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그룹들의 올해 연말 인사가 예년보다 빨라지고 있다. 안정보단 변화를 택하며 컨트롤타워 교체가 눈에 띄는 가운데 AI 중심 미래산업형 인재를 발탁하는 등 파격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빠른 인사 시계는 복합 위기 대응을 위한 리더십 정비, 세대교체는 권한 이양과 조직 활력 제고, AI 인재 전진 배치는 사업구조 전환 가속화를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SK그룹은 지난 10월 30일 사장단 인사를 단행하며 주요 그룹 중 가장 먼저 속도전에 돌입했다. 젊은 사장단과 AI·배터리 분야의 기술형 리더를 대거 전면에 내세웠다. SK그룹은 2026년 사장단 인사에서 총 11명의 사장 승진자를 내며 전년(2명)보다 5배 이상 규모를 키웠다. 이 중 절반에 해당하는 5명이 1970년대생으로, 젊은 리더십 강화 기조가 더욱 뚜렷해졌다.
이형희 SK수펙스추구협의회 커뮤니케이션위원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해 그룹 수뇌부에 합류했고 정재헌 SK텔레콤 최고거버넌스책임자(CGO)는 신임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됐다. 정 사장은 2020년 법무그룹장으로 입사한 판사 출신으로, 강력한 내부통제와 컴플라이언스 기반의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다.
이번 인사에서 김정규 SK스퀘어 사장(1976년생), 김완종 SK㈜ AX 사장(1973년생), 염성진 SK수펙스추구협의회 커뮤니케이션위원장(1972년생), 이종수 SK이노베이션 E&S 사장(1971년생), 정광진 SK실트론 사장(1970년생)이 새롭게 사장단에 합류했다. 특히 염성진 사장은 전임 이형희 위원장(1962년생) 대비 10살 가까이 젊어지며 세대교체 흐름을 상징한다는 평가다.
승진자 외에도 올해 신규 보임된 사장 가운데 한명진 SK텔레콤 통신 CIC장(1973년생)과 윤풍영 SK수펙스추구 협의회 담당 사장(1974년생) 역시 1970년대생으로 분류된다. 여기에 기존 사장단에서도 김양택 SK㈜ 머티리얼즈 CIC 사장, 류광민 SK넥실리스 사장, 노종원 SK아메리카 사장, 이상민 SK아이이테크놀로지 사장(모두 1975년생), 장호준 SK트레이딩 인터내셔널 CIC 사장·추형욱 SK이노베이션 사장(1974년생), 최안섭 SK지오센트릭 사장(1972년생), 김원기 SK엔무브 사장·유영상 SK수펙스추구협의회 AI위원회 사장(1970년생) 등이 포진해 있다. 이번 인사로 1970년대생 사장단은 기존 10명에서 16명으로 늘었다. 이 중 SK 주요 계열사 사장이 12명에 달해, 전체 사장단 34명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1970년대생으로 채워졌다. SK그룹 사장단의 평균 연령이 뚜렷하게 낮아졌다는 분석이다. 또한 최태원 회장 비서실장 교체도 눈길을 끈다. 김정규 사장이 SK스퀘어 사장으로 이동하면서, 그 자리를 1980년생 류병훈 SK하이닉스 미래전략 담당(부사장)이 이어받았다. 전임자보다 4살 젊은 데다, 최 회장(1960년생)과의 나이 차는 20살에 달해 ‘파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류 부사장은 SK텔레콤 입사 후 SK하이닉스 미래전략팀장을 맡아 장기 로드맵과 미래사업 설계를 책임져온 인물이다.
이러한 추세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기업분석기관 리더스 인덱스에 따르면 2025년 기준 매출 상위 500대 기업 중 사업보고서를 제출한 369개사의 CEO 평균 나이는 59.8세로, 처음으로 환갑 아래로 떨어졌다. 이는 2023년 61.1세, 2024년 60.3세였던 흐름보다 더 빠른 하락세다. 특히 60대 CEO 대신 40대 CEO를 선임한 기업 수가 늘며 평균 연령을 끌어내렸다.
HD현대와 한화그룹의 세대교체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HD현대는 1982년생인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을 지난 10월 17일 대표이사 회장으로 선임하며, 1980년대생 오너 체제를 공식화했다. 정 회장은 지난해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한 지 1년 만에 회장직에 올라, 조선·에너지 분야의 글로벌 전략을 본격 주도하게 됐다. HD현대는 동시에 마스가(MASGA, 미국 조선산업 재건 프로젝트) 참여를 앞두고 조선 부문에만 부회장 1명, 사장 3명을 승진시키며 기술·사업 양 축에서 리더십을 강화했다. 특히 조선·해양 엔지니어 출신들이 대거 중용돼 실무 중심 체제를 강화했다는 분석이다.
한화그룹도 1983년생인 김동관 부회장을 중심으로 에너지 부문에 40대 초반 임원을 대거 배치했다. 한화에너지·한화토탈에너지스·한화파워시스템·한화엔진 등 4개사에서만 1980년대생 사장급이 5명 탄생했으며, 전체 임원 승진자 76명 중 10명 이상이 40대 초중반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는 사법리스크 해소 이후 첫 인사를 내놓았다. 이재용 회장은 지난 7월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으며 경영 전면 복귀 기반을 마련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사업지원TF를 상설 조직인 ‘사업지원실’로 격상하고, 2인자였던 정현호 부회장이 퇴진하는 조직 재정비를 단행했다. 이는 이번 정기 사장단 인사에서의 변화를 예고한 조치다. 또한 삼성전자는 반도체(DS) 사업의 전영현 부회장, 모바일·가전(DX) 사업의 노태문 사장으로 투톱 체제를 확립하며 경영 안정에 주력한다.
아울러 기초과학 및 공학 부문의 글로벌 석학인 박홍근 하버드대 교수를 영입하고 소프트웨어 전문가인 윤장현 부사장을 승진시키며 기술 연구에 힘을 싣는다. 노태문 사장은 대표이사로 선임되면서 ‘직무대행’을 떼고 정식 DX부문장이 됐다. MX사업부장직은 그대로 유지한다. 노 사장은 지난 3월부터 8개월간 직무대행으로서 DX부문을 이끌어왔다. 전영현 부회장은 DS부문장과 메모리사업부장직에 유임됐다. 전 부회장이 맡았던 SAIT(옛 삼성종합기술원) 원장직에는 박홍근 사장이 신규 위촉됐다.
내년 1월 1일 입사 예정인 박 사장은 1999년 하버드대 교수로 임용돼 25년여간 화학, 물리, 전자 등 기초과학과 공학 전반 연구를 이끌어온 글로벌 석학이다.
DX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 사장 겸 삼성리서치장으로는 윤장현 삼성벤처투자 대표이사 부사장이 승진했다. 또한 AI 기술 고도화 등을 통해 갤럭시 S25의 개발 성공과 글로벌 사업 성장을 주도한 최원준 부사장을 지난 3월 MX사업부 최고운영책임자(COO)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또한 3M, 펩시 등 글로벌 브랜드의 최고디자인책임자(CDO)를 역임한 마우로 포르치니를 올해 4월 DX부문 CDO 사장으로 영입했다.현대차와 LG도 인사 발표를 목전에 두고 있다. 소폭의 인사를 점치는 시각이 지배적이나 그 가운데서 파격이 깃들 가능성도 없지 않다.
현대차는 미국이 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15% 부과함에 따라 올해와 내년에 수조 원대의 적자가 발생할 것이란 우려가 안팎에서 나오는 만큼, 이에 잘 대응할 수 있는 인재를 전진 배치할 필요가 생겼다. 그 적임자로 젊은 인사들이 선택받을 가능성이 있다. LG그룹도 인사의 범위를 크게 가져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내부에선 조주완 LG전자 사장과 정철동 LG디스플레이 사장의 부회장 승진 여부가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룹 차원에서 디스플레이, 전장, 2차전지 등 미래 기술을 중심으로 한 조직개편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혁수(55) LG이노텍 대표와 이선주(55) LG생활건강 사장 등 40~50대 젊은 임원이 승진과 함께 전면에 나설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현대차그룹 역시 2026년 정기 사장단 인사를 이르면 11월 말 단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리스크 대응력과 미래사업 리더십을 동시에 갖춘 인재 발탁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정의선 회장은 장재훈 현대차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키고 다수 계열사 대표를 교체하며 대규모 개편을 단행한 바 있다.
올해는 ‘연속성과 보완’ 기조 아래 기존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일부 주요 보직에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2025년 인사에서 현대차그룹은 미래사업 기반을 정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에 따라 R&D, 해외사업, 신기술 부문에서 외부 인재를 대거 영입하고, 주요 계열사의 사장단을 교체하는 등 조직 전열을 재편했다.
정 회장은 글로벌 위기 대응, 전동화 전환, AI 기반 SDV(소프트웨어 정의 차량) 개발 등을 주요 과제로 제시하며, 기술 중심 리더십 강화에 나서 왔다. 이에 따라 올해 인사는 전면 쇄신보다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면서 필요 부문에 한해 전략적 보강이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다.
현대차그룹 인사의 핵심 변수로는 대외 변수에 직면한 고위 임원의 거취가 꼽힌다. 대표적으로 성 김 현대차 사장은 그룹 내 대관(對官) 업무를 총괄하고 있으며, 미국 정부와의 관세 협상 및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대응 등 주요 현안을 조율해 왔다.또한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의 거취 역시 관심사다.두 인물 모두 외국인 사장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전략을 대표하는 리더라는 점에서 교체 가능성에 재계 시선이 쏠린다.
현대차그룹이 최근 공을 들이고 있는 자율주행, AI, SDV 등 미래차 분야에선 리더십 재편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번 인사에서 SDV·AI 개발을 총괄할 신규 기술 수장 선임, 혹은 기존 리더십의 위상 강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현대차는 미국·중국·유럽 시장에서 SDV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기술 투자와 인재 확보를 확대하고 있어, R&D 라인의 기능 강화는 유력한 개편 축으로 거론된다.
11월 말 예고된 LG그룹 2026년 정기 사장단 인사 역시 구광모 ㈜LG 대표의 실용주의 인사 기조와 세대교체 향방에 쏠린다. LG는 이달 마지막 주 전자·화학 계열사 및 지주사 이사회를 개최하고 사장단 인사를 발표할 계획이다. 인사 시점은 예년과 유사한 흐름으로, LG는 2024년 11월 21일, 2023년 11월 23일 인사를 단행한 바 있다. 구광모 대표 체제 7년차를 맞은 LG는 그동안 ‘안정 속 변화’ 기조를 유지하며 기존 리더십의 연속성과 전략적 세대 교체를 병행해 왔다. 지난해는 소폭 인사에 그쳤으나, 올해는 글로벌 경기 둔화와 기술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이중 과제를 마주한 상황에서 조직의 역동성 강화를 위한 보다 뚜렷한 인사 방향이 제시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올해 LG 인사의 핵심 관전 포인트는 부회장단 인선이다. 현재 LG그룹은 권봉석 ㈜LG 부회장과 신학철 LG화학 부회장 2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2023년 권영수 전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이 물러난 이후 부회장단 규모가 축소돼 왔으며, 이번 인사에서는 승진을 통한 재정비가 이뤄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후보군으로는 조주완 LG전자 사장과 정철동 LG디스플레이 사장이 거론된다. 조 사장은 2021년 말부터 LG전자 CEO를 맡아 B2B·HVAC 등 신사업 확대와 인도 법인 IPO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글로벌 성장 기반을 구축했다. LG전자 연간 매출은 2021년 73조원에서 지난해 약 88조원으로 확대됐다.
정 사장은 LG디스플레이의 비효율 사업을 정리하고 OLED 중심 체질 개선을 통해 4년 만의 흑자 전환을 이끌었다. 3분기에는 431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으며, 지난달 타운홀 미팅에서는 “연간 흑자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밝히며 자신감을 드러낸 바 있다. 다만 최근 국민연금이 LG화학을 비공개 중점관리기업에 포함시킨 점은 신학철 부회장의 거취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LG가 실용주의 인사 원칙을 유지하되, 올해는 부회장단 재편과 세대교체라는 상징적 변화가 더해질 가능성이 크다”며 “구광모 대표가 어떤 인물을 차기 리더로 발탁하느냐에 따라 향후 LG그룹의 미래 전략 구도가 더욱 뚜렷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추동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3호 (2025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