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한 번 충전에 800㎞ 가는 전고체 배터리… 도요타, 상용화 선전포고에 국내 기업 발등에 불
김병수 기자
입력 : 2021.01.06 11:15:35
꿈의 배터리라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를 둘러싸고 업체 간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차세대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가 관련 기업들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져줄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자칫 개발 경쟁에서 밀리면 시장에서 도태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총성은 일본 도요타에서 먼저 울렸다. 도요타는 새해에 전고체 전지 탑재 차량 시제품을 공개하고, 2020년대 초반 전고체 전지가 탑재된 전기차를 양산할 계획이라고 지난 12월 초 발표했다.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전기차 배터리는 리튬이온 배터리다. 전지의 양극(+)과 음극(-) 사이를 리튬이온(Li)이 오가며 충전과 방전하는 원리다. 리튬이온이 음극으로 몰려가면 전기가 충전되고 양극으로 이동하면서 전류가 발생한다. 리튬이온이 오가는 도로 역할을 하는 전해질이 배터리의 충전 성능을 좌우한다.
문제는 현재 전기차에 올라가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전해질이 액체라는 점이다. 과도한 열이나 충격, 압력을 받으면 액체 전해질이 흘러내려 폭발할 수 있다. 반면 전고체 배터리는 액체 전해질을 고체로 대체해 폭발 위험을 없앤다.
안전성 외에도 장점은 더 있다. 전고체 배터리를 사용하면 이론상으로는 커피 한 잔 정도 마시는 시간에 충전이 완료된다. 또한 1회 충전 시 주행거리가 월등하게 길어지고 충전 시간도 30분~1시간에서 5~10분 정도로 확 줄어든다. 배터리 부피가 작아져 차량을 설계할 때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도 있다. 전고체 전지가 상용화되면 자율주행차에도 호재다. 데이터 사용량이 많은 자율주행차량은 고용량 배터리가 필수다.
같은 이유로 앞서 도요타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내외 배터리 업체들이 전고체 전지 개발에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2020년까지 리튬 2차전지 기술 확보가 배터리 업계의 최우선 과제였다면 새해부터는 차세대 전지 기술 확보를 두고 기업 간,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업계에선 도요타가 세계에서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에 가장 앞서 있는 것으로 평가하지만 도요타가 계획한 일정대로 양산에 성공할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도요타 발표에 대해 국내 업계에선 신규 플랫폼 양산은 2030년께 가능할 거라는 분석이 대세다. 전지 시제품이 나와도 이를 테스트하고 실제 자동차에 장착하기까지는 수년의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 리튬 2차전지가 1991년에 나온 후 자동차에 적용되기까지 20년 이상이 걸렸다.
하지만 도요타가 2020년대 중반에 전고체 전지 차량 판매에 돌입할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된다. 도요타는 정부와 산학이 연계한 ‘올 재팬(ALL JAPAN)’ 전략으로 이미 10여 년 전부터 전고체 전기 개발에 나섰다. 전 세계 전고체 전지 특허에서 4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연구가 앞서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도요타가 그동안 자동차 업계에서 기술력을 입증해왔던 만큼 월등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자 국내외 경쟁 업체들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당장 중국, 일본과 배터리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국내 업체들은 앞다퉈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전지 양산 목표시기를 2~3년씩 앞당기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은 늦어도 2020년대 중후반까지 차세대 전지를 내놓는다는 전략이다.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은 2020년 5월 1회 충전에 800㎞를 주행하는 전고체 전지 연구 결과를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국내 기업의 전고체 배터리 실제 상용화 일정은 2030년께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2025년 전고체 배터리가 들어간 전기차를 시범 생산한 후 2027년 양산 준비에 돌입, 2030년 본격적으로 양산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국내 배터리 업체들도 비슷한 시기에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에 나설 전망이다. 삼성SDI는 전고체 배터리 양산 시점을 2027년 이후로 잡았으며, LG에너지솔루션은 2025년께 전고체 배터리 샘플 개발에 나선다. SK이노베이션도 전고체 배터리 개발 관련 인력을 채용하며 기술력 확보전에 뛰어들었다. 이에 맞춰 포스코케미칼·SKC·에코프로비엠 등 국내 배터리 소재 업체들도 전고체 배터리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현대차는 자체적으로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지만 삼성SDI, LG에너지솔루션,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배터리 기업과의 협업 가능성도 거론된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2020년 5~7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연쇄 회동을 이어가는 등 각 사의 배터리 사업장을 직접 찾아 차세대 배터리 개발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박진호 현대차 배터리개발실장은 “전고체 배터리는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 소재, 공정과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보다 효율적으로 양산 준비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며 “2~3년 내에 전기차에 탑재 가능한 프로토타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에선 기업공개(IPO)를 통해 대규모 자본조달에 성공한 퀀텀스케이프도 최근 전고체 배터리 실험결과를 공개했다. 퀀텀스케이프가 개발 중인 전고체 배터리는 한 번 충전으로 300마일(483㎞)을 주행할 수 있으며, 수명은 12년에 달한다. 배터리의 80%를 충전하는 데는 15분가량이 걸린다. 퀀텀스케이프는 2024년께 전고체 배터리 생산에 돌입할 예정이며, 주요 투자사인 폭스바겐은 2025년부터 전고체 배터리를 회사의 전기차에 적용한다는 목표다.
삼성과 현대자동차가 투자한 솔리드파워가 2022년부터
전고체 배터리 테스트를 추진한다. 사진은 솔리드파워가
개발한 20Ah용 전고체 배터리 시제품.
이밖에 대만 폭스콘은 2024년 전고체 배터리를 출시하겠다고 선언했고 미국 솔리드파워는 2023년 전고체 배터리 양산에 돌입, 2028년 전고체 전지 탑재 전기차를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독일 BMW는 솔리드파워와 손잡고 전고체 배터리 전기차를 2025∼2026년께 출시할 계획이다. 이밖에 무라타와 히타치, 교세라, 도레이, 스미토모화학 등 일본 소재업체들과 중국 배터리업체 CATL도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다.
삼성SDI의 한 간부는 “전고체 전지의 본격적인 시장 형성은 2030년으로 예상된다. 세계 각국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차세대 전지에 대한 정부차원의 체계적인 연구개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