 AI버티컬 생태계를 펼쳐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AI 경쟁은 새로운 ‘티핑포인트(급격한 변화 시점)’에 접어들었다. 올해 챗봇과 같은 AI기술이 개인 사용자들의 관심을 받았다면 앞으로는 기업들의 적극적인 AI 도입과 맞물려 각종 서비스가 쏟아져 나올 가능성이 높다.
미국 AI 현장에서는 본격적으로 2024년부터 기업들의 AI 도입이 봇물 터지듯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대체적이었다. 특히 이처럼 버티컬 서비스가 팽창하는 AI 생태계 전쟁의 2막에서는 양질의 데이터 확보 유무가 승부를 가를 수 있다.
글로벌 AI 유니콘인 코히어(Cohere)는 이처럼 미국 빅테크(구글과 오픈AI 등)가 주도하는 생태계 확장 경쟁을 ‘캄브리아기 폭발(Cambrian explosion)’에 빗댔다. LLM의 기능과 접근성이 개선되면서 매일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이 나오고 AI버티컬 서비스의 폭발적인 증가세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코히어는 이 같은 AI의 물결을 전세계적으로 약 3조3000억달러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 1993년 인터넷(월드와이드웹)의 출현과 4조5000억달러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 스마트폰의 출현에 이은 세 번째 ‘혁명’으로 규정했다. 빅테크가 주도하는 LLM이 이와 유사한 경제적 가치와 성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인프라에 대한 초기 투자비용이 훨씬 적고, 개발자 생태계와 기반이 당시와 비교했을 때 훨씬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AI 혁명은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코히어는 특히 현재 AI기술이 LLM인 솔루션 전반에 걸쳐 학습·배포되고 사용자가 챗GPT와 같은 프런트엔드 도구를 사용해 텍스트를 작성하는 단계에 있다고 진단했다. 현 단계에서는 아직 기업 데이터의 맥락적인 사용이 미미하거나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2단계에서는 LLM이 관련 기업의 데이터에 접근(access) 권한을 갖게 되고, 이용자가 AI와 상호 작용할 수 있게 된다. 말 그대로 AI가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작업을 효율적으로 검색, 종합, 보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식 도우미가 된다. 현재 AI기술 발전의 프로세스는 본격적으로 2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궁극적으로 3단계에서는 AI가 인간을 대신해 직접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된다. 영화 ‘<그녀(HER)>’에 나오는 AI가 현실화되는 셈이다.
구글과 오픈AI의 AI 전략이 생태계에 방점을 찍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챗GPT를 앞세워 생성형AI 시대 포문을 연 오픈AI의 생태계 확장 전략은 15년 전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던 애플의 전략과 흡사하다는 분석이다. 과거 애플이 아이폰을 만들고 동시에 기기 내에서 구동할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를 탑재한 것처럼 검증된 IT서비스 회사들을 끌어들여 AI 생태계를 만들고, 초개인화 서비스를 구현한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3월 플러그인 스토어를 연 오픈AI는 철저한 심사를 통해 검증된 기업들만을 파트너로 합류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생태계 확장 속도는 눈에 띄는 수준이다. 지난 6월 400여개 수준이던 플러그인 파트너는 2배 이상 늘어났다.
오픈AI와 경쟁하는 구글은 물밑에서 AI 생태계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오픈AI와 같이 개방된 ‘플러그인 스토어’ 형태가 아닌 구글클라우드 고객사들과 협업하는 형태다. 구글의 AI기술력을 구글 자체 서비스뿐 아니라 구글 밖의 다양한 서비스와 연계해 오픈AI가 상당 부분 선점한 생태계를 다시 빼앗아오겠다는 복안이다. 구글은 지난 5월 연례 개발자회의(I/O)에서 오픈AI가 협업을 밝힌 주요 파트너사들을 거론하며 이들을 자사 파트너로 삼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AI 도입에 있어 국적은 큰 의미가 없다. 구글과 오픈AI의 최신형 LLM은 단기간에 언어 능력을 개선하기 위해 양질의 데이터를 선별해 학습시킨 것이 특징이다. 시작부터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한 행보다. 이들 빅테크가 국내 IT 검색 플랫폼 업계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수준까지 AI기술력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면서 ‘비영어권 특화’를 차별 전략으로 내세우며 자체 LLM 개발에 몰두해온 제3국 기업들은 차별화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AI 시장을 주도하는 오픈AI와 구글을 제외한 다른 대기업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이와 관련 AI 업계 관계자는 “초거대 테크 기업들의 경우 보안 이슈 등으로 인프라단(자체 LLM)에 손을 대볼 것이고, 자체 모델을 쓸 가능성이 높다”면서 “반도체에서 자급자족 전략을 펼쳤듯 거대 기업들의 경우 당분간 AI 도입에 있어 합종연횡과 자체 개발이라는 투트랙 전략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애플은 최근 자체 LLM 개발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블룸버그는 애플이 머신러닝·AI와 관련한 조직을 꾸리고 지난해 말 생성형AI 기반 챗봇 ‘애플 GPT(가칭)’를 구축했다고 보도했다. 업계에서는 애플이 내년 중 AI와 관련해 중대한 발표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7월 AI 회사 ‘xAI’를 출범시켰다. ‘xAI’의 경우 머스크 CEO가 오픈AI와 경쟁하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밝힌 지 불과 3개월 만에 나왔다. 그만큼 긴박한 경쟁의 속도감이 반영된 행보로 보인다. 일론 머스크는 xAI의 첫 행보를 밝히면서 에너지 효율성을 차별화 포인트로 내세웠다. 현재의 AI 개발은 무차별적으로 대량의 데이터를 학습하는 방식이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있어 이를 집중 공략하겠다는 복안이다.
스타트업은 AI 생태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축이다. 오픈AI 역시 스타트업으로 시작했다. 세계적인 ‘바이오 메카’로 잘 알려진 보스턴은 최근 바이오·AI·로보틱스 등 신기술 분야에서 전 세계 인재·자본·기술을 빨아들이는 창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 등 지역 내 초일류 대학이 중심이 돼 연구·교육·창업·투자가 모두 이뤄지는 선순환 창업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기자가 최근 찾은 보스턴에서는 AI기술을 바이오·로봇 등과 접목시키는 시도가 활발했다.
보스턴의 기술 생태계는 실리콘 밸리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AI·로봇 분야의 인재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하버드대, MIT가 인재 화수분 역할을 한다. 보스턴에만 500개에 가까운 벤처캐피털(VC)이 있고 랩센트럴과 같은 창업 플랫폼이 활성화돼 생태계가 공고하다.
세계적 규모의 벤처 생태계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정부는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예컨대 창업지원센터에 대한 주정부의 재정 지원 수준은 크지 않지만 민간 투자자금이 원활하게 유입될 수 있도록 규제를 없애고 제도를 개선하는 한편 인프라 스트럭처를 구축하는 데 힘을 보태는 식이다. 앤드루 프렌들리 오토데스크 부사장은 “보스턴의 빠른 혁신을 이끄는 원동력은 학계와 산업계의 협력, 그리고 창업문화 육성에 있어 주정부의 선견지명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보스턴을 대표하는 창업기관인 이노벤처랩스 CEO 크리스 일슬리는 “보스턴은 과학과 기술로 붐비고 있다”면서 “특히 보스턴 창업 생태계의 특징은 ‘터프테크’에 집중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보스턴 대학가와 VC 업계에서는 터프테크를 ‘리스크(위험)가 크고 불가능에 가깝지만, 인류를 위해 꼭 필요한 기술 분야에 도전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MIT는 터프테크만을 지원하는 차별화된 펀딩과 제도를 만들었다. 이 학교가 총장 주도로 2016년 2500만달러의 예산을 투입해 만든 VC ‘디엔진(The Engine)’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MIT가 모금을 시작하자 계획보다 많은 2억달러가 모였고, 3년 후 MIT에서 분사해 독립 펀드로 운영 중이다. 엔진이 다른 펀드와 가장 차별되는 점은 최대 18년까지로 설정해놓은 투자기간이다. 한번 선정되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건 없이 투자가 이뤄지고, 스타트업들은 규모가 더 크고 장기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엔진은 이를 두고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원대한 투자’라는 표현을 쓴다. 특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 하드웨어 스타트업들이 엔진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황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