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8일. 새해를 앞두고 중국 국가신문출판서는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 게임 7종을 포함한 총 44종의 외국산 게임 수입을 허가했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외자판호를 발급받은 한국산 게임은 스마일게이트의 ‘로스트아크’ ‘에픽세븐’, 넥슨의 ‘메이플스토리M’, 넷마블의 ‘제2의 나라: 크로스 월드’ ‘A3: 스틸얼라이브’, 넷마블 자회사 카밤의 ‘샵 타이탄’, 엔픽셀의 ‘그랑사가’ 등이다. 이들 게임의 배급·운영은 중국 소재 기업이 맡기로 공시됐다.
중국 정부가 2021년 6월 이후 1년 6개월 만에 한국 게임에 판호(版號·중국 내 게임 서비스 허가)를 대거 발급하면서 한국 게임업계에서는 ‘한한령(한류 제한령)’이 대폭 완화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커진 상황이다. 중국은 심의를 거친 자국 게임사 게임에 ‘내자판호’를, 해외 게임사 게임에는 ‘외자판호’를 발급해 서비스를 허가해왔다. 중국의 전향적인 움직임에 한국 게임사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국 게임 산업계가 주력하는 모바일 게임 분야에서 중국은 단일 국가 최대 규모 시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게임사에 대해서는 비교적 ‘신작’을 위주로 판호가 발급된 점에서도 긍정적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중국이 빗장을 푼 진짜 속내가 따로 있다는 얘기도 함께 나온다. 굳게 닫았던 게임 빗장을 푼 중국 시장은 과연 한국 게임사들에게 블루오션이 맞을까.
한국은 2014~2016년 중국에 48개의 게임을 수출했지만 한한령이 본격화한 2017년 3월 이후 외자판호를 거의 받지 못했다. 2020년 12월 컴투스의 ‘서머너즈워: 천공의 아레나’가 한한령 이후 한국 게임으로는 처음으로 외자판호를 받았고, 작년에는 펄어비스의 ‘검은사막 모바일’이 판호를 받아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난 2020년, 2021년에 이뤄진 판호 발급은 출시가 오래된 작품들에 한정됐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했다. 이번에 판호를 받은 게임 7종 중 4종이 2020년 이후 출시 작품이고, 2종은 작년 출시작이라는 점에서 기존과는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제2의 나라, 로스트아크, 에픽세븐은 글로벌에서 여전히 흥행 중인 작품인데 중국 시장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분석도 많다. 이에 더해 업계에서는 국내 게임사에 대한 추가 판호 가능성도 높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중국 즈옌컨설팅 등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게임 시장 규모는 2652억위안(약 49조원)으로 추정된다.
중국은 결코 쉽지 않은 시장이다. 익명을 요청한 게임업계 한 관계자는 “중국 시장은 불확실성이 너무 큰 데다 기대만큼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면서 “차라리 중국을 패싱하고 중국에 닫혀있던 시간에 준비해온 북미·유럽 시장 개척에 계속 공을 들이는 게 현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게임업계에서는 펄어비스의 ‘검은사막 모바일(검사모)’ 사례에 주목한다. 지난해 중국 시장에 출시된 검사모는 2017년 사드(THAAD) 사태 이후 중국 시장에서 판매 허가(판호)를 받아 정식 출시까지 이어진 첫 사례였지만 메가히트 게임 반열엔 오르지 못했다.
지난해 게임 출시 직후 처음 열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김경만 펄어비스 최고사업책임자(CBO)는 “중국 ‘검은사막 모바일’의 매출 기조는 예상 대비 약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면서 “한한령으로 판호 발급이 오랜 기간 지연되는 동안 검은사막 모바일에 대한 유저 기대치는 높아졌고 저희의 기대치도 높았던 것은 사실”이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펄어비스는 검사모의 단기 흥행보다는 중·장기 흥행에 사업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 게임의 ‘고인물’ 지식재산권(IP)으로는 더 이상 중국 시장에서 새로움과 신선함을 주기가 어려워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한령으로 판호 발급에 오랜 시간이 지연되는 동안 중국 시장에 새로운 게임 지식재산권이 출시됐고, 사용자 눈높이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중국이 지난 10년간 한국 게임을 모방하면서 축적한 노하우와 기술·자본도 한한령 이후 새로운 장벽이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게임 수익 모델(BM)과 관련한 중국 당국의 규제 여건도 과제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청소년의 게임 이용시간을 극단적으로 제한하며 게임 산업 규제를 강화했다. 중국 당국은 2021년 8월 말 게임을 ‘정신적 아편’으로 규정하고 18세 미만 청소년에 대해 일주일에 3시간만 온라인 게임을 허용하는 게임 중독 방지법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청소년의 게임 이용시간을 평일 하루 1시간 30분, 주말 하루 3시간으로 제한한 것에 이어 지난해 8월 말 새로운 규제를 발표하며 평일 이용을 전면 금지시켰다.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평일 게임 이용을 금지하고 금요일과 토요일, 일요일, 법정공휴일에만 오후 8시부터 9시까지 1시간 동안 게임을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현지 매체 펑파이신문에 따르면 작년 중국 게임 시장 매출액은 2658억8400만위안(약 49조7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10.3% 줄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 침체의 영향으로 게임 이용자들의 지불 능력이 떨어지고 소비 심리가 위축됐으며 청소년 게임 규제 강화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게임업계의 수익성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가운데 중국의 자국 게임 우선주의도 여전한 상황이다. 지난해 중국 방송 규제 당국인 광전총국은 허가받지 않은 온라인 게임의 생방송(라이브 스트리밍) 전면 금지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해외 게임이나 게임 대회를 허가 없이 서비스해서는 안 된다며 모든 종류의 생방송 플랫폼들은 비정상적인 콘텐츠나 해로운 팬 문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게임업계 일각에서는 “중국이 해외 게임사에 대한 외자판호를 발급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인 국내 게임사에 대한 판호 발급을 제한해온 1년 6개월간 시장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는 지적이다. 특히 한국 게임에 대한 판호 규제가 사드에 대한 정치적 보복 이외에도 자국 시장에 대한 보호 목적도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번 대규모 판호 발급은 자국 시장과 게임사들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게임 시장은 개방해도 될 만큼 경쟁력이 있다는 게 중국 당국의 판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산 게임은 빠르게 국내 시장에 침투하고 있다. 올해 초(2023년 1월 2일 기준) 구글 게임 인기 순위 ‘톱10’에 중국 게임 3개가 오른 것이 대표적인 예다. 원신, 탕탕특공대, 아르케랜드와 같은 게임으로, 국내 게임 시장에서 비교적 오랜 시간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업계에선 국내 매출 톱10에서 이들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을 30~4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21년 중국 게임 산업 보고서’를 보면 2021년 중국 게임사의 해외 매출은 180억1000만달러(약 22조2153억원)로 전년 대비 16.6% 증가했다. 국가별 매출 비중을 보면 한국은 7.2%로 미국(32.6%)·일본(18.5%)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수출 시장이다. 금액 기준으로는 중국 게임 업체들이 한국에서 12억9672만달러(약 1조6037억원) 매출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2010년대 중반부터 한국이 강점을 가진 모바일 게임 분야에서 중국이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중국 게임사들은 개발자 인건비가 훨씬 저렴해 게임 개발에 유리했고, 기술적으로 이미 한국 게임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평가다. IP 경쟁력 측면에서는 중국이 이미 한국을 넘어섰다는 게 냉정한 현실이다. 중국의 대표 게임사인 텐센트, 넷이즈 등은 이미 시가총액은 물론 히트작 숫자와 시장 점유율에서도 글로벌 ‘1티어’ 게임사로 도약한 지 오래다. 현재 업계에선 우리나라가 절대적인 게임 개발력 우위를 갖고 있는 분야는 MMORPG 정도로 보고 있다.
게임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한 관계자는 “단순히 중국 시장 빗장이 풀렸다고 한국 게임사들에 캐시카우를 가져다주는 호시절은 끝났다”면서 “중국만을 타깃으로 하는 게 아니라 글로벌 스탠더드로 통하는 게임을 만드는 게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중국 게임 시장은 대내외 정세에 따라 언제든 판호 발급이 중단될 수 있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수년간 한국 게임에 대한 판호 발급이 이뤄지지 않는 사이 한국을 대표하는 게임 회사들은 서구권 시장 진출에 공을 들이고 있다. 실제로 국내 게임사들은 중국 시장에 대해 면밀하게 동향을 체크하고 있지만 북미, 일본 등 시장과 장르 다변화라는 내년 전략에는 큰 기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국내 게임사들은 올해 기존 모바일 일변도 게임에서 벗어나 장르 다변화·콘솔게임 신작을 통해 해외 시장 점유율 확대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위해 시작부터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한 대작 게임들을 대거 출시할 예정이다. 다만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준비 중인 신작들의 옵션에 중국 시장이 추가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중국 사업과 관련해서는 결국 중국 시장에서 통할 게임을 만들 수 있는가가 핵심 과제다. 50조원에 달하는 중국 유저들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이들의 바뀐 취향을 공략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를 위해서는 면밀한 분석과 현지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일례로 최근 중국 시장에서는 최근 서브컬쳐 장르가 인기다. 국내에서 여전히 비중이 높은 MMORPG 게임은 시장 비중이 3% 수준에 불과하다. 중국은 국내와 달리 장르가 매우 다변화된 시장으로 평가된다. 가장 큰 인기 장르인 수집형 RPG의 60% 이상이 서브컬처 게임에 해당할 정도다. 업계에서는 올 상반기 서브컬처 수집형 RPG 게임 출시를 예고한 국내 게임사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성과를 거둔 이후 중국으로 확장할 가능성을 점친다.
황순민 매일경제 디지털테크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